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보다는 '제대로'가 중요한 시대

in #kr6 years ago (edited)

"한국놈들은 시간을 많이 주면 안 돼.. 일정을 바짝 당기고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매일 조져야 돼.."

오래 전 대기업의 한 임원 되시는 분께 들은 이야기다. 말이 좀 상스럽긴 하지만 이 방법은 상당히 효과적이긴 하다.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데에는 이만 한 방법이 없다. 일단 타이트한 일정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업무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는 효과도 있다. 문제는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는 것이다. 1~2번은 괜찮겠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삶이 피폐해진다.

그러나 대기업의 임원이나 정부 조직의 고위 관료쯤 되면 이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조직이 크다 보니 경쟁은 심하고 막강한 인사권을 쥐고 있으니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그들 앞에 줄을 서 있다. 그러니 일을 시켜서 잘하면 계속 쓰고 못하면 갈아치워 버리면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큰 조직에서는 상당히 하드한 단기전이 반복해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기업에서 이런 일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왜 그런가? 오너들이 경영진에게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이던 시절 이런 방식은 매우 효과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에서 시작한 한국이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속도전이 있었다. 게다가 이런 단기적 성과 위주의 속도전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정과 잘 들어맞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방법은 후발주자로 2위 그룹에 진입할 때까지는 효과가 있다.

문제는 선두그룹에 진입하면서부터 발생한다. 어떤 분야든 선두그룹에 들어가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션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선두의 자리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새로운 개념,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능력을 요구하는 일들이다. 2위 그룹까지는 선발 주자가 만들어내는 것을 적당히 베끼는 것으로 충분했겠지만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는 일은 모방과 속도전을 하던 수준의 조직과 역량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은 현재 우리의 생활수준이 북미와 유럽의 선진국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직 한국은 선진국 대접을 받지 못한다. 우리 스스로도 선뜻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한국은 선진국의 문턱에서 무언가에 발목이 잡혀있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2016년 삼성전자는 연이은 갤럭시 노트7의 폭발사고로 곤욕을 치렀다. 한국은 물론 미국, 대만 등에서도 폭발사고가 일어나 삼성은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삼성은 처음에 외부충격에 의한 발화라는 입장을 내놓았다가 사고가 잇따르자 조사 후 배터리에 결함이 있음을 시인했다. 당시 한 언론은 삼성이 경쟁사보다 제품을 먼저 출시해 시장을 선점하려던 것이 화를 부른 것이 아니냐는 분석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이 언론이 인용한 삼성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좀 더 여유를 갖고 다양한 상황에서 충분히 테스트했더라면 문제를 잡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할 말이 없다."
-2016.09.06 조선비즈 '흥행조급증이 폭발시킨 S7' 중에서 일부 발췌

나는 이 사건이 선진국이 되려는 한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8년 현재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빨리' 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하는 것을 중시하는 마인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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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필요한 과정을 충실히 밟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과정이 충실하면 결과물의 완성도는 올라가게 마련이다. 또 어떤 일을 하건 스킬과 경력이 쌓이면 하이퀄리티의 결과물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커지게 된다. 그러나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는 한국은 이러한 요구사항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속도전을 계속하던 체질과 시스템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에는 강한 우리나라가 소프트웨어에서는 약세를 면치 못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결과물을 내는 것 못지 않게 과정이 중요하다. 소프트웨어 개발에는 다양한 방법론이 이미 나와있다. 방법론에는 구체적인 프로세스가 정의되어 있으며 각 단계마다 반드시 나와야 할 산출물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IT 프로젝트에서 방법론이 제대로 준수되는 경우는 드물다. 적용될 방법론에 맞게 일정과 예산이 책정되지도 않는다. 속도전 세대인 의사결정권자들이 이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빨리빨리'를 원한다.

IT 강국을 자처하는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소프트웨어를 갖고 있지 못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소프트웨어 뿐만이 아니다. 신약 개발이나 디자인 등 고부가가치의 상품들은 빨리 만드는 것보다는 완성도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상품들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한국은 곧 중국에 따라잡히게 되어있다. 아니 이미 상당 부분 따라잡혔고 일부는 추월 당했다고 봐야 한다. 이제 한국은 '빨리' 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마인드 문제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고퀄리티의 결과물을 내기 위한 복잡다단한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 과정을 감내하기에는 조급증이 너무 심하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왜 그런가? 이것에는 아직까지는 한국을 추격하고 있는 중국이 더 강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겨우 지키고 있는 아슬아슬한 우위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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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최신 글들을 잘 읽고 갑니다.
@solafide7981님의 글이 스팀잇에서 많이 읽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김삿갓 @yungonkim이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ㅎㅎ
자주 놀러오세요..^^

(╹◡╹)제가 일본에 있을때 한국업체와 웹사이트 개발에 참여했는데요. 한국업체에서 정말 힘들어했습니다. 체크리스트가 정말 많았거든요. 경우의 수별로 제대로 기능하는지 버그는 없는지 체크해서 제출해야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3~6개월 정도에 끝내고 싶어했지만 결국 1년넘게 걸렸습니다. 제가 느끼기론 일본은 너무 신중했고 한국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요. ㅎ

맞아요..ㅎ 일본은 강박증 수준이예요. 그러나 한국의 조급증도 심각한 상태입니다. 일본의 강박에 대해 말했지만 아직까지는 일본제품의 완성도가 우리 것보다는 더 인정 받고 있어요. 우리가 완성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조금 더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학적 관점에서 ‘개념설계’가 상당히 부족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해양 플랜트 등 무너지고 있는 산업들의 경우에 각자의 고유 기술이 없고 여러군데에서 설계도를 사서 만들어 파는 식이라 더더욱 영향을 많이 받게되죠

2000년 초반 까지 싼 임금을 위해 공장이 밖으로 나갔다면, 이제는 직접 기술을 개발하고 만들어서 그 설계도를 팔기위해 다시 안으로 들여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이 유리한건 바로 공장들이 자기들 땅에 많이 있을뿐더러, 거대자본을 투입하기 시작하면서 가능한 결과죠 한사람이 연구할것을 10명을 투입해버리고 뚝딱뚝딱 끈질기게 연구해버리니...

더군다나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는 설계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 하나를 만들때 거기에 대해 조금씩 업그레이드를 하기위한 준비를 하기 보다 자동차에 날개를 붙여야 되나? 라고 고민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죠. 그리고 그것이 현 주소입니다

솔라님의 말씀대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해야합니다..!
하나씩 차근차근, 거창한거 말고 사소한 것 부터...

소프트웨어 뿐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역시나군요..ㅎ 완성도와 세련됨을 추구하는 문화가 필요해요..ㅜㅜ

맞아요. 모든 분야에서 박살이 나고 있어요. 한가지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LG가 배터리 시장을 점유 1등을 하기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 것 처럼 아예 맨땅에 해딩하는 정도는 아니라는 거에요. 알게모르게 조금씩 연구하고 이루려고 하는 회사들이 있죠.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회사를 발굴하고 투자를 하는 것이 저희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한 회사들이 힘빠져서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하면 완성도와 세련됨을 추구하는 그런 문화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ㅎㅎ

우리가 그 동안 쌓아온 것들이 결코 적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꽤 쓸만 한 자산이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방향만 잘 잡으면 전 어렵지 않게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말씀하신 부분이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맞아요..!
더 나은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도 힘찬 하루 보내세요!! 보팅 감사합니다 ㅠㅠ 저는 미약해서 의미가 거의 없네요 ㅠㅠ

한국은 유달리 결과에 대해서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아요.
아직은 빠른 결과를 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으니까요. 시간이 조금 있더라도 '제대로' 결과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선진국에 근접할수록 결과를 내더라도 완성도 있게 내는 것이 중요해지죠.

100% 양자택일은 아니지만 속도와 질이 어느 정도는 반비례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나 "빠르고 훌륭하게"가 동시에 가능하다고 밀어만 대는 군대식 문화가 가장 문제죠! 속도를 포기하자는 건 아니지만 "제대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문화가 자리잡길 바랍니다.

그렇죠.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빨리 하는 것의 장점을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니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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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말씀처럼 이대로 간다면 애매한 위치에 서있을거 같군요;
이미 선점해놓은 효과마저 잃을까 걱정입니다.

네. 빨리 후진국 때를 벗어야 해요..

빠르게. 완성도는 훌륭히 ~~~
쉽지않죠
모순인걸 알면서도. 그걸 요구하는 이나라 ~

욕심이죠..ㅎ
완성도가 나오려면 당연히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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