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가뭄 / 애너벨 크랩

in #promisteem5 years ago (edited)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를 번역한 황금진의 번역이 너무 좋아서 이 사람이 번역한 다른 책은 뭐가 있나 살펴보다가 아내가뭄을 읽게 됐습니다. 다 읽고 검색을 좀 해보니, 이 책이 페미니즘 입문서 추천 리스트에 자주 껴 있더군요.

남자는 일하고 여자는 집안일하며 애 키운다는 사회문화적 관습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워킹맘의 비율이 아이가 있는 기혼 여성의 60%를 넘어가는 상황(호주의 경우)에서도 남자는 일만 하고 여자는 일 + 집안일 + 양육 + 기타 잡다한 집안 대소사 처리에 여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외할머니 구순 잔치 때문에 외갓집에 다녀 왔습니다. 여기서도 고릿적 성별 구분이 그대로 드러나죠. 제겐 이모가 7분 계시는데 7분 중에 첫째 이모만 빼고 나머지 이모가 모두 주방에 붙어 있는 데 반해 이모부들은 모두 한가로이 TV에 열중해 있는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외할머니의 구순을 축하하러 집에 하나둘 모이는 상황이 되니 이모부들은 하나둘 바깥으로 퇴각하더군요. ㅎ 음식 차리는 것 좀 거들면 좋으련만 짬 안 되는 막내 이모부만 빼고 모두 자리를 피합니다.

남자가 돈을 벌어다주니 여자는 집안일 하고 애 키우는 게 맞지 않겠느냐 라는 구시대의 유물 같은 생각이 여전히 통용되는 사회에서 이런 장면은 흔하게 접할 수 있죠. 특히 설이나 추석처럼 가족이 모두 모이는 자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역전되면 어떨까요. 여자가 돈을 벌면 남자는 집안일이나 육아의 비중을 높일까요? 여기에 정직하게 "예"라고 답할 수 있는 남자는 제가 볼 때 많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뭔가 불편감이 밀려온다는 것이죠. 그것이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성별 정체감이든 뭐든 간에 말이죠. 이게 불평등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 전에는 이런 것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제가 위에서 언급한 이모부들처럼 전형적인 한국 남성이었죠. (지금도 전형성에서 별반 탈피 못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애 둘과 날마다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며 느끼는 것은 남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특권일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 낳은 후 경력단절되기 쉽죠. 남성은 애가 있든 없든 자기 커리어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와이프가 집에서 빨래며 식사며 다 해결해주니 와이프 없는 남자보다 소득도 올라가고 삶의 질도 올라가죠. 통계적으로 그렇고 저나 주변 남자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경력 단절되고 삶의 질도 싱글일 때보다 떨어지기 쉽습니다. 와이프에게 더 미안해집니다.

이 책은 여성이 어떤 식으로 착취 당하는지에 대한 아주 적나라한 보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있지만 아내는 아내가 없는 상황, 그래서 일을 시작해도 수퍼우먼이 되기를 강요 받는 그런 상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호주는 선진국인 줄 알았는데 이런 면에서는 한국과 별반 다를 게 없네요. 저자는 연구 자료를 위트와 자기 경험에 녹여내는 능력을 지닌 작가입니다. 물론 저자 역시 '워킹맘'입니다.

마지막 챕터에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 같은데 이 챕터를 아직 못 읽어서 뭐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사회구조라든지 젠더라든지 불평등이라든지 어렵고 추상적인 주제를 잠깐 치워놓는다면 오히려 해법이 더 선명하게 보일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라. 이게 일상적 실천에서의 주요 해법 아닐까요? 솔직히 화장실 청소하기 싫고 설거지 하기 싫고 빨래도 싫고 밥하기는 더 싫죠. 애보는 건 어떨까요? 애기들 사랑스럽지만 그렇다고 하루 종일 내 심리적 육체적 모든 것을 쏟아 부어가며 몰두하기는 어렵죠. 신생아를 둔 엄마든 누구든 간에 개인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구요. 하기 싫은 일은 그럼 누가 해야 되나요? 와이프에게 떠 넘겨야 되나요? 내가 하기 싫을 일을 떠넘기는 것이 양심에 걸린다면 그냥 자기가 하는 게 속 편합니다. 직장에서 치이고 그러면 피곤해서 안 하고 와이프에게 떠넘기는 날도 있겠죠. 하지만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고,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와이프가 뭘 시킬 때 재깍재깍 엉덩이를 떼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죠. 그게 사랑 아니겠습니까.

정말 쓰고 싶은 말이 많은 책이지만 퇴근 시간이고 집에 가서 애 봐야 하니 여기까지 씁니다. 페미니즘이고 뭐고를 떠나서 정말 재밌는 책입니다. 남성분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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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권 독서하고 서평쓰기 챌린지 #47 성공보팅입니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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