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 에세이] 그림같은 노래, 영화같은 노래 – 윤종신, 가을방학에서 배우기

in #norae7 years ago (edited)

한폭의 그림, 혹은 한편의 영화 처럼...

어떤 노래를 듣다보면
알지 못하는 노래 속 인물과 가본적도 없는 배경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언제 어디 즈음 내가 겪던 순간이 떠올라 흠칫 놀라기도 그래서 애잔해지기도 하구요. 오늘은 그렇게 긴 여운으로 하나의 장면 혹은 이야기로 기억되는 노래말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 분야에서 국문과 출신인 윤종신은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데요, 자극적이거나 튀는 어휘 없이 일상의 언어들로 수채화를 그리듯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하지만 애틋하고 특별한 어느 순간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풀어냅니다.

특히 윤종신이 만들고 성시경이 부른 <거리에서>라는 곡은 연인과 함께 걷던 여느 거리를 떠올리듯 담담한 어조의 가사를 음미하다보면 거짓말 같이 가사가 표현하는 거리의 장면과 색채가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니가 없는 거리에는 내가 할일이 없어서
마냥 걷다 걷다보면 추억을 가끔 마주치지
떠오르는 너의 모습 내 살아나는 그리움 한번에
참 잊기 힘든 사람이란걸 또 한번 느껴지는 하루

어디쯤에 머무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는지 걷다보면
누가 말해줄 것 같아 이 거리가 익숙했던 우리
발걸음이 나란했던 그리운 날들 오늘밤 나를 찾아온다

널 그리는 널 부르는 내 하루는 애태워도 마주친
추억이 반가워 날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면
텅 빈 거리 어느새 수많은 니모습만 가득해 - 윤종신 작사.곡 거리에서 중

특히나 멋지다고 생각했던 가사는 "날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면 텅 빈 거리 어느새 수 많은 니모습만 가득해"라는 부분인데요, 이 두 줄의 가사만으로 노래 전체의 장면을 한번에 그려내는것 같지 않나요?

헤어진 연인이 기억이 아닌 현실에서 마주쳤을 때의 그 미묘한 뉘앙스는 노랫말로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요? 불독멘션의 수장 이한철씨의 앨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It’s Raining 들썩이던 먼지 사이로 약간에 물기를 먹은 바람 따라
물방울이 맺히네 타닥타닥 빗소리가 들려
It’s Raining 서늘한 창에 머릴 기대어 흐릿해진 나무들, 사람들
춤추듯 일렁이네 나는 깜빡 우산 놓고 왔는데

어쩌나 저 멀리 어여쁜 사람
다가가 말 걸어볼까?
It’s Raining 물기 가득 음표가 되어 메마른 마음 적실 때
그 사람이 생각나 전화를 꺼내 보고 싶단 말하네

It’s You 어쩌나 우산 속 어여쁜 사람
날 알아볼까? 모를까?
It’s Raining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고, 메마른 우리 사이에
빈 마음을 적시네 “오랜만이야”
바닥엔 비가, 두 눈엔 눈물 반짝이네 - 이한철 작사.곡 It's raining 중

인물간 대화는 꼴랑 "오랜만이야" 뿐이지만, 비가내리는 풍경과 상황만으로 노래는 그 애닳는 순간의 오묘함을 표현해 냅니다.

마지막으로 이분야의 주관적인 베스트 오브 베스트 (저의 동생도 이 분야에서 최고를 뽑는데에 의견을 같이하는) 한 편의 영화를 본것과 같은 노래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번쯤 소개팅을 해 보셨다면... "아~"하면서 빠져들게 되는 곡 가을방학의 <여배우>라는 곡을 끝으로 오랜만인 포스팅을 마칩니다. (소개팅 첫 만남 전 묘한 긴장 상태를 이것보다 잘 표현한 곡이 있을까 싶네요, 보컬 톤이 청아해서 귀에 착착 달라붙는건 덤이구요)

어느 3월의 주말에 친구로부터 한 여자를 소개받기로 한다
이름은 낯설지만 이따금씩 작은 영화에 나온다는 그녀
궁금증을 못 참고서 그녀를 담은 작품을 몇편인가 찾아낸다
늦은 밤 턱을 괴고 나와는 별 인연이 없던 세상을 본다

아 모르는 사람을 본다는 것이 이리 가슴 뛰는 일이었는지
난 내 무릎을 안은 채 웅크린다
마치 영화관에 처음 갔을 때처럼
귀 기울여 듣게 된다 눈 여겨 보게 된다
너무 빨리 지나간다 그러다 툭 멈춘다

아 모르는 사람을 본다는 것이 이리 가슴 뛰는 일이었는지
난 내 손톱을 뜯으며 시계를 본다
마치 오디션장에 가는 것처럼

어느 3월의 주말에 그녀는 내게 정말 말씀 많이 들었다면서
묘한 웃음을 짓고 갑자기 내 얼굴에 눈부신 조명이 비춘다 - 정바비 작사.곡 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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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커피믹스와 함께 글을 읽었습니다.
일요일 하루 시작이 참 즐거워지네요.
소중한 글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가끔 자주 뵈어요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애정하는 곡들을 함께 나눌수 있어 저도 기쁘네요^^

100스파 임대받은걸로 미약하지만 풀보팅누르고 갑니다!!

덕분에 노래 소모임을 즐겁게 누리고 있어요. 늘 감사하고있습니다 ㅎㅎ

오...무척 공감가는 포스팅입니다.
특히 거리에서를 좋아하는 저로써는 말씀주신 내용들이 잘 와닫는것 같습니다.
예전에 운전하면서 하루종일 거리에서만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감사합니다.

하나하나 설명하려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데도 그 상황과 장면이 그려지는것이 어찌나 이 곡의 포인트인것 같아요.

(아 그리고 꼭 성시경씨가 불러야 하는게 포인트죠. 윤종신씨가 부르는 이 노래는... ㅎㅎ)

거리에서 정말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흥얼거리는 제 모습을 볼수 있었습니다

사실 좋니가 너무 떠버렸지만 개인적으로 윤종신노래를 꼽으라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곡은 대부분 90' 00' 년대 곡들이더라구요

거리에서를 제외하면 다 모르는 곡이었는데 덕분에 좋은 곡 알아가게 돼 기쁩니다. 전 거리에서의 '니가 없는 거리에는 내가 할 일이 없어서'라는 가사가 좋아요. 담담한 듯 깊은 여운을 주는... 이런 가사를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요! 좋은 포스팅 잘 봤습니다:)

맞아요 저도 얼마나 더 노력해야 이런 가사를 쓸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나루님께서는 어떤 스타일의 노래를 만드시는지 궁금하네요 앞으로 포스팅 기대할께요~

이벤트 답신겸 보팅해드리러왔습니다 :)

덕분에 노래 잘 들었습니다. 소개 감사드려요. 거리에서.. 언젠가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길... +_+

감사합니다. 저도 좋은 인연이 이어질수 있길 희망합니다

즐거운 스티밋!
힘내세요 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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