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in #kr8 years ago (edited)

image_2287231971537894911779.jpg


보통 어떤 작품을 감상한 후, 그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사람의 평을 먼저 보지 않는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을 '온전한 내 생각'을 최대한 내부적으로 발굴해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여성의 관점으로 세계를 조망하는 글을 볼 때마다 '온전한 내 생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과연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나를 자문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반대로 경험할 생각이다.

이 책에 기술된 영화들, 대부분 관람하지 않은 이 영화들을, 철저하게 정희진의 어깨 위에 서서 바라볼 것이다. 이미 독배를 마시고 태어난 내 반쪽짜리 뇌(내 온전한 생각)가 나머지 반쪽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책에 인용된 말처럼, 설령 내가 슬픔의 강을 건너기 위해 스스로 강이 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 위를 흐르는 얄팍한 배라도 된다면 성공이라고 본다. 이러한 내 마음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사명감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페미니즘이 꽤 재밌다.




slogo.jpg




15
다큐멘터리를 포함해서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없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현(렌즈)를 통해서만 현실을 볼 수 있다.

22
사람들은 "내 할 일을 했을 뿐" 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아름답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생에서 "내 일을 했을 뿐"으로 정당화되는 일은 없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데, 이런 말은 인간을 혼자 살게 내버려 둔다.

27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북한이나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가족 담론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 계급이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부 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 이처럼 가족은 정치경제적 영역인데도 자연적인 장소로 묘사된다(특히, 모성).

37
'원한다'는 '사랑한다'보다 숨 막히고 섹시하다. '필요'도 그렇다. 필요야말로 가장 절실한 사랑인지도 모른다.

38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결핍이나 욕망에 대한 자기 판단, 회계(대차대조표), 자기 확신의 활동이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절대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받음은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기 혼란이다.

49
팜파탈은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산물이다. 이때 남성은 오히려, 모든 성폭력 가해자들이 합창하듯이, 유혹자 여성의 '피해자'가 된다. 팜파탈은 남성의 욕망을 맘껏 채워주면서도 남성들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남성은 여성에게 무성적인 존재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면서도, 성적인 문제의 모든 책임은 여성에게 떠넘긴다.

55
사랑과 친밀감, 섹슈얼리티의 정치경제학에 혁명이 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남자들의 혁명도 부분적이거나 자기 만족일 뿐이며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여성이 자기 몸을 소유하는 것은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인류의 거대한 타자성이 일소되는 것이다.

61
피억압자의 사회심리적 특징 중 하나는 불안한 미래의 행복보다는 현재의 확실한 불행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다.

70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계속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계속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에는 상의 상태가 없다는 것, 즉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81
지금 고통은 그때 행복의 일부이다.

91
아무리 별난 개인들의 사랑이라 해도, 대개 사랑은 앞서간 이들이 해 왔던 행위의 인용과 재인용의 이어짐이다.

105
상처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이기도 하다. 상처를 강조하면 상대방의 권력도 커진다. 그 소녀는 상처받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권력에 저항하고 그들을 비웃는다. "너희들은, 나를 망칠 만큼 대단하지 않아."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우리'의 상처가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면, 우리는 지배 집단과의 싸움보다 누가 더 큰 상처를 받았는가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문제는 '그들'이 사는 메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다.

142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기형도 같은 '젊은' '남성'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다. 중산층(비장애인, 좋은 학벌 등등) 남성에 한정되겠지만, 남성이고 젊다는 것은 계급과 자원 그 이상의 것이다. 그들은 문화적, 심리적 차원에서 사람들이 욕망하는 그 무엇을 노력 없이 가진 자들이다. 그들의 자원이 자원일 수 있는 것은 성별 사회, 연령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그들의 묘한 우월감, 거들먹거림, 나르시시즘, 삶에 시달리지 않은 근육, 고통이나 죽음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쿨'한 척에 나는 욕지기를 느낀다.

157
전쟁을 원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전쟁과 평화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성폭력 위협에 노출된 여성들에게, 전쟁과 평화의 구분은 가해 남성이 누구인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 가해자가 외국 군인일 때만 전쟁 상태로 간주되곤 한다.

165
예술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슬픔의 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그 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예술가는 이 강의 존재를 일깨운다. 이러한 사고에서 '순수'니 '참여'니 하는 말은 아예 논외다. 이렇게 걸작은 기존 담론의 전선을 이동시킨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고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정찬, 슬픔의 노래)." 나는 이 대사처럼 상상력을 정확하게 정의한 경우를 알지 못한다. 상상력은 상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위치를 바꿀 때 새롭게 생성되는 다른 정치적 입장, 공간을 의미한다. 위 대사가 비판하는 상상력이란 현실에 발을 담그지 않은, 현실에 무지한 혹은 현실을 이용하는 이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생각없음'일 뿐이다.

스스로 강이 될 것이가, 배를 탈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누가 자기 몸을 강으로 삼겠는가. 스스로 강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 강이 된 경우와 배를 탄 경우를 구별이나 할 수 있겠는가.

174
유례없이 참혹한 한국 현대사에서 전쟁과 국가 폭력의 희생자는 극단적으로 성별화된 주체이기도 하다. 역사의 주체이자 행위자로 간주되는 남성은 장기수 '선생님'이고, 남성 역사의 부산물로 간주되는 위안부 여성은 비정치적인 존재로서 '할머니'다.

179
남성과 여성의 역사는 출발선이 각각 다르다. 남성은 새로 시작할 필요 없이 '아버지'의 어깨 위에 앉아 여성이 배제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전수받으며 세계를 조명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지배 언어가 일치한다. 그들은 언어가 없어서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장기수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시선과 동질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걸출함은 수천 년간 진행되고 있는 남성 사회의 인식론에 상당 부분 '편승'한 것이고, 그 물적 토대는 타자화된 여성 집단의 외로움, 노동,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송환>을 여성사로 읽는다.

216
학교 다닐 때 생물 시간에 배운 '자웅동체' '암수한몸'은 열등한 생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등 동물'인 인간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남녀로 구별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성차별 사회이기 때문이다.

219
주인공의 표현대로, 여성 리더의 악마성은 많은 경우 그녀가 남자라면 '카리스마'일 뿐이다. 여성 리더들은 '아내'가 없기 때문에 공적 영역의 비서가 아내 역할을 대신 수행한다. 여성이라면 결혼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성공이, 남성은 결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Sort:  

정희진님의 책 제목은 기억 안나지면 2권 정도 읽은 듯 한데 다 너무 좋았어요. 이 책 읽어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책 소개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저는 3권째인데, 정희진 책을 읽을 때마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밑줄을 긋게 되는것 같아요. 저도 본격적으로 정희진 덕질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ㅎ

책의 문구들이 마음에 콕콕 와서 박히네요. 이 작가 기억해야겠습니다^^

콕콕 박히고 뒷통수를 후려치는 글을 쓰시는 작가입니다 저에게는요.

책을 읽은 후, 아~~~ 도대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싶을 때만 다른 사람의 리뷰를 봅니다. 아하~~ 싶으면 참고하고, 뭐라고?? 싶으면 그 책의 리뷰는 안 쓰고 싶어집니다. 악평을 쓸 것 같아서요. ㅎㅎㅎ

때론 그 분노가 글의 영감을 만들어주기도 하죠 ㅎㅎ 악평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예전엔 악평도 잘 썼는데,,, 나이 먹어가면서 그런지 마음이 약해지는... ^^

마음에 닿는 글 이많아요.
잘 읽었습니다^^

특히 여성은 더 닿을 것 같습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3
JST 0.099
BTC 64579.16
ETH 1870.82
USDT 1.00
SBD 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