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단편소설] 사라진 여자 #1

in #kr3 years ago (edited)

“그녀가 사라졌네.”

K는 악수도 생략한 채 말했다. 3년만에 만난 친구에게 건넨 첫마디 치고는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이다. 그만큼 심경이 복잡하거나, 아니면 간절하거나, 둘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이런 경우엔 굳이 의뢰인이 아닌 그 누구라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선 상대의 템포를 죽여야 한다는 것쯤은, 굳이 내 직업, 그러니까 흥신소 조사팀장이 아니더라도 상식적인 대화의 기술이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컵에 따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일단 앉지.”

컵을 받아든 그는 사무실 소파에 엉거주춤 걸터 앉기는 했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불안하게 움직였다.

“감쪽같이 사라졌어.”

K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쯤은 그가 나를 찾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기에 K는 일반적인 의뢰인들과는 다른 관계였다. 어찌됐든 그와 나는 친구 사이이니 말이다. 사실 K와 나는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것 말고는 삶의 여정에서 함께 나눌만한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고교 시절에도 잘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꽤나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에 속했고, 말수가 적었다. 그저 학교와 집을 쳇바퀴처럼 오갔던 나는 반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부류였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뒤 그와는 다른 친구들의 결혼식장에서나, 혹은 몇몇 친구들의 부모 장례식장에서 문상객으로 가끔 만났다. 그 사이 17년이 훌쩍 흘렀다. K가 한번 결혼을 했다가 1년도 안돼 이혼했다는 소식은 그의 입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 5년 전, 어느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였다. 그러고 보니, 이혼 소식이 들린 뒤 그는 고교 시절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 맞아, 그 친구 요즘 뭐하고 있다고?” 간혹 생각이 나면 근황을 묻곤 하는 정도의 관계.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가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이혼 소식이 전해진 무렵이었다. 여하튼 나로선 K가 오랜만에 만나긴 했지만 아주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긴 뭔가 어색한, 친구이되 친하지 않은 친구 쯤 되는 이였다. 그래서 나는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따위의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인삿말은 건너 뛰기로 했다.

“누가 사라졌다고?”

K는 내가 바로 그의 말에 응수한 것에 조금은 안심한 표정이었다. 코에 걸린 안경을 올려 세우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소파 등걸이에 깊이 몸을 기대는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분위기를 조금 편안하게 만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K가 내쪽을 보지 않고 있어서 소용이 없었다. 팔꿈치를 양 무릎에 올린 채 턱을 괴고 있던 K는 여전히 한곳을 멍하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녀, 그러니까 내 애인이 일주일 전에 사라졌어.”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그가 이혼한 뒤 누군가와 사귀거나 재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는 것쯤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둘이 같이 살았나?”
“아냐, 그건 아니야. 하지만 매일 만났지.”
“사귄 지는 얼마나 됐는데?”
“3년.”
“꽤 오래 만난 건가?”
“음. 정확하게 3년 전에 만났어.”
“정확하게 3년 전?”
“그러니까 3년 전 12월 21일에 만났네. 그런데 그녀가 사라진 날이 딱 그 날이야.”
“만난 지 정확하게 3년된 날 사라졌다고?”
“그런 셈이지.”

사라졌다는 게 어떤 상황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실종인가?”
“실종이라면 전화 번호가 바뀔 리 없지. 수백 번 전화를 했어. 그때마다 ‘없는 번호’라는 음성만 되풀이 되더라고. 이상한 일이야. 나는 그 번호로 하루에 세 번 이상 그녀와 통화를 했다네. 그런데 일주일 전부터 없는 번호라는 거야. 그녀가 살던 집도 찾아가 봤어. 이사를 가버린 것 같아. 이틀을 앞에서 기다렸는데 나타나지 않았어.”
“이사를 했다는 건, 자발적으로 터전을 옮겼다는 건데…”
“그래서 경찰에 알릴 수도 없었어. 또 알려봤자 내가 법적 배우자가 아니기 때문에 실종 신고가 성립이 안되는 거잖아.”
“그러니 나를 찾아온 거겠지.”

사실 이런 경우는 나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주로 이혼을 원하는 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만한 불륜의 정황 증거를 대신 수집해 주는 일이니까. 간혹 빌린 돈을 갚지 않고 잠적한 이들을 추적하는 일도 하긴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사라진 애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은 없다. 남녀 관계라는 게 만났다가 시들해지면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연락을 끊어 버리는 경우는 자주 벌어지는 법이니까.

“그녀가 자네를 떠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럴 이유가 없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사라지기 바로 전날까지 우리는 너무 사이가 좋았거든. 나는 그녀와 단 한번도 갈등을 빚은 적이 없었다고. 그녀는 언제나 맑은 미소로 나를 대했지. 마치 사랑하기 시작한 첫날처럼, 그렇게 3년을 한결같이 보냈어.
“그런데 왜 갑자기 그녀가 사라진 걸까.”
“나도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어쨌든 자네도 그녀에게 떠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는 짐작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사라질 이유가 없거든. 납치나 뭐 그런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 않아.”

K가 왜 다짜고짜 “그녀가 사라졌다”는 표현을 썼는지 그 맥락은 대충 파악이 됐다. 요컨대, 그녀는 경찰의 수사가 필요한 실종 상태는 아니다.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K의 곁을 떠났다. 그런데, “가버렸다”가 아니라 “사라졌다”는 건 존재의 자취마저 흔적도 없이 함께 없어졌다는 걸 뜻한다. 그건 떠나는 자가 의도하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상황이다. 누구든, 어딜 가도 자기가 있었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아무리 의도적으로 자취를 없애도 어딘가에는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그렇게 자기 자신의 자국을 완벽하게 지울 수 없다. 그건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새삼스럽게 터득한 이치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분명했다. 어딘가에 자국은 남아있다. 다만 K가 그걸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녀의 행방을 찾아 달라는 거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어. 왜 사라진 건지도 묻고 싶고.”

K는 그제서야 내가 건넨 잔을 들어 거의 식어 버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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