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14 옆감방의 자살시도 그리고 차입을 요구하다.

in #leedaeyong5 years ago (edited)

이순흥 회장의 차입은 그 이후에 없었다. 3월이 가고 4월이 가고 5월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5월 말경에는 아예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이대용은 월맹측이 자신을 극심하게 굶겨서 의지를 꺽으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5월 29일은 셋째 아들의 생일이었다. 이대용이 월남에 국방무관으로 가게 되어 교육을 받고 있는 중에 아내가 셋째를 낳았다. 백일이 되는날 가족 모두 사이공에 도착했다. 그때가 1973년 4월 6일이었다. 이대용은 그 후 세차례에 걸쳐 약 9년 5개월을 사이공에서 근무했다.

감옥 생활 6개월을 지나면서 햇볕이 너무 그리웠다. 비타민 부족으로 각기병이 생겼고, 오른쪽 귀의 청력을 상실하여 반귀머거리가 되었다. 자꾸 현기증이 났다. 앞이 캄참해지고 눈앞에 수많은 별들이 명멸하는 현상이 생겼다. 이마의 피부가 자꾸 머리쪽으로 당겨지는 증상도 있었다. 혈관속으로 작은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듯한 증상도 있었다. 몸이 야위어가면서 종아리에는 시퍼런 정맥이 툭 튀어나 나왔다. 무엇보다 대변보기가 힘들었다. 먹는 것이 별로 없으니 화장실에 갈 수가 없었다. 5일이상 배면을 하지 못하면 설사약을 주었다.

1976년 7월 17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옆방에서 쿵쿵 쾅쾅하면서 두터운 벽이 무겁게 진동했다. 하이탑 장군과 이대용은 무슨 소리인지 귀를 기울였다. 스무번 가까이 소리가 나더디 조용해졌다. 그 방에는 정치범이 한명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후 그 수감자를 들것으로 실어나르는 소리가 났고 감방바닥을 청소하는 것 같았다.

오후에 경비원에게 그 방 수감자가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을 들었다. 벽에 박혀 있는 못에다 머리를 찧었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고 의식을 잃어버린 것을 형무소 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얼마있지 않아 감방안에 박혀 있는 못을 모두 뽑아갔다. 더이상 벽에다 머리를 찧어서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기장을 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벽에다 헝겊을 이어 붙여서 모기장을 쳤다.

이대용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런 기회를 틈타 외부와 연락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자살소동이 있었으니 형무소 당국자들로 조금 태도를 바꿀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란서 공관을 통해 우리 정부에 생존소식이라도 전하고 소량이나마 의약품, 식품, 일용품을 차입해보기로 했다.

이대용은 7월 22일 아침 ‘구’중위라는 담당 간수에게 불란서 공관에 차입을 요청하는 편지를 쓸테니 전해달라고 요구했다. 의외로 구중위는 선선히 편지를 쓰라고 했다. 이대용은 경비원에게 종이를 얻어 간단하게 영어로 편지를 썼다.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의약품, 식품, 일용품 차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쓰고 그 밑에 필요한 품목을 적어 놓았다. 구중위는 사이공의 불란서 총영사관에 편지를 전해주면 되느냐고 묻고는 갔다.

한달이 지나가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불란서 총영사관이 편지를 받았으면 바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이대용은 수감전에 당시 한국정부는 재월 한국외교관 및 민간이 지원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미화 10만달러를 불란서 정부에 기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구 중위가 편지를 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기대는 걸지 않기로 하고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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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려운상황을 장군님은 이겨내셨군요

편지를 쓰라 해놓고 전해주지 않다니 장군님 실망이 컸을 텐데 의연하신 모습입니다~^^

정말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내시는 듯 합니다.
구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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