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잡기】 Robert Walser 『산책자』

in #promisteem6 years ago (edited)

『산책자』를 읽는 중에 가을 들판을 산책했다.

로베르트 발저가 산책길에서 만났던 거인, 유명 교수, 책방, 은행, 아름다운 모자 가게도 없는 한국의 평범한 논밭의 가을 들판이었다. 그저 황금색으로 물드는 벼들과 논두렁의 콩과 가끔 펄쩍 뛰어 달아나는 개구리를 봤다. 소슬한 가을 바람과 냇가의 백로, 한두 점 무심한 구름.
그래도 산책자의 기분을 느껴보려고 나섰으니 작품의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다. 책에서는 아름다운 전나무 숲이나 맨발로 뛰어노는 어린 아이들, 아름다운 에비 부인과의 식사가 있지만.

모 일간지에서 이 작품을 읽으려고 계속 가방에 넣고만 다녔다는 기자의 책 소개 기사를 읽었다. 도서관에 갔더니 마침 이 책이 눈에 띄였고, 짧막짧막한 산문으로 보였고, 무엇보다 제목이 한적함을 느끼게 했다.

결론은 산책자의 한적한 글은 아니라는 것.
문제 풀기 전에 해답지 먼저 보는 심정으로 역자(소설가 배수아)의 뒷글부터 읽었다. 이 글을 번역하며 문장마다 소스라쳤다고 한다. 작가가 보는 문장은 다른가 보다. 혹은 독일어로 느끼는 놀라움인가. 생전에 실패한 작가였던 이 사람의 작품을 동시대 작가군인 헤르만 헤세와 카프카가 열렬히 칭찬했다고 하니 이 역시 자국어의 묘미를 살려서 그랬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로베르트 발저는 1878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나 1956년 산책길에서 쓰러져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허름한 하숙방에서 글쓰고 그 외 시간은 산책을 한 작가였던 것 같다.
"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겁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하면 단 한 글자도 쓸 수가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내 일도 무너져버릴 겁니다...."(산책,339)

원래 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는 헤르만 헤세보다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의 작품을 받아주는 출판사는 없었고 폭음과 불면 그리고 불안증으로 정신병원 생활도 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거의 별 쓸모 없는 자잘한 산문들을 써왔다..... 낮의 산문과 밤의 산문, 희극의 산문과 비극 산문, 감동 산문과 장식용 산문, 문의 산문과 계단의 산문, 보석 산문과 예술 산문들은 대부분 아무런 쓸모 없는 산문으로 판명났고, 거의 아무 곳에도 적합하지 않았고, 그 어떤 편집자가 원하는 내용도 아니었고, 어떤 매체에도 적절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마지막 산문, 210)

인정받지 못하던 '산문'들이 왜 다른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는가.
득도의 경지에 이르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아마도 그의 글은 작가들이나 알 수 있는 정점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여러 산문중에 비교적 평이한 <세잔에 대한 생각>을 읽어보면 예술 컬럼으로 무난해 보이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적 서술과 예측 불가한 방향 전환의 만연체. 작가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일독하고 뭔가를 얻으시길 바란다.

로베르트 발저//배수아 역//한겨레출판//2017

20180929_124746.jpg

Sort:  

@dozam 님 주 1권 독서하고 서평쓰기 챌린지 완료입니다. 이글에 1/3만큼 보팅하고 갑니다. 나머지 보팅은 다른 게시글에 3일에 거쳐 리워드 하겠습니다. (스팀잇 업데이트로 인한 보팅이 늦어진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일요일 저녁 잘 보내고 계시쥬?

@dozam 님 주 1권 독서하고 서평쓰기 챌린지 #10 완료입니다. 이 댓글에 3/3만큼 보팅하고 갑니다. (HF20으로 인한 보팅이 늦어진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게시글이 없어서 댓글에 보팅하고 갑니다 :) @dozam님도 저녁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네요~!

산책없이도 살 수는 있지만 산책없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는 건 불가능해요.

그 인정받지 못하는 쓸모없이 여겨진 산문들이 다른 나라에 번역되고 훗날 널리 읽혀지고 있단 사실을 알면 작가는 어땠을까요 아이러니합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책이네요!

맞아요. 멀고먼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읽혀지고 있다니..
스팀이 잘 안되서 답답하셨죠, 고물님도?

흑흑 맞아요 정말 답답했어요 ㅋㅋ 이렇게 다시 보니 정말 좋아요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요즘 들판이 정말 아름답더군요.
그 들을 보며 좋아하는 책을 읽는 순간은 참으로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참 좋은 계절이지요.
이제 들국화와 숙부쟁이를 찍으실 것 같네요.

dozam님 다시 뵙게 돼 반갑습니다. ㅎ 이전에 올리셨던 백로 네 마리 사진이 눈에 아른거리네요. 그런 들판을 지근거리에 두고 맘 내킬 때마다 산책할 수 있다면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지겠다 싶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서울촌놈의 생각입니다. ㅎ

ㅎㅎ 백로가 논에서 마꾸라지 잡아먹으려고 대기중인
풍경은 일상입니다.
말씀중에 생각난 것이 산책만 하면 좋은데 농사를 지으면
고되다는 거에요. ㅋㅋ

짱짱맨 출석부 호출로 왔습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저도 출근길이 아니라 산책길 이었으면 좋겠어요.ㅎㅎㅎㅎ

진하게 동감입니다. ㅎㅎ

어렵네요.
스팀잇에 입성한 모두들 작가라고 할 수도 있긴 한데..
전 그런 작가는 아닌듯 합니다. ^^;

집 잘 지으시는 예술가시쥬.. ㅎㅎ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3
JST 0.028
BTC 57563.20
ETH 3078.64
USDT 1.00
SBD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