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을 아시나요?

in #kr8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어미새입니다.


얼마전 @gghite님의 (제주라이프) 제주 4.3사건 70주년게시글을 읽고 제주 4.3 사건이 정확히 무슨 사건인지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제주 4.3 사건을 찾아봤지만 자료가 다소 부족하여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던중 설민석님이 강의한 제주 4.3, 우리가 몰랐던 제주 이야기 강의를 듣고 스티미언 여러분들도 꼭 이 사건에 대하여 알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포스팅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본 포스팅은 설민석님의 제주 4.3 사건 70주년, 우리가 몰랐던 제주 이야기를 기반으로 작성된 콘텐츠입니다.


제주 4.3 사건


동백꽃은 제주도 4.3 사건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동백꽃'의 꽃말은 기다림이며, 70년전 그날 죄 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그분들의 진상을 규명하는 시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주 4.3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먼저 광복의 그날 1945년 8월 15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제주 4.3 사건의 배경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그날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광복을 외치고 있을 때 우리나라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됩니다. 미국은 소련에 의해 한반도가 사회주의 세상이 되는것을 우려 했고, 일본에 주둔해 있던 미 육군 제 24군단을 한반도 남쪽으로 진주하게됩니다. (참고 자료 : 소련군정, 미 군정)

스스로의 힘이 없던 한반도는 해방 이후 부쪽에는 소련, 남쪽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북위 38도선으로 한반도가 나누어지면서 미소 군정기가 시작됩니다. 무 정부 상태의 한반도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소련, 미국의 회담을 통해 한반도 독립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회담이 결렬되기 시작합니다.

한반도는 독립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불안했었고, 그 시기에 각지를 순회하던 이승만 박사는 1946년 6월 3일에 전북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게됩니다. 이 사건을 정읍 발언이라고 합니다.

이승만 박사의 이 발언 이후 민족 지도자들은 단독 정부 수립의 반대가 빗발쳤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소련에게 한반도의 상황을 UN에게 이관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소련을 제안을 거절하게됩니다. 미국은 소련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를 UN에 이관하기로 결정였으며, 한반도 문제를 UN에 상정하고, UN은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정통성 있는 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였습니다.

한반도 정부 수립을 위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구성되고, 유엔은 조속한 시일에 선거를 통하여 통일된 독립 정부를 한반도에 수립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이미 북한에 공상주의자들에 의한 사실상의 정부를 세웠으며, 유엔 임시 위원단이 북한에 들어오는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유엔은 어쩔수 없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 수립을 할 수 있도록 결정합니다.

남쪽에서만 국회의원 선거를 진행할 경우 남한을 위한 정부가 세워지는것이며, 이는 곧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다는것을 의미입니다.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은 남쪽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이념이나 사상을 초월하여 민족 주의자들이 유엔 결정안에 대하여 토론을 하자는 의미로 회의를 진행하게됩니다.

38도선을 넘어 북쪽에서 진행한 '남북 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가한 민족 지도자들은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켤코 승인하지 않을것이며, 남쪽만의 단독 선거로 수립되는 단독 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결론이 나오게됩니다. 이러한 민족 지도자들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남쪽에서는 남한만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5.10 총선을 막기 위해 불참을 선언하지만, 선거 관리 위원회에서는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를 진행합니다.


1948년 5월 10일 제주도는 총 3개의 선거구가 있었으며, 그중 2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불발되면서 초대 국회의원이 200명이 아니라 198명이됩니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는 사회주의자의 섬, 빨간 섬이라는 낙인이 찍히게됩니다.


왜 제주에서만 선거구가 불에 타고 선거를 치를 수 없었을까?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가 있기 전에 제주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제주도의 가슴 아픈 역사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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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제주도는 주로 죄지은 사람들이 유배오는 유배지였습니다. 제주도에 유배왔던 인물중 유명했던 사람으로는 광해군, 추사 김정희가 있으며, 조선시대에만 약 200여명이 유배되었습니다. 제주도는 조선 시대에도 가혹한 진상과 부역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이런 제주도가 일제 강점기에는 더욱더 큰 피해를 입게됩니다. 일본과 가까웠던 제주는 징용.징병의 인적 수탈이 극심했으며, 일본은 패망하기전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제주를 군사 기지화합니다. 제주도는 가미가재 특공대의 자살 어뢰정을 숨겨 놓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제주 곳곳에 잠수정을 숨겨 놓기 위한 동굴 진지를 만들게됩니다. 일본의 요세인 제주도는 당연히 미국의 타겟이 되어 공격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제주도민은 정말 너무나도 힘든 시기를 보낼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고 : 일제강점기의 제주도)


광복은 됐지만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던 제주


이렇게 힘든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의 그날이 왔습니다. 광복이 되었지만 육지보다 늦게 미군이 들어오게 되었고, 제주도에 남아있던 일본군은 총 칼로 제주도민을 위협하는 등 횡포와 수탈은 날로 심해져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공철제도라고하여 전시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미곡의 시장유통을 금지하고 모든 자원을 공출 시켰으며, 그 대신 만주 등지에서 들여오는 콩이나 피 등의 동물용 사료를 배급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도민들이 보는 가운데 배급할 식량에 석유를 부어 배를 다 태워버리는 행위까지 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이 제주도에 들어오자 도민들은 미군들이 친일파, 친일파 경찰들을 처단하고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줄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미 군정의 행보는 정반대로 흘러가게 됩니다. 미 군정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남한에 있는 전국의 친일파 경찰, 친일파 공무원을 그대로 등용하게됩니다.


미국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더 이상 미국의 적은 패망한 일본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자 소련이었습니다. 밀고 내려오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친일 청산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냉전의 시대 였습니다.


도제 승격 후 더욱 악화된 제주의 상황


1946년 8월 1일 제주도(島)는 도(道)로 승격하게됩니다. 앞의 도(島)는 섬을 뜻하는 섬도(島)자이며, 뒤의 도는 길 도(道)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섬이었던 제주도를, 전라도, 경상도와 같은 도로 승격 시킨것입니다. 언뜻보면 도(道)로 승격하는것이 좋아보이지만, 도로 승격했기 때문에 더 많은 세금을 내야하며, 전라도로 오는 지원마저 끊기게 됩니다. 제주도는 승격 후 높아진 실업률, 전염병 창궐, 흉작, 경제적인 어려움, 경찰기구 확대 등 악재가 계속됩니다. 도제 승격 후 더 많은 경찰 인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1947년 2월 101명이던 경찰 인력을 330명으로 증원합니다. 경찰 인력은 외지에서 동원되었으며 이러한 외지에서 동원된 경찰 인력을 응원 경찰이라고 하며, 이들 역시 친일파 출신의 경찰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당연히 제주 도민들은 미 군정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증가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광복이후 2년이 흘러가고, 1947년 3월 1일 끔직한 사고가 발생합니다.


'3.1 발포' 사건


1947년 3월 1일은 삼을 운동 28주년을 맞이한 아주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삼일 정신 계승과 자주 독립을 기치로 제주도 내 10개면에서 열린 행사로서, 제주 북국민학교에 2만 5천 ~ 3만여 명의 군중이 집결되었습니다. 행사를 마친 군중들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고, 시위대는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말을 타고 지나가던 경찰앞에 6살 어린 아이가 뛰어나왔고, 기마 경찰 말 발굽에 어린 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상식적으로 어린 아이를 치는 사고가 발생하면, 일단 말에서 내려 어린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응급 처치 후 병원으로 후송하는것이 일반적인 상식일 것입니다. 하지만 경찰관은 아무런 일도 없는것처럼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경찰을 잡기 위해 돌을 던지며 쫓아가게됩니다. 결국 경찰서까지 말을 타고 도망온 경찰관 뒤로 많은 군중이 쫓아오고 있었으며, 경찰서에 대기중이던 경찰 병력들은 폭동이 일어났다고 오인하여 군중을 향해 발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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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표현된 3.1 대시위]


조국 독립을 외쳤던 숭고한 3.1절 기념행사에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근처에 구경하고 있던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죽게 되었으며, 당시 사망자 명단에는 15살 어린아이와, 젖먹이와 같이 있던 21살 엄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래의 영상은 제주 43항쟁 기념관 애니메이션이며, 3.1 발포 사건 그날을 그린 영상입니다. 시간있으시면 시청해보시면 좋겠습니다.




3.1 발포 사건 이후 제주도민들은 분노에 가득차있었습니다, 그리고 31.발포 사건 9일뒤인 제주도민들은 3.10 총파업에 돌입하게됩니다. 나가던 직장을 나가지 않고 다함께 모여서 진상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시위를 하게됩니다. 3.10 총 파업은 제주도 내 관공서, 통신기관, 기업인, 자영업자, 학교, 경찰 등 166개의 단체, 41,211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민.관 총 파업이었으며 이는 95%에 해당하는 숫자였습니다. 즉 제주 도민이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쳤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시 이 파업에 참여했던 경찰 공무언들의 증언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 중문지서 직원 일동은

오늘까지 치안확보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봉직하여 왔으나

금번 발포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희생적 정신은 수포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악독한 명령을 복종할 수 없으므로 직장은 떠난다.

- 중문지서 경찰관의 담화


해당 사건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서울 지역까지 알려지게되며, 중앙 경무부까지 이 소식이 전파되었습니다. 당시 중앙 경무국장 조병옥은 제주도에 방문하여 제주 공무원들을 다 모아놓고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3.1 발포 사건은 사회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건이며, 어린 아이를 치고간 경찰, 무고한 시민들에게 발포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을 묻는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건 이후 제주도에는 수 많은 응원경찰 들이 들어왔으며, 이때 '서북 청년회'도 제주에 들어오게됩니다.

3.1발포 사건이후 좌익 세력을 색출한다는 면목하에 1947년 한 해 동안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이 검거와 고문을 당하게됩니다. 이후 비극의 1948년 4월 3일 제주 사건이 발생하게되었습니다.

서북 청년회 : 해방 이후 평남, 함북, 함남, 황해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된 대표적인 반공우익 집단.


제주 4.3 사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남조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의 슬로건을 걸고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입니다.


350여명

무장대의 습격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 공격

4월 3일 당일

경찰과 우익인사 12명 사망


좌익 무장대는 우익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우익들의 옆에 있던 가족들의 목숨까지 빼앗었고, 이러한 행동으로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비판에서 자료로울수 없었습니다. 해당 사건 이후 좌익 무장 세력과 경찰들과의 충돌은 곧 전쟁이 일어날것만 같은 상황이었으며, 당시 미 군정은 군대를 동원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9연대장을 맡고 있던 김익렬 연대장은 토벌 명령에 불응하고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제주도 내에 있는 경찰과 주민들 사이 마찰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므로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적철지 않다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4.28 평화협상

좌익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경비대 제 9연대장 김익렬은 서귀포시 구억리에서 만나 협상을 하게됩니다. 좌익측에서는 우리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응원 경찰 철수, 평화적으로 화해를 하면 좌익 무장대 신변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하였고, 김익렬 연대장은 합의를 하였습니다. 4.28 평화협상 합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72시간 내에 전투 완전 중지
  2. 점차적인 무장대 무장 해제
  3. 주모자 신변 보장
  4. 무장대 귀순 절차 마련


이 약속은 지켜지는듯 하였으나, 5월 1일 우익 청년 단원들에 의한 '제주읍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근대 황당한것은 방화 사건 당시 하늘에서 미국 항공 군항기가 항공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 군정이 과연 미리 알고 있었을까요? 과연 방화사건의 배후는 누구일까요? (이 부분은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있고, 연구해야하는 대상이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깊히있게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최초의 평화협정으로 잘 마무리되는 사건이 제주읍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미군 대토벌작전의 계기가 됩니다.


이사건으로 1948년 5월 5일 제주도 사태 관련 회의가 개최되고, 미군정 장관, 조병옥 경무국장, 제주도 지사, 김익렬 연대장 등이 모인 군.경 수뇌부 회의가 열리게됩니다. 조병옥은 제주 도민들은 모두 사회주의자이며, 모두 척살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김익렬 연대장은 평화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때 미군정 장관은 이번 사건은 조병옥의 의견이 맞다면서 조병옥 경무 국장의 손을 들어주고,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시키게됩니다. 그리고 후임으로 새로운 연대장인 박진경 연대장이 부임합니다. 박진경 연대장은 후임으로 부임하면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1948년 6월 18일 박진경 연대장의 탄압이 너무 강하고, 볼 수 없던 부하에 의해 박진경 연대장 피살 사건이 발생합니다. (진짜 잘 쏴죽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지나고, 미 군정 시대가 끝나면서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는 그 만세와 함성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고, 제주도는 어떤섬의 이미지였을까요? 당시 선거도 못치른 빨간섬으로 낙인이 찍힌 제주도는 대한민국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 명령이 내려집니다.

당시 정부는 여수에 있는 14연대에게 제주도 토벌 명령을 내리게됩니다. 하지만 여수에 있는 군인들은 같은 민족에 총을 겨눌수 없다며 반발을 하며, 여순사건이 발생하게됩니다. (이걸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표현하다니 쳐죽일놈들)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제 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을 점령한 사건


그리고 제주도는 경찰, 서북청년단, 9연대까지 하나가된 토벌대가 제주도민들을 학살하게됩니다. 당시 프로젝트 이름이 삼진 작전이었다고 합니다.

삼진작전

  1. 좌익 세력들을 태워 죽이고
  2. 굶겨 죽이고
  3. 죽여 없앤다


1948년 10월 17일 제주 초토화 작전을 선포하였으며, 이 작전은 해안선을 기준으로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 무허가 통행금지에 들어간 자는 이유 불문하고 폭도로 간주 총살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즉 5km 이외의 지점에 발을 딛이지 못하는 금족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당시 힘이 없던 좌익은 힘이 없어 산에 오르거나, 해안 동굴에 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산간에 있는 사람들을 해안으로 내리는 중간산 소개령이 내려집니다.


제주도 중산간 소개령 : 중산간 주민들이 무장대의 가담할 우려를 차단하기 위한 집단 이주 명령, 무장대 보급 차단을 위해 마을 불태움.


중산간에 있는 사람들중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소식을 들었으나 소유하고 있던 밭고 여기 있고 옮길 수 없다면서 머물렀던 사람들은 이유 불문하고 군인들에게 총살을 당하게 되었으며, 초토화 작전 동안 많은 주민들이 학살 당하게됩니다. 또한 1948년 11월 17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수 많은 주민들이 학살 당하게 되었습니다 (계엄령 불법 논란은 현재도 진행중입니다만.. 학살당한 주민들은 살아 돌아올 수 없습니다.)


제주도 사건의 증언..


... 순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바로 옆에 나란히 묶인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경찰들이 "총에 덜 맞은 놈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일일이 대검으로 찔렀으나 그때도 난 어머니 밑에 깔려 무사했습니다...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날의 모습들을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 안인행(67세, 애월읍 장전리, 2001. 8. 21 채록)증언 <출처: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948년 11월 15일, 표선면 가시리 학살 사건

60대 노부부인 안만규.김인하는

손녀(3살)와 손자(1살)를 데리고 급히 냇가로 피신했다.

굴을 찾아 몸을 숨겼지만 아이 울음소리가 새나가고 말았다.

진압군은 굴 속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이들 가족은 운명을 같이 했다.

<출처 : 제주 4.3사건 진상 보고서>


1949년 1월 16일 빌레못굴 학살

주민 28명이 굴 안에서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게 들킴

그 중 토벌대는 3살 어린이의 두 다리를 잡고

바위에 패대기쳐 학살시키는 등 남녀노소 15명이 희생됨.


설민석님이 강의한 제주 4.3 이야기를 보고 싶으신분은 아래의 영상을 통해 한번 보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대략 48분의 시간이 소요되며, 48분의 시간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의 발생 시기는 1948년 4월 3일 ~ 1954년 9월 21이며, 직접 사망 10,715명, 추정 사망자 6만명 ~ 8만명, 행발 불명자 3,171명, 무장대 약 1,500명, 토벌단 약 220명이 사망한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입니다. (출처 : 나무 위키)


제가 경험하지 못했던 역사이기도하고, 제 글에 오류가 있을 수 있기때문에 최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검증하여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설민석의 4.3 강의를 듣고 눈물이 흐를정도로 가슴아픈 제주도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사건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역사이며, 우리 모두가 다같이 꼭 기억해야하는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주말이 시작되는 불금 저녁부터 무거운 주제의 포스팅을 읽게하여 죄송합니다. 이상으로 제주 4.3 사건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https://steemit.com/kr/@gghite/4-3-70

https://namu.wiki/w/%EC%A0%9C%EC%A3%BC%204.3%20%EC%82%AC%EA%B1%B4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9962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ta/view.do?levelId=ta_h62_0050_0020_0010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3600

http://43archives.or.kr/html/sub020101.do

Youtube - 설민석 / 제주 4.3 사건 70주년, 우리가 몰랐던 제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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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정말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거 같아요 ㅠㅠㅠㅠㅠ

좋은글 너무 감사합니다 많이 배울게요

팔로우하고 보팅하고 갈게요
제꺼도 놀러와주세요

맞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하는 역사인것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어미새님 꼼꼼한 정리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 주말 마무리 잘 하세요~ 자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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