너는 내게 핑크맨이야

in #stimcity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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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이하 아타카마)부터 조금씩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나에게 수크레는 요양지였다.

아, 아타카마... '지구상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곳' 따위의 로맨틱한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지만, 아타카마는 정말이지 지독했다. 도민준이 지구상에서 제일 좋아한 장소가 아타카마 사막인 덕분에 한국인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은 모양인데 일단 생활의 냄새라고는 조금도 나지 않아서 사람 사는 동네라기보다는 영화 세트장 같았다. 세트장을 벗어나면 생활인들의 식당이 나타났지만, 그 노골적인 분리에 대해 반감이 들었으므로 굳이 그곳에 찾아가 밥을 먹는 일 역시 영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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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없는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리 없었다. 내가 여행지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오로지 생활 자체이기 때문이다. 생활이 삭제된 대신 세트장을 벗어나면 사막과 호수와 계곡이 있었다. 날 것의 자연을 보기 위해 여행자들이 몰려들었고, 아타카마에는 투어 상품이 유난히 많았다. 여행자들은 투어로 아타카마에서의 시간을 채우곤 했는데 투어에 대해 쓸모 이상의 거부감을 가진 나조차도 '아, 이곳에서는 투어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방법이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장고 끝에 신청한 달의 계곡인지 죽음의 계곡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름의 투어는 예상대로 별것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날 것의 자연조차도 세트장 같았던 것 같다. 트루먼을 굴복시키려고 했던 그 바다의 파도와 폭풍우처럼. 마른 땅의 살결이 만들어 낸 탈 지구적 경관은 이미 라다크에서 매일 같이 보았던 것이라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지독히 힘들었다. 목적지로 이동하는 투어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아타카마에 소금사막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지각변동의 역사에 대해 신나게 설명했다. 수억 년 전에는 바다였던 그 땅을 땡볕 아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걸으며, 나는 왜 돈을 내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이 고행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들을 했고, 땅과 절벽에 묻은 허연 가루를 손가락에 찍어 혀에 대어 보곤 했다. 그것만은 진짜 소금이었다.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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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투어조차 실망스러웠으니 동네에 정 붙일 구석이 정말 단 한 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무려 칠레, 그것도 아타카마 사막까지 갔으니 인심을 써서 꾸역꾸역 좋았던 것 하나를 꼽자면, 아득한 한낮 뙤약볕이 쏟아질 때 공원 근처 구멍가게 파라솔 아래서 마시던 오렌지 맛 환타? 그때만큼은 시름을 덜며 낮잠을 청해 볼 수 있었다. 그 파라솔 아래가 아타카마에서 가장 멋진 공간이었고, 그 콜라는 아타카마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사실 그 기쁨에 있어 80% 지분은 환타가 갖고 있으니 아타카마에겐 그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다! 해먹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거나, 숙소에 사는 커다란 개와 놀거나, 엄청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등 즐겁기 위해 애를 써 보았지만 허사였다. 끝내는 무책임한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저씨 때문에 노발대발하며 아타카마를 떠나야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타카마를 떠나 우유니를 거쳐 라파즈에 도착하자 몸은 이런저런 기능을 멈추어 갔다.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여길 왔어야 했는데... 라고 하고 싶지만, 남미에는 중장년의(이따금 노년의) 여행자도 많기에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라파즈에서 우연히 알게 된 볼리비아 친구들은 라파즈에는 왜 왔냐며 수크레로 가라고 했다.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수크레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는데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당장 달려가 뿌리를 내리고 몇 날 며칠이고 쉬고 싶었다. 결국 마추픽추를 포기하고 수크레로 향했다. 쓰다 보니 전사가 좀 길어졌다.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수크레에 갈 일은 없었을 것이고, 수크레에 가지 않았다면 핑크맨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를 끝내 지치게 하여 수크레에서 요양하게 만드는 것이 아타카마, 그 지독한 세트장의 임무였던 것이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수크레로 향하게 되기까지 몇 단계의 우연이 작용하여 말간 얼굴에 핑크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 핑크맨을 만났다. 이름 외에 다른 호칭으로 불러본 적 없지만, 나에게 그녀는 언제나 핑크맨이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에게 붙인 애칭이 핑크맨이라는 걸 아직 모른다. 아마 이 글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라파즈에서 만난 친구들 말대로 수크레는 활기가 넘치면서도 우아한 동네였다. 동네 곳곳에 생활의 장면이 가득했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다. 수크레에 도착하자마자 볼리비아 비자를 연장할 생각부터 했다. 게다가 온갖 주방용품을 완벽하게 갖춘 게스트하우스의 커다란 공용 부엌 덕분에 한국 음식을 해 먹으며 떨어진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핑크맨을 처음 만난 날에도 나는 부엌에서 카레를 만드는 중이었다. 마침 그녀가 부엌 앞을 지나다가 그리운 고국의 카레 냄새를 맡게 된 것은 다음 우연이었고, 그렇게 몇 차례 우연이 반복되니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녀가 "우왓! 카레 냄새!"하며 다가와 "이거 한국 카레예요?"라고 물었던 것 같다. 나는 같이 먹자고 했고, 그녀가 응했고, 밥을 먹으며 우리가 나눈 대화는 짧고 뻔한 것이었다. "언제 왔어요?", "어디서 왔어요?" 따위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들. 길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나누는 흔해 빠진 대화. 대화의 내용은 여느 때와 같이 뻔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그 몇 마디의 오고 감 속에 뻔하지 않은 무엇이 흐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이런 종류의 호기심이 드는 경우 이유 같은 건 없다. 연결되어 있다고 알게 되는 것. 구태의연하지만, 영혼의 끌림 같은 거다. 나는 좋아하면 들이대는 편이기 때문에 내일 점심에는 비빔밥과 된장찌개를 만들어 주겠다고 그녀를 꼬셨다. 당연히 그녀는 내 꼬임에 다시 한번 응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한국인이 운영하는 코딱지만 한 분식점에서 핑크맨을 다시 만났다.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막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다시 짧은 인사를 나누고 별다른 대화 없이 헤어졌다. 다음날 점심에는 비빔밥과 된장찌개를, 저녁에는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한국 여행자가 만든 김치전인가 야채전인가를 함께 먹었다. 사람들이 모인 테이블 위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시껄렁한 대화가 오갔고, 내내 하품이 삐져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언니, 라면수프 드릴까요?"


그 말이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담은 신호처럼 느껴졌다는 것을 핑크맨은 알까.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는 내게 라면수프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건네고 다음 날 수크레를 떠났다. 서로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주고받았을 뿐 긴 대화를 나눌 시간은 끝까지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후에 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글자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진심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작년 가을 서울에서 핑크맨을 다시 만났다. 그 만남 또한 매우 운명적인 구석이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녀와의 긴 대화 속에서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며 몇 차례 짜릿했다. 그녀는 보부상 춘자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내게


"언니, 내가 도와줄까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 말이 "언니, 라면수프 드릴까요?"와 정확히 같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그냥 만나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거기다가 강렬한 끌림, 호기심, 반복되는 우연적 상황까지 쌓이다 보면 만나진 이유를 더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 연결고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싶어진다. 결국엔 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다소 의미심장한 시작이지만, 춘자의 동생 보부의 보부상이 탄생했다. 볼리비아에서 만난 동지와 함께 쿵짝을 맞추게 되었다. 춘자에게는 막막하고 어려운 일이었는데 기꺼이 손을 내밀어준 동지 지윤에게 뜨거운 박수를!


핑크맨 덕분에 보부상 춘자의 첫 번째 보따리는 거의 다 비웠다.


자신의 여행기를 소설로 쓰고 있다기에 작년에 스팀잇을 알려주었는데, 그녀가 왔다. 여기 스팀잇에!

@ohzy

이렇게 연결고리를 하나 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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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연결고리!

이건 우리 안의 소리!

제 별명은 뭔가요?

소수점님은 아이작... (소근)

저도 마법사였습니까??

🍀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기쁘고 멋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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