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혁명은 없다

in #kr2 years ago

미완의 혁명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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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전의 오늘은 화요일이었다. 엽기적인 부정선거로부터 한 달 그리고 나흘. 각 지역의 고등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고 마산 앞바다에는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전쟁 끝난 지 7년. 지구상에서 가난하기로 끝에서 순위를 달렸던 나라의 학생과 시민들은 마침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일어섰다. 그리고 독재자의 권부로 치달았고 경찰은 총을 쏘았다. 피의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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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술자리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아무리 뭐라 뭐라 해도 30년 전 50년 전 60년 전 생각하면 우리는 천국에 살고 있는 거지.” 물론 경우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시각에 따라 천국의 질은 다를 수 있고 천국을 빙자한 지옥에 살고 있노라 울분을 토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 푸념에 동조하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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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그 암울한 연옥, 희망도 없어봬고 먹고 살기에 급급하며 미국 원조로 나라가 유지되던 그 시절에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네깟것들이 무슨” 코웃음치는 정상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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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은 올 수 있었다. 오늘날 미얀마 군부처럼 무기를 쥔 세력이 작심을 하고 시위대를 쓸어 버렸다면 또 다른 역사가 전개됐을 것이다. 군대가 민간인을 학살하는 보도연맹의 비극이 재연됐을 것이고, 80년 광주보다 20년 빨리 서울이 피바다가 됐을 터이며, 그 총칼에 무릎 꿇었다면 우리는 오늘 이강석의 아들의 통치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가능성. 거대한 내전이 다시 발생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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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 청년들은 무장에 익숙했다. 천만 가까운 남북의 한국인들이 무기를 든 전쟁이 끝난 지 7년이었다. 실제로 4.19 때 경찰이 총을 쏘자 도심에서 물러선 시위대는 변두리 파출소를 습격해 무기고를 털었다. 미아리 고개 쯤에서는 경찰과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분노가 무기고로 번질 때 시위는 곧 전쟁으로 화한다. 4.19 역시 그 폭발에 근접해 있었다. 당시 경찰과 군대에 쫓긴 무장대는 고려대학교로 집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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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 고려대학교를 포위한 가운데 이판사판이 된 시위대 속으로 15사단장 조재미 준장이 진입했다. 부관과 특무대장만 동행한 대담한 결단. 거기서 조재미 준장은 경찰의 총에 희생된 이들에게 정중히 조의를 표하며 시위대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발휘한 배려와 여유는 살기를 누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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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계엄 사령관 송요찬이나 조재미가 민주적 인사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둘 다 공비 토벌 당시 민간인 희생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고, 전쟁 중 만만찮은 살기를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마음 먹고 이승만 이기붕의 뜻대로 군을 움직였다면 역사는 또 한 번 바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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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완성된 혁명이 있겠는가. 프랑스 혁명이 250년을 향해 가지만 아직 완성된 것 같지 않고 러시아 혁명은 뿌리째 뽑혀 버렸으며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어났던 ‘혁명’은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채 스러져 가거나 잊혀져 갔다. 그러나 혁명은 혁명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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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꿔 본 기억은 그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더라도 잊혀지지 않는다. 자신의 미약한 팔뚝이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 자신의 행동 하나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걸 눈 뜨고 지켜본 사람들의 기억은 역사의 자산으로 남는다. 4.19를 만든 사람들도 그랬다. 62년 전 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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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격동과 역경은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더 부강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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