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 / 엄유나, 2019 (이 영화를 보고 태국어 문자를 열심히 배워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in #kr6 years ago (edited)

인간이 동물과 다른게 있다면 복잡다단한 언어를 쓴다는데도 있겠지만 언어와는 또다른 글자와 기록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기록은 나의 생각과 감정이 정리된 것이며, 또한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한다는 의미이며, 또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스스로가 떠올리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건 단순히 반복된 지능만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누군가와 다른 생각이라는게 담기고, 감정이 담기며, 또 그 순간의 상황이 담긴다. 그리고 그것이 활자화가 되면 작은 실수로 틀려버린 오류까지도 하나의 이야기를 남긴다. 그러고 보면 말이나 글이나 고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들이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어릴적 내 주변에는 할머니들이 참 많았다. 내가 10살이 안되었을 때 7-80대의 할머니들이니 내 나이에서 6-70년을 더해 계산해보면, 나 1910년생 언저리쯤에 태어난 할머니들이었다. 10여분의 할머니들 중에서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분은 단 한분, 그리고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던 분이 두 분 있었지만, 그 분 중 한 분만이 일본어를 조금 그리셧고(?) 한 분은 역시 글자를 몰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할머니들 중 두 분에게 10살 무렵의 나는 한글을 가르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날무렵 사투리가 그대로 묻어난 말을 글자로 옮기고, 자제분들께 편지를 쓰고, 어디에 글자가 보이기만 하면 떠듬거리며 읽어대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늘 내게

"평생을 살았는데 어디 나가면 눈앞이 캄캄했어. 그란디 이제 눈앞이 환해진 것 같아. 눈을 뜬 것 같아. 고마워."
"내 나이 60에라도 진작 배웠으면 참 좋았을 거인디 후회가 디야. 허지만 지금이라도 배우길 잘한 것 같아."

수십번을 이말을 반복하고는 했다. 나는 한글도, 한자도, 알파벳도 설렁설렁 너무 쉽게 배웠는데, 이제 해외 나와서 살면서 글자의 벽에 갇히게 되었다. 태국문자도 우리에겐 보통 꼬부랑이 아닌데다 글자수도 많고 변칙도 너무 많아서 쉬 익히기 어려운 글자이다. 초반에 쓸일도 없고 도외시 하다가 글자를 조금씩 익혔지만 그걸로는 뭔가 긴 문장은 고사하고 간판도 쓱 하고 읽기엔 쉽지 않다. 그래도 조금씩 읽히는 글이 생기자 30년이 지난 그 할머니들의 "눈앞이 환해진 것 같다"란 말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정보를 익히고 배운다는 건 사람이 사람처럼 살 수 있다란 말과 같다. 활자의 소중함과 말을 글자로 표현한다는 것의 소중함은 너무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말모이란 영화는 다시금 그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것만 같다. 글이란 혼자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말보다 더 중요한 정보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정보이다. 말을 아무리 잘해도 결국 문자의 장벽에 막히면 언어가 가진 깊고 함축적인 정보에 접근조차 불가능해진다. 경험이야 정말 중요하긴 하지만, 짧은 시간동안 모든 경험을 직접해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기는 커녕, 우리 한 생애에서 필요한 정보의 10%에도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축적된 경험을 우리는 단 한시간의 짧은 시간 혹은 단 한 권의 책을 통해서 경험자들로부터 쉽게 전달받을 수 있다.

이 영화는 1942년, 조선어학회를 일제가 탄압했던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요 배역들은 10명이 채 안되지만, 사실 이 사건을 찾아보면 탄압의 대상은 30명에 가깝다. 참으로 다양하다, 그들의 이름을 찾아 보았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1881년생 서울 출신 이중화, 가장 어린 사람이 1916년생 전북 고창 출신 권승욱이다. 나이를 보아하니 내 주변의 할머니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1945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된 원고뭉치. 이게 아니었다면 우리는 물론 지금도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말이 망라되어있었을 그 책 조선말 큰사전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똘똘하게도 그렇게 기차역 창고에 던져두었을까. 영화는 김판수가 죽어가면서 그곳에 던져두었다고 말해준다.

사실 김판수, 류정환, 조갑윤, 임동익… 모두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들 은 어쩌면 역사속에서 다 살아있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새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너무 곁에 있어서 귀한 줄 몰랐던 글자의 소중함. 영화가 들려주는 마지막 팩트.

한글은 현존하는 '3천개' 언어 중 고유의 사전을 갖고 있는 단 '20개'의 언어 중 하나이다.

"하나의 언어적인 개념에 대한 완전한 번여은 사실 불가능하다"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나의 어휘에는 역사적으로 덧붙여진 수많은 뉘앙스들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이 것들의 용례가 늘어나고, 과거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느낌이 그 언어구사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내용이 포함되고, 그렇게 하나의 말은 점점 많은 의미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대개 이 많은 용례와 느낌들은 역설적이지만, 오직 글자와 사전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지, 그 말을 자주쓴다고 해서 그 경험들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우리말의 소중함" 보다는 "쓰는 말들을 모아두어 잊지 않게 함"에 더 가깝다. 즉, 사전과 글자라는 주제에 더 가깝다. 대개 우리말을 고수하는 입장에선 외래어, 외국어, 신조어들을 쓰는데 부정적이지만, 실은 외래어, 외국어, 신조어들도 우리식으로 쓰이면 우리말이 되며, 우리 언어와 문자를 더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다. z/s, p/f, b/v, l/r 등의 지금 로마자로만 구분 가능한 ㅅ,ㅍ,ㅂ,ㄹ 등을 예전에 한글에서 탈락시킨 반치음(Z), 순(경)음 연서 ㅂㅇ(V), ㅍㅇ(F), 병서 ㄹㄹ(L)로 발음 가능하다고 많이 주장되고 있지만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영어발음을 통해 부각된 이 차별 때문에 이후 이 글자들이 살아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말은 소통이고 글은 그 소통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덜어낸다. 꼭 우리글이 더 위대해서가 아니라, 배우기 쉽고 잘 만들어진 글자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지식의 수단으로 연구하고 확장시켜 나가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일 뿐이다. 더불어 이 글자와 말을 지키는데 많은 이들의 가슴아픈 희생들을 겪었으니 소중함을 한 번 되새길 법 하다. 나는 오히려 이 영화를 통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의 문자를 좀 더 신경써서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류의 개인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행복을 누리고 살 자격이 있지만, 꼭 우리들이 다음세대에게 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면 비록 생존하기 위해, 혹은 재미가 있어서 배우고 익힌 정보를 잘 정리해서 물려주는 것이다. 먼저살았던 이들이 뒤에 살 이들을 위해 해줄 것은 이것 하나 뿐이다. 그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활용할 것인지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의 몫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로 위에서 다룬 몇가지 유사한 발음을 구분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안쓰고 있는 글자들을 소개해 둡니다. 관심있는 사람들이 다시 쓰기 시작한다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겠죠.

로마자한글한글명칭
V순음 비읍/연서(글자를 위아래로 붙여씀)
F순음 피읖/연서(글자를 위아래로 붙여씀)
Z반치음
L/Rㄹㄹ/ㄹㄹ병서(좌우로 나란히 붙여서 씀) (용례 잘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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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공부를 스팀잇 에서 할줄이야 ㅎ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였습니다.

말에는 그나라 문화와 그 민족의 정서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죠!
번역으로 그 말을 완벽하게 하기란 불가능 한거죠!!
전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려구요~ 다른 언어를 배우는건 너무 어려워요~ ㅎㅎ

오...저도 그 영화 봤어요.
언어 참 소중해요.

언어를 지키며 희생해왔던 누군가가 있었는데, 그들을 칭송만 할 게 아니라 이젠 일상에서 제대로 익히고 배워둬야하겠네요. ㅎ

훌륭한 글입니다.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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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저도 보고 싶은 영화에요.

한 포스팅에서 와닿는 말이 참 많네요.
영화도 꼭 챙겨 봐야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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