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V의 날 - 1부 2장

in #kr-pen8 years ago (edited)





II



   “7년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베누아타스가 일어나 집무실 한쪽을 차지한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솜을 넣고 용가죽과 천을 덧대어 폭신하게 만든 벤치에 다넬라스의 처이자 삼 형제의 엄마인 카밀리야가 앉아 있었다. 베누아타스는 막 계산을 끝낸 종이를 카밀리야에게 건넸다.
   “7년…….”
   종이를 받아든 카밀리야가 중얼거렸다. 그녀와 두 아들이 베누아타스 집에서 하인으로 일해야 하는 기간이었다. 공화국에도 노예는 있었으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내리는 형벌로써 공적인 일에만 부렸다.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은 하인을 고용해 썼다. 대개 빚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판 사람들이었다. 하인이 되어도 그들은 여전히 자유민이었다. 하지만 계약 기간 안에서 다른 집에 임대될 수 있다는 점은 예전과 지위가 다름을 분명히 말해주었다. 거기다 계약의 첫째 조건인 주인에 대한 복종까지 더해져 하인이 된 자들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쓴 숫자들을 어지러이 좇는 부인의 눈동자를 말없이 보던 베누아타스가 입을 열었다.
   “일해야 하는 건 부인과 차남, 삼남뿐입니다. 장남이 출세해서 빚을 갚으면 더 빨리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허공으로 초점을 옮긴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선 그런 장밋빛 미래를 엿볼 수 없었다. 카밀리야는 하루아침에 전락한 처지를 담담히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편을 잃고 재산을 잃고 차남의 오른손마저 잃었다. 배 속의 아기는 아비의 얼굴도 모른 채 자랄 것이다. 흔히 있는 일이나 그렇다고 비극이 아닌 건 아니다. 베누아타스는 그런 자들을 수없이 많이 봤고, 고용해 왔다. 그들이 비참한 처지를 벗어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계약이 끝나면 또다시 계약하는 게 보통이었다. 한 번 하인이 되면 하인인 채로 죽는다. 대부분은 그랬다. 베누아타스는 그녀를 마주하기가 조금 거북해졌고, 그래서 화제를 돌렸다.
   “이의가 없다면 지금 계약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나리.”
   베누아타스가 자리로 돌아가 거침없이 펜대를 놀렸다. 펜촉이 종이 위를 사각거리는 소리와 등잔불이 심지를 태우는 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어둑한 방안을 채워나갔다. 안뜰을 향해 뚫린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화음을 보탰다.
   “아들이 많은 건 역시 좋군요. 집안을 일으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곧 사남이 태어날지도 모르고…. 부럽군요. 진심으로. 이제 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 말 그대로 베누아타스는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 가족에게는 부활의 불씨가 살아있다. 여전히 완전한 자유민인 장남이 성공하면 이들은 비극에서 탈출할 것이다. 그때부터 형제들이 힘을 합쳐 노력하면 가문을 크게 일으킬 수도 있다. 반대로 자신처럼 아무리 부유한 귀족에 상원 의원이라도 아들이 없다면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다. 완전한 자유민이 하인으로 전락한 것처럼, 아들이 모두 죽어 망한 귀족을 베누아타스는 몇 번인가 보고 들었다. 당장은 불행할지언정 이 가족이 훨씬 낫다. 이들의 화덕은 더 크고 더 뜨겁게 지펴질 것이다. 힘들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베누아타스의 장남은 수도에서 죽었다. 속주의 장자는 17세부터 3년간 수도에서 복무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장남 쥘라스 역시 수도의 경비대원으로 복무 중이었다. 그는 축젯날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젊은 혈기를 지나치게 발산하던 한 무리의 청년들을 단속하려다 도리어 맞아 죽었다. 복무 기간을 꽉 채우고 집으로 돌아올 날을 한 달 앞둔 때였다. 베누아타스는 속주의 유력 귀족이었고 동시에 공화국 상원 의원이었기에 시정 당국은 재빨리 범인 검거에 나섰다. 청년들은 수도의 귀족 집 자식들이었고, 법에 따라 벌금형을 받았다. 그게 전부였다. 주위에서 부추겼지만 베누아타스는 사적인 보복에 나서지 않았다.
   애초에 베누아타스가 마음만 먹었다면 쥘라스는 상원 의원의 호위병으로 편하고 안전하게 복무를 마쳤을 것이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정해진 규율에 따라 교육받고 훈련받은 결과를 받아들이게 했을 뿐이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첩을 들여 아들을 얼마든지 더 가졌을 것이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양자를 들이지도 않았다. 차남 필리푸스의 이름이, 장남임을 말해 주는 필리파스로 바뀐 것 빼고 집안에 변화는 없었다. 쥘라스의 빈자리는 진작부터 익숙해져 있었기에 표면적인 동요는 없었다. 이유를 묻는 지인들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신은 가문보다 공화국과 시민 사회를 우선한다고. 그 무렵이었다. 그의 이름 앞에 명예롭다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한 것은.
   “저는 카밀라스가 걱정될 뿐입니다, 나리. 그이의 죽음이 그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해서…. 안 좋은 쪽으로요.”
   “장남 이름이 카밀라스였군요. 부인 이름에서 따온 겁니까?”
   “첫째가 아들이면 제 이름에서, 딸이면 그이의 이름에서 따오기로 했었답니다. 그이의 생각이었죠.”
   과묵하고 진지했던 사람이 쓸데없이 낭만적인 구석도 있었군. 베누아타스는 속으로 가볍게 웃었다.
   “듣기로는 그가 상원 의원의 호위병으로 복무하고 있다던데, 맞습니까?”
   “샤흘레아테스 의원님을 호위하고 있답니다.”
   “르 무와네의 사남이신 샤흘레아테스 의원 말이군요. 알겠습니다. 내일 사람을 보내 그쪽에도 기별을 넣겠습니다. 다넬라스가 처형된 이유를 알아보고자 수도에 사람을 보낼 생각이었거든요. 군령에 따른 처형은 수도에 곧바로 보고 된답니다. 어쩌면 부인의 장남, 카밀라스도 이미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니콜루스, 그 청산유수의 대금업자도 다넬라스가 반역죄로 죽은 건 아니라고 부인께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금업자들의 정보는 꽤 정확한 편입니다. 신뢰할만하지요. 그들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을 때는…….”
   카밀리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말이 큰 위안이 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 베누아타스가 무언가 덧붙이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메마른 입술을 뗐다.
   “제가 알기로는… 가장이 죽으면 장남은 곧바로 집에 보내진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나리?”
   “맞습니다, 부인. 얼마가 남았든 남은 기간을 면제받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베누아타스는 바로 자기가 덧붙이려 했던 정보에 그녀의 생기가 미약하게나마 돌아온 것을 느꼈다.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카밀리야의 목소리는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듯 끝을 흐렸다. 그녀의 의식이 장남에게 가 있는 것인지 죽은 남편에게 가닿은 것인지, 베누아타스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일부터 그녀는 아무것도 의식할 겨를 없이 바빠질 것이다.
그때 집무실 입구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클로투스 때문에 급하게 불렀던 의사였다.
   “어떻게 됐나?”
   “치료는 끝났지만 두고 봐야 합니다. 악화되면 잘라야 하니까요. 상처가 나아도 손을 쓰긴 어려울 겁니다. 손가락이 죄다 오그라들었어요.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비관하지 마시죠, 부인. 징집은 면했으니까요. 불행 중 다행 아닙니까?”
   그의 위로는 카밀리야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카밀리야는 불현듯 떠오른 듯 베누아타스를 돌아봤다.
   “나리, 그 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텐데… 그러면 그 애의 가치도 떨어지는 게 아닌가요?”
   그것은 곧 계약 기간이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베누아타스는 계산할 때 이미 클로투스의 상태, 비관적인 미래까지 고려해 둔 상태였다. 그는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카밀리야의 불안한 눈빛에 평온한 미소로 답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베누아타스는 그에 대한 이유 역시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밀리야는 그것을 호의적으로,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고,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역시 명예로우신 베누아타스 나리십니다.”
   의사는 정확한 사정을 모르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베누아타스는 그런 반응들에 약간 거북함이 일었다. 그래서인지 종이 위를 사각거리는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내일 다시 와 줄 수 있겠나? 부인의 상태를 봐줄 산파도 한 명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나리.”
   “저는 괜찮습니다, 나리. 굳이 그러실 것까지는…….”
   “확실하게 해두는 게 모두에게 좋습니다, 부인.”
   그렇게 말하고 베누아타스는 의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부인. 그리고 의원님.”
   의사가 떠나자 베누아타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카밀리야가 일어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계약서 위 아직 마르지 않은 녹색 잉크가 노란 불빛에 번들거렸다. 베누아타스가 펜촉에 잉크를 적셔 건넸다. 카밀리야는 숨을 천천히 고른 다음 자신의 이름을 재빠르게 휘갈겼다.
   “어째서 저희에게 이런 기회를 베풀어주시는 건가요, 나리? 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베누아타스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게 수치심 탓인지, 수줍음 탓인지, 아니면 책상 위 등불의 열기 탓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고인이 된 남자를 떠올렸다.
   베누아타스가 다넬라스를 알게 된 건 그가 용 목장의 소유주이기 때문이었다. 공화국 군단은 군룡의 관리를 목장에 맡겼다. 군단 자체에서 관리하기에는 돈과 인력 면에서 효율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훈련은 군단에서, 관리는 목장에서. 이것이 공화국의 방침이었다.
   군룡의 조달도 목장을 통하곤 했다. 용은 인간의 사육 환경에선 번식하지 않기에 야생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목장에 맡기는 편이 수월했다. 목장주는 사람을 고용해 새끼용이나 알을 찾아냈다. 그런 용들은 매매나 임대하는 방식으로 군단에 보내졌다.
   천룡 기병은 다른 병사와 마찬가지로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가 소집령이 떨어지면 목장에서 관리하는 천룡을 타고 주둔지로 향했다. 기병의 귀환은 곧 용의 귀환과 같다. 기병이 오지 않을 때는 용도 오지 않았다. 그럴 때는 기병의 집에 명예퇴직금이, 목장에는 보상금이 보내졌다. 군단에는 부담이, 목장주에게는 불만이 되는 액수였다. 그렇기에 목장주는 자신의 용에 누가 타는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베누아타스에게 다넬라스는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자신의 용과 함께 돌아온 천룡 기병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이번에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용은 무사히 돌아왔는데도. 베누아타스는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V의 날] 1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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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와 이거 잼겠당

재미있게 봐 주시면 감사한 일이죠😂

저에게 베누아타스는 흥미로운 캐릭터로 그려지네요. 그의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 하나, 그가 왜 그런 행동들을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그가 다넬라스를 궁금해 하듯이.

잙 읽고 갑니다.

장렬히 전사하신 줄 알았습니다😂 베누아타스는 제 지인들 사이에서 인기 1, 2위를 다투는 인물인데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늘 성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스팀잇에서의 활동을 접고 오프라인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이 시리즈는 이터널라이트님 때문이라도 꼭 올릴 생각입니다 :)

미래에서 왔습니다. 당신은 스팀잇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고, 이곳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겁니다.

오오... 스팀잇의 시간여행자!
과거의 나, 보고 있나? 접수 했나? 가즈앗!

장렬히 전사하고 몇 번의 킥을 더 날렸는지 모르실겁니다. ㅎㅎㅎ
보상은 달러만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요새 느끼고 있어요. 저는 코인판도 잘 모르니까요.

소설을 읽을 때 항상 머리속에 풍경과 인물들의 표정을 혼자서 그려보며 읽거든요.
저는 하루키소설을 좋아하는데 '해변의 카프카'에서 카프카가 여행 중에 만난 형제들의 산 속 깊은 오두막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ㅎㅎㅎ

다음 편 베누아타스는 저에게는 어떤 얼굴로 그려질지 기다리겠습니다.^^

재독하러 왔다가 이 댓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흑흑...

대체 29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아.. 일 때문에 독촉받던 때군요. 마침 스팀잇에 내로라하는 분들이 막 들어올 때고... 이제는 김리님 포함 올려야하는 이유가 된 분들이 많아져서 못 떠납니다. 가라고 떠밀어도 멍석 깔고 앉을 겁니다ㅋㅋㅋ

다행이군요.

저도 앞부분 읽으러 왔다가 깜놀했습니다.

잘보고있습니다 ! 1편 정신없이보고 이제 2편다읽었네요 ㅎㅎ 3편갑니닷

오오.. 감사합니다! :D

장남은 아, 차남은 우, 막내는 오 로 끝나는가 보군요. 그럼 베누아타스도, 다넬라스도 모두 장남이었나요?

오오... B+ 드립니다. 장남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장남이지요.

아, 그렇죠! 장남이 죽으면 이름이 바뀌죠? 필리푸스가 필리파스가 된 것처럼..

훌륭하십니다👍 그리핀도르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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