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의도치 않은 미니멀 라이프 / 피해자의 삶은 살기 싫어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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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소꿉친구와 이제는 그보다 더 친한 그의 여자친구가 나와 함께 교토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9월 초에 이륙하는 왕복 표를 사둔 참이었고 일을 안 했기 때문에 돈도 없어서 아쉽지만 못 간다고 하려고 했는데, 그들이 왕복표와 여행경비를 내준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2박3일간의 교토여행을 떠났다.

친구들과 한껏 부푼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는데, 웬걸, 내가 없는 동안 환기를 위해 오너가 친절히 베란다 문을 열어두셨더라. 방충망까지 활짝 열어서 그동안 많은 손님들을 받으신 모양이다.
내가 관리하는 방이 9개인데 각 방을 체크하면서 발견한 벌레 시체만 20마리는 족히 된 것 같았다. 어떤 방은 방 안에 새 똥까지 있었다. 벌레 손님은 많이 봤지만 새 손님은 신선한데?

환영인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내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고 욕실 앞 바닥에는 물이 가득 고여있었는데, 베란다에도 물이 가득 고여있는 것으로 보아 베란다의 물이 넘쳐서 들어온 것인지 욕실 하수구가 범람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목재로 된 침대와 책상은 바닥에 고인 물을 빨아들여 뽀얀 곰팡이들을 피워냈고, 침대 위 매트리스까지 축축했으며 침대 밑에 둔 종이상자들은 발효가 된 건지 썩은 요플레 냄새를 풍겼다. 상자 안에 넣어둔 잡동사니들도 물에 흠뻑 젖어 축축했고 개중에는 액정이 고장나 넣어둔 아이폰도 있었다. 옷이며 운동화며 수건들까지, 내가 집을 비운 3개월간 곰팡이는 거침없이 내 물건들을 집어삼켰다. 욕실과 현관에는 전기가 들어왔지만 방 안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구를 새로 갈아 끼우려고 보니 맙소사, 등을 감싸는 등갓에 물이 출렁이는 것이 아닌가. 누전차단기(두꺼비집이라고도 한다지. 나는 오랫동안 두더지집이라고 불렀지만)를 전부 내려놔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곳에 물이 차지? 설마, 수증기......? 덥고 습한 곳을 떠올리면 대표적으로 아프리카가 있고 한국에는 대프리카가 있으며 일본에는 교프리카가 있다. 교토의 여름은 자동차나 아스팔트 위에서 반숙을 구워낼 수 있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리고 태풍으로 인해 무시무시하게 습했으리라. 내 방 바닥에는 물까지 고여버렸으니 수증기가 발생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라고, 나름 논리적인 납득을 했지만 곧 천장에서 벗겨진 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냥 천장에서 물이 쏟아졌던 것 같다. 하지만 왜?

그 뿐만이 아니라 각 방을 체크하던 중 내가 없는 동안 한 여성이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구지? 내 집이 아니니 상관없긴 하지만 오너나 오너의 아들인 지인이 들인 사람일텐데, 낙엽과 벌레 시체로 엉망이 된 건물 입구를 그녀가 방치했다는 것이 살짝 괘씸했다. 하지만 그녀가 지인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이사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고 최근 일주일간 집을 비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오너가 그녀에게 관리를 맡기지 않았다고 했으니 그녀에겐 책임이 없다.

다음 날, 이웃주민과 안부를 주고 받다가 7월에 동네에 큰 지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W태풍으로 4일간 쉴새없이 폭우가 내렸다고 한다. 아마 그 때 건물에 균열이 생겨서 천장에 물이 찬 것이 아닐까? 어찌됐든 곰팡이로 인해 짐이 대폭 줄어들었고 내 삶은 다시 미니멀해졌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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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자주 접하는 단어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소유하며 사는 것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그런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을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미 '단샤리(斷捨離)' (1) 로 알려져 아는 사람은 알던 이 단순한 삶의 방식에, 그저 물건을 적게 소유하는 것이 아닌 비움으로써 채우고 단순함을 통해 눈 앞의 가치있는 것들을 더 소중히 한다는 철학을 담은 것이 미니멀리즘 (2) 에서 기인한 미니멀라이프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미니멀라이프는 2011년 3월 11일 (3) 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더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나도 집이 망가져보니 물건들이 내게 얼마나 의미가 없었는지 알겠더라.

(1) 단샤리(斷捨離):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주부였던 야마시타 히데코가 고안한 방법으로, 요가의 행법(行法)인 단행(斷行), 사행(捨行), 리행(離行)을 정리정돈에 도입한 것이다. ‘불필요한 물건이 들어오는 것을 끊고(斷), 공간을 차지하는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고(捨),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離) 것’을 말한다.

(2) 미니멀리즘 : 미술, 건축,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형태나 색채를 최소한으로 줄여 대상의 본질만을 추구하는 것.

(3) 2011년 3월 11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당시 일본어학교의 졸업식을 위해 교토에 있었으므로. 그 날 나는 전파의 상태가 나빠진 것과 주위 사람 몇이 안절부절 못하던 것 외에는 대참사를 느낄 수 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는 한 번도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기회가 된다면 무엇인가를 수집해서 진열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저 환경이 자주 바뀌어서 짐이 없는 편이 나았을 뿐이다. 그러고보면 환경에 대한 미련이 크지 않다. 어릴 때부터 유독 나는 거주 환경이 자주 바뀌었다. 8살부터 11살즈음까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방학만 되면 대구에 있는 할머니 집에 혼자 보내졌고 엄마를 찾으며 훌쩍이는 향수병은 그 때 끝났다 (참고로 나의 첫 외국어는 대구 사투리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혼자 기숙사 생활을 했고 기숙사는 학기마다 방배정이 바뀌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혼자 교토에 갔다. 지난 8년간 이사를 9번 정도 했다. 스웨덴에 가기 위해 살던 집을 처분하고 게스트하우스(인 듯 료칸 같은 곳)에서 식모살이를 한다고 짐을 반으로 줄였다. 그 끔찍한 곳을 나와 홈스테이를 하게 되면서 또 짐을 줄였다. 스웨덴에서 돌아와 짐이 다시 늘었다가, 결혼 할 뻔 했던 남자와 함께 살기 위해 다시 짐을 반으로 줄였다. 회사에서 사건이 터지고 그와 헤어지면서 지인의 가게에 신세를 지기 위해 짐을 다시 줄였고, 당시 나의 짐은 박스 8개와 여행 가방 2개가 끝이었다. 키키와 만나자마자 다음 날 함께 이사를 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였던 것 같다. 키키와 살면서 나는 짐을 또 줄였고 현재 내 짐은 박스 4개와 여행 가방 5개가 끝이다. 그 마저도 곰팡이로 엉망이 되었으니, 처분하고 나면 여행 가방 5개에 모든 짐이 들어갈 것 같다. 나머지는 내 소유가 아니다.



28살, 나는 돈도 짐도 직장도 없다

[[bar_orange]].png의도치 않게 삶이 너무 미니멀해졌다. 매달 최소 130만원을 벌어 과거의 내가 마치 내일 죽을 것 처럼 긁어댄 카드할부금을 납부한다. 많이 벌어서 생활비가 충분하면 놀고 아슬아슬하면 가능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늘 한 달 앞을 보며 살았지만 키키랑 보낸 한 달은 현재만 생각하며 지출했고 나머지 비상금마저 병원비로 바닥이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토의 집은 오너가 10월 중으로 이웃에게 팔 예정이다. 게다가 한 클라이언트와 불화가 생겨 수개월 전에 입금 받았던 20만엔을 10월 말까지 돌려줘야한다. 언제나 안 좋은 일은 꼬리를 물며 들이닥친다. 바사삭 부서진 멘탈로는 이들을 해결할 수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건 강해지는 것 뿐이다.

나를 약하게 만드는 이유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나는 약해지고 싶지 않다.

재판을 이틀 앞두었을 때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 내게 가해자의 언어로 말을 했고 나는 그 말을 조심스럽게 수정해주었는데 그게 그거 아니냐며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차라리 말을 꺼내지 말지 왜 걱정하고 도와주려던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냐고 짜증을 냈다. 내가 잘못되었고 바뀌어야한다고 했다. 그로 인해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과 감정들이 터져버렸다. 오랫동안 제대로 웃을 수 없었다. "네가 여행다니면서 웃고 즐거워보이는 사진들을 인터넷에 올렸잖아. 재판에 불리하게 이용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그러니까 왜 남들이 다 볼 수 있게 웃고 다녔냐'는 비난으로 들렸다. 억울하고 슬퍼졌다. 그러면 나는 '피해자'에 걸맞게 매일매일 울고 힘들어하는 모습만 보이며 지내야 했을까? '피해자'는 '피해'를 극복하고 이겨내려고 하면 안 되는 걸까? '피해자'가 웃을 수 있으면 '피해 사실'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나는 웃기 위해 숨어 살아야 했을까?

나는 결코 피해자가 되고 싶어서 되지 않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진단 받았지만 그 병이 이끄는 대로 살기는 싫다. 죽고 싶어질 때마다 죽을 각오로 살고자 했고, 사는 동안 웃을 수 있기를 바랬다.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한 노력들이 왜 '부자연스럽다'거나 '불리'하게 취급되어야하는 거지?

간혹 자신이 만든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쉽게 부정하고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기준으로 나를 보면 나는 종일 울고 약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피해자가 프레임제작자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가해자의 행동이 합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집중했으면 좋겠다.



나는 나의 삶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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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상대측 변호사가 쓴 '부자연스럽다'는 말이 나를 칭칭 감아 내 삶이 아닌 피해자의 삶을 살도록 했다. 피해자의 삶은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하고 불안하다. 나는 피해자의 삶이 아닌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것이다. 눈물을 흘리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삶을 살 것이다.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웃으며 살고 싶고 나는 계속 그렇게 웃을 것이다. 재판에 불리하지 않겠냐고? 내가 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즐기고자 노력한 것으로 누군가 혹시 나를 공격한다면, 다시는 그런 말을 못 하도록 아프게 물어줄 것이다.


가해자와의 싸움에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을 때 이 모든 과거가 명예로운 흉터가 되어 앞으로의 삶을 장식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까 정신차리고 일어나서 눈 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합시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고, 해야할 작업들을 해치워야 하고, 교토의 집을 한 달 안에 예쁘게 버려야 한다.

10월 말에 키키가 세계일주를 그만두고 돌아오겠다고 한다.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우리는 아마 요코하마에서 다시 같이 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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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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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모양 화이팅~!
20스달 보내요
맛난거라도 한그릇 사먹고
다시 달려 봅시다~~

헉 감사합니다!
또 만나뵈러 가고 싶네요. 따뜻했던 포옹도 많이 그립습니다.

면접 잘봐요 스모모님~!!!
절대 피해자처럼 슬퍼하고 있지마요
밝고 자신감 넘치게!!!

감사합니다!

악재가 여러 개 있는 듯 싶지만 잘 극복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요코하마에서의 새로운 생활도 기대되네요!

아자아자!
어디든 키키가 함께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헤헤

면접 파이팅입니다! :D

힘내라!!! 뭐든 하락이 있으면 상승이 있는법 아니겠나!

오늘 수고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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