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과 요리사가 나오는 일기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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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서울 동생 집으로 갔다. 도착해서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국 발음에 익숙해지려고 유튜브를 뒤지다가 철 지난 영국 청춘 드라마 스킨스(skins)를 발견했다. 어바웃어보이(about a boy)에서 독특한 꼬마 역할을 했던 니콜라스 홀트가 훈훈하게 컸길래 엄마 미소를 지었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앞집 여자는 니콜라스가 엿보고 있는 걸 알면서 옷을 홀딱 벗고, 니콜라스는 친구의 총각 딱지를 떼어주겠다고 동분서주다. 영국 발음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2
다음날 오전 9시 반. 북촌에 도착했다. 맨 먼저 만난 사람은 콜린 퍼스를 연상시키는 아담. 양복을 빼입고 조용히 투덜거리는 아담은, 호텔직원의 뺨을 때리거나 미국인을 경멸하던 친할머니 이야기를 해주었다. 직업도 없이 쇼핑만 하던 그녀는 패션계의 셀럽이어서 런던 거리에서 사진이 찍히곤 했다고. 귀족주의에 빠진 그녀가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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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캐리를 닮은 마크는 태어나 비즈니스석을 처음 타봤다며 슬리퍼는 물론이고 작은 용기에 담긴 소금과 후추까지 쟁여왔다. 내내 상기돼있고, 혼이 나간 듯 Wow.. Amazing 을 연발해서 대마초라도 폈나 했는데 담배도 피지 않는 채식주의자였다. (흡연과 채식과 대마초는 아무 상관이 없다!)

4
엘리트 코스만 밟아 런던 샌님이라 놀림받는 아론은 소심하지만 예의 바르고 도자기에 대한 지식과 열정이 넘쳤다. 길가에 파는 도자기 제품을 보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Made in China 가 아니라는 소식에 감격했으며, 그 옆 비닐하우스에 파는 다육 식물에 꽂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5
톰은 정말 톰처럼 생겼다. 도자기를 만드는 나머지 예술가들과 달리 톰은 나무 공예를 한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찰스 황태자의 왕관을 직접 만든 금속 공예가였는데, 황태자에게 바치기 전 그 왕관을 쓰고 장난스럽게 기념사진도 한 방 찍으셨다. 들키면 대역죄인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톰은 신이 나서 사진을 보여주었다.

6
내게 통역 일을 제안한 친구까지 우리 여섯은 순두부찌개를 먹고 바로 이천 도자기 마을로 출발해, 한국 도자재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박물관과 공방을 둘러보고 두 건의 미팅을 진행한 뒤 서울로 돌아왔다. 저녁은 지인의 식당에서 먹었는데, 아직 이 영국인들이 낯선 데다 음식도 풀만(마크는 채식주의자에 아담도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키고, 그들 발음을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7
느낌이 이상해 문득 옆 테이블을 쳐다보았더니 남자 둘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날 보고 있다. 하나는 성수동에 두 번째 레스토랑을 오픈한 지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라, 뉴욕에 사는 지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레스토랑을 준비 중이었는데, 어느덧 그 레스토랑은 각종 언론에 등장하는 뉴욕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한국에 왔으면, 왔다고 얘길 해야 될 거 아냐! 내가 이곳에 있다고 연락을 받은 모양이다. 너무 놀라(고 힘이 없어) 아무 말도 못 한 채 토끼 눈만 떴다.

8
영국인들과 2차로 맥주를 마신 뒤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나의 업무는 끝이 났다. 침대 껌딱지인 내가 별안간 12시간 넘게 돌아다니고, 능력도 안 되는 통역을 하고, 제대로 먹은 것도 없으니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럴 수는 없지. 안국동 지인의 수제 맥줏집으로 가서 게 내장 파스타를 주문해 먹는 동안 지인이 하나, 둘 주위로 모여들었다.

9
술자리는 새벽 2시가 되어 어느 삼겹살집에서 끝이 났다. 체력은 바닥인데 반갑고 기분이 좋아 안 하던 술을 꽤 마셨다. 1년 만에 보는 얼굴도, 6년 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다. 잘 나가는 요리사도, 안 풀리는 요리사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었다.

10
내일은 오전 8시 반부터 민속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한국가구박물관과 길상사, 보안여관에 갔다가 워크숍을 하는 일정이다. 아침에 일어날 수나 있을 지 모르겠다. 비도 온다는데. 영국 발음이 잘 좀 들렸으면 좋겠다. 당장은 그것뿐이다.

2018.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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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바쁘게 지내시는군요.. 통역만으로 머리가 지끈지끈한데 영국영어라니 ㅠㅠㅠ
건강 안 상하시고 잘 마무리하셨으면 좋겠네요!

@eversloth 님! 늘 조용히 다녀가주시는 것 잘 알고 있지만 오랜만의 댓글이라 너무 반갑습니다 ㅎㅎㅎ :) 영국영어도 문제지만 사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서요! 그래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능력밖의 일을 하느라고 ㅎㅎㅎ 잘 마무리하고 돌아왔습니다. 밥도 많이 먹었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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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순조로운 증량일기군요 스동무.. 저도 맛있는거 많이 먹고싶습ㄴ..

게 내장 파스타 함께하실래요? (로만치크) 요즘 직원식당에 치킨이 안나오나 봅니다?

뭔가 대단한 느낌입니다.

톰 같이 생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계속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아요 ㅎㅎ

저도 톰 같이 생긴 얼굴은 뭘까 생각하면서 스크롤을 내렸는데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제가 아는 톰은 ... 톰 크루즈와 톰 히들스턴 정도인데
아래 사진이 아버님이라고 하니 톰 히들스턴 쪽에 가깝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ㅋㅋ

저도 톰 크루즈랑 톰과 제리의 톰이 떠올랐답니다 ㅎㅎ

톰과 제리의 톰 ㅋㅋㅋㅋㅋㅋㅋ

앗, 아아... 톰크루즈라니. 톰 크루즈는 아니었어요. 미안하다 톰!! 아임쏘리 ㅎㅎㅎㅎ

톰같이 생긴ㅋㅋㅋㅋ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올 것 같고 뭐 그런? 사진에 왕관 쓴 사람이 톰의 아빠입니다 :D

아하 그 톰이군요.. 아버지 이미지를 닮았을테니 의문이 해소되었습니다. 꿈에 톰이 나올뻔 했습니다 ㅋㅋㅋㅋ

오랫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너무 좋았을 곳 같아요:)ㅎㅎㅎ 자고 일어나면 더 체력이 많이 생기시길!!!ㅋㅋ

오랜만에 만난 것도 좋은데 친구들이라 더 좋았지요 :) 무엇보다 충분한 수면과 체력이 삶의 질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깨달았어요 ㅎㅎㅎ

맞아요~수면과 체력은 중요하지요:) ㅎㅎ다음날 더 즐거운 시간을 갖으셨길 바래욤~

영국 발음이.. 하..

자막이랑 같이 들을 땐 좋았는데 말예요...

왜 미국애들이 영국악센트를 섹시하다고 느끼는 지 전혀 모르겠는 1인..
안들려서 짜증만 나던데.ㅎㅎ
돌아다니신다고 고생하셨는데.. 글 쓰신다고 더 고생하신거 아닌가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ㅋㅋ
먹는게 남는 겁니다. 맛난 거 마니 드셔요~~~~ ㅎ

섹시하게 들릴 때도 있기는 해요! 다만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렇지 ㅋㅋㅋㅋ 그러고보니 호주도 영국발음이군요.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ㅁ; 이번에 돌아다니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 먹었어요! 오랜만에 움직여서 그런지 ㅎㅎㅎ 그러니 좀 버틸만하더라구요. 역시 밥과 잠이 보약인듯 합니다 :)

봄님은 사람을 기억할 때 비슷한 사람을 잘 꼽으시네요 ㅋㅋㅋ :D

톰은 톰이랑 비슷하게 생겼더라구요...ㅋㅋㅋ

톰 아버지 표정 정말 톰 같으세요 ㅎㅎㅎ

톰 아버님 코찡끗 김혜수 웃음... 저 손 포즈도 디테일한데 앙드레김인지...

코찡끗 김혜수 ㅋㅋㅋㅋ (역시 당신은 나의 워너밥..)

손포즈도 정말.. 톰..

워너밥.... 아슬아슬...

약 보름 전의 일기를 뒤적 뒤적 구경하는 기분이에요. :)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겁게, 멋지게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힘들고 에너지를 쏟는 일이죠. 게다가 고기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다니요... 근무환경 개선이 필요합니다...

ㅎㅎㅎ 뒤적뒤적 꺼내보고 가서 고마워요 블리님 :) 예전같으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신이 나서 좋을 것만 같은데 이제는 체력도 마음도 그때만한 여유가 없네요. 게다가 고기도 주지 않다니요 ㅜㅜㅜㅜ 샐러드만 세 종류를 시키더라구욧!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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