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와요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소공녀03.png



세상의 모든 소공녀들에게



괜찮아요. 우리는 잘해왔어요. 집이 없을지언정 포기하지 않은 담배와 위스키, 캐리어를 끌고 카페에서 밤을 지새울지언정 미소를 잃지 않았죠.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우리가 왜 세상에 내려왔는지, 왜 그들의 곁에 머물고 있는지.



우리는 지나칠 수 없죠. 사람들의 슬픔과 갈등, 번민과 고민. 그리고 할 수 있는 건 쓸쓸한 어깨와 무너진 방을 쓸어주는 일뿐이죠. 그러나 그들은 몰라요.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 무너진 방을 쓸어내리는 일이 무너진 어깨를 세우는 일이라는 걸.



밥 한 끼를 지어주고 배를 채워주는 일.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메꾸어줘요. 뻥하고 뚫려 버린 마음에는 따뜻한 쌀밥과 계란말이가 놓인 아침상만 한 게 없죠. 그리고 같이 밥 한술을 뜨는 것.



어여 먹어..



우리의 마법은 이것이에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는 것. 그것뿐이죠. 카페 테이블에 기대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창밖으로 흩날리기 시작한 눈을 발견하고는 자신에게 말을 하는 거예요.



와.. 눈이 와요.



그래요 눈이 와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눈이 와요. 한여름에도 따뜻한 봄에도 쓸쓸한 가을에도 낙엽처럼 눈이 와요. 사람들도 이 눈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눈과 바꾼 집, 직장, 결혼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것. 그들은 그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며 눈과 바꾸었어요. 그들에게도 눈이 올까요?



그래도 그들이 행복하면 좋겠어요. 한때 우리는 모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했었으니까. 그때 서로의 눈에 내리던 함박눈을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잊지 못해요. 그 흩날리던 날의 기억을..



우리의 마법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벌써 머리가 하얗게 세 버렸어요. 우리는 약을 먹지 않으면 머리카락에서 검은 물이 빠져나와 눈으로 흘러내리죠. 그렇게 흘린 눈물이 밤하늘을 새카맣게 물들였어요. 약을 먹으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담배와 위스키는 포기할 수 없어요. 그건 마음과 뜻과 정성을 솟아나게 하는 마법의 약이니까. 집.. 집을 포기합시다. 우리의 집은 사용하지 않는 가구들로 채워진 인형의 성이 아니니까요. 우리의 집은 눈치 보는 마음과 남들 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한 선택으로 채워진 곳이 아니니까요. 우리의 집은 여전히 저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 추억으로 가둬져 있는 하얗게 쌓인 눈밭이니까요.



내일 아침 하얀 눈이 쌓여 있었으면 해요.
그럼 따뜻한 차를 한 잔 내려드릴게요.
계속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돼요.
눈이 올까요
우리 자는 동안에
눈이 올까요
그대 감은 눈 위에
눈이 올까요.
아침 커튼을 열면 눈이 올까요.





그리고 우리는 여행을 합시다. 집 대신 여행. 사람들의 추억 속에 파묻힌 눈밭을 찾아다니는 여행. 이제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날, 그곳, 우리의 함박눈을 떠올리게 할 여행. 사람들이 눈치와 바꿔 먹은 진짜 우리의 집을 떠올리게 하는 여행. 그리고 우리는 같이 집이 됩시다. 그것은 가능할까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서로의 방을 쓸고 닦다 보면 집.. 집이 되지 않을까요?



여행2.jpg

"집이 없는 게 아니야 여행 중인 거야."



나는 그대의 이름을 알아요. 미소.. 저소비녀.. 눈의 마법사. 그리고 나는 마법사 멀린이랍니다. 우리는 여행 중이죠.



잘 봐요 밖이 유난히 하얗네요.
눈, 눈이 와요.
눈, 눈이 와요.
창 밖에도 눈이 와요.
어제 우리 말한 대로
차를 한 잔 내려드릴게요.







[위즈덤 레이스+Movie100] 001.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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