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지식密儀知識] 고래의 메타포 : 반쯤 말한다는 건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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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다나에 신화를 그린 그림이야. 아버지에 의해 탑에 갖힌 다나에와 황금빛으로 변한 제우스가 만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 촉감적인 그림이잖아. 시각과 촉감의 긴장. 그걸 우선 보면 좋겠어. 그런데 오늘 할 이야기는 고래에 대한 이야기야. 고래의 메타포.

모비딕이라는 소설이 있어. 이 소설을 보면 근대화 이후 서양인들이 고래에 대해 갖고 있는 반응이 잘 드러나. 어쩌면 우리의 반응이기도 해. 이 소설에서 하얀 고래와 그 고래를 잡으려고 하는 선장의 이야기야. 선장은 고래를 잡으려 하지만 고래는 잡히지 않아. 우리가 주목해서 볼 부분은 소설의 서술자가 묘사하고 있는 고래와 선장이 묘사하고 있는 고래야.

서술자에게 고래는 절대관념과 접해 있는 물질적 존재야.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절대성이 이 세계에 들어와 있는 존재인 셈이지.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영양을 섭취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것이 아닌 초자연적 회상을 정신적으로 즐기는 듯하다. 그래도 이 새끼고래들은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갓 태어난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한 줌의 모자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 옆에 떠 있는 어미들도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선장에게 고래는 잡아야 하는 대상에 불과해. 그는 고래와 싸움에서 한번졌었어. 그래서 형언할 수 없는 그 고래를 잡아야지만 자신의 숭고에 도달할 수 있어. 숭고라는 게 중요한데, 칸트 이후에 미학에서 중요한 개념이야. 거칠게 요약하면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신 승리. 그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거야. 즉 거대한 자연 앞에서 서면 인간은 작아지게 마련이잖아.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해 보이고 말야. 그런 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래도 난 지지 않는다하는 도취감. 이게 숭고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거라고 칸트는 말해. 하지만 그건 나르시시즘에 불과하지. 자신이 거대한 실재 앞에서 대단하다고 우기는게 가소롭잖아.

인간을 넘어섰다는 건, 인간의 언어를 넘어섰다는 거야. 인간은 언어로 대상을 표현해. 말하자면 언어를 통해 대상을 잡는 거지. 마치 선장이 고래를 잡으려고 한 것 처럼 말야. 그러나 고래가 선장에게 잡히지 않는 것처럼 실재 그 자체는 인간의 언어 속에 잡히지 않아. 언제나 빠져나가고 말아. 그럼에도 근대적 인간은 그런 잡히지 않는 고래에 대해 이겼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거야. 숭고를 느끼면서 말야. 숭고라는 느낌이 얼마나 초라한 개념인지 이젠 감이 잡히지?

그런데 여기 고래에 대한 다른 전통이 있어. 일본에서 전해 오는 전통이라고 해.

어느날 어떤 고래가 해안을 헤엄치고 있었어. 초록빛 물보라 흠흠, 새하얀 물보라 흠흠. 그렇게 노래 부르면서 헤엄치는데 해안가에 사람이 안보여. 예전에는 해안가에 사람들이 나와서 같이 놀았었거든. 그래서 연유를 알아보니 기근이 들어서 사람들이 나오지 못한다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에 대해서 삼촌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 삼촌은 사람들에게 한번 잡힌 적 있어. 마을 사람들은 삼촌을 잡아서 성대하게 치장을 해. 그리고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 이때를 삼촌은 '나는 내 몸의 귀와 귀 사이에 앉아 있었지' 라고 했어.

그런데 사람들은 삼촌을 다시 바다로 돌려 보내. 많은 선물을 줘서 다시 바다로 내 보내지.

이 삼촌이야기가 생각나서 나는 범고래에게 갔어. 범고래는 좀 사납거든. 그에게 까부니 그가 나를 막 쫒아왔어. 나는 도망 도망 가다가 해안가까지 왔지. 그리고 범고래가 나를 밀었고 나는 해안 위로 밀려났어.

마을 사람들이 나왔어. 그리고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어느새 정신을 잃었지. 정신을 차리고 나자 사람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양식에 대해 감사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들은 말했어. '굶주림으로 인한 고통을 위대한 신께서 양식을 보내어 해결했습니다. 지금부터 힘을 합쳐 고래의 신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릅시다."

나는 알았어. 내 의식이 내 몸의 귀와 귀 사이에 있다는 것을.


스팀잇이란 곳이 의도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래란 [메타포]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그걸 우린 무의식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고민해 봤어. 모비딕에 나오는 선장처럼 고래에 싸워서 이기는 존재, 숭고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존재일까. 아니면 자연의 생명력, 그로부터 오는 순수증여에 대해 춤추는 사람들일까.

고래란 역할을 하고 있는 스팀이언이나 피라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스티미언이나, 아마 놀라운 건 순수증여의 기쁨을 조금씩은 누리고 있다는 거야. 그게 중요한 거 같아. 즉 선물을 주는 즐거움을 체득하고 있는 거지. 근대의 교환에 의해, 계산에 의해 없어졌던 선물을 주는 즐거움.

이젠 다나에 그림을 위에 놓은 이유를 알겠지? 긴장을 위해서야. 고래이야기와 다나에 이야기 사이의 긴장. 그 긴장 속에 들어오는 황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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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증여에도 차등이 있나봅니다^^ 우쒸~

ps. 다나에 다리는 사진같네요.

네 그런 느낌입니다.

하하하~ 웃어도 되죠? 우쒸~

순수증여의 기쁨을 위해서, ,,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네요.

^^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래라는 게 인류 무의식에 어떤 원형을 갖고 있나 봅니다.

신화에 보면 제우스는 엮이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예요.
정말 바람둥이 바람둥이 이런 바람둥이가 없죠. 성은을 입었다고 해야할지는 몰라도..읽다보면 정말 순간 확 짜증이 몰려와요. 숨기려고 동물로 둔갑을 시키지를 않나..ㅠ.ㅠ
갑자기 옛노래의 "풍각쟁이"가 떠올라요. 제우스는 풍각쟁이야 뭐!

ㅋㅋㅋ 제우스가 한 바람둥이 했죠~~ 지금 도덕으로는 별스럽지만, 유전자는 자기 복재를 위해 개체를 이용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신화가 언뜻 이해가 되요. 그래도..^

신들의 특권이었을라나 싶기도 하네요. 신화니까.. 그렇치만 인간은 신이 되고 싶어해서리..

모든 신들, 모든 천국과 모든 지옥이 여러분 안에 있다. - 조지프 캠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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