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결혼

in #kr7 years ago

1931년 5월 8일 덕혜옹주 결혼

우선 대마도 얘기를 좀 해 줄게. 가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며 핏대를 올리는 걸 보는데 그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말의 세 배 이상 되는 억지야. 대마도는 유사 이래 고려 말이든 조선 말이든 신라 말이든 한반도의 주류가 사용하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지배한 적이 없어. 일본의 대 한반도 전진기지이자 최전방 요새였고 워낙 산 밖에 없는 동네라 노략질을 하든 납작 엎드리든 일본보다는 조선에 기대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지만 엄연히 일본 사람들이 살아왔던 곳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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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침략 때는 고려와 몽골 군단의 침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선봉대 역할을 했으며 전쟁 후에는 양국의 화해를 위해 발버둥쳤던 (말했듯 대마도 사람들은 조선에 기대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었으니까.) ‘변방의 일본인’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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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새로운 실권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이 원하면 화친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굳이 우리가 청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지만 대마도로서는 결코 그럴 처지가 못됐고 임란 전에도 하던 버릇대로 국서를 조작해 가면서까지 화친을 끌어내려 했던 거야. 대마도는 그 이후로도 반은 조선에 반은 일본에 걸쳐 살아가던 방식 그대로 수백년을 더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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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 무역을 도맡아 한 것은 물론 쇼군이 즉위하거나 기타 경사가 있을 때 파견됐던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고 본토까지 수송하는 임무도 대마도의 몫이었어. 통신사 행렬에 접근하려던 영국인들을 차단한 것도 대마도였고 울릉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울릉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며 조선 조정을 난감하게 했던 것도 그들이었으며 일본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음을 조선에 알린 것도 대마도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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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가 몰락하고 폐번치현, 즉 전국 각지의 번을 폐하고 새로운 지방 행정 제도가 도입되면서 6백년을 이어온 소오씨 (대마도주 가문)의 대마도 지배도 끝났다. 그러나 그 질긴 인연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대한제국 황제의 핏줄 공주 덕혜옹주와 이어진다. 본토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다시 대마도의 번주(형식적이지만)가 됐던 소오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 결혼한 거야.

황제의 딸을 어찌 변방의 섬 주인에게 시집보낼 수 있느냐 하는 네 분노도 이해는 가지만 소오 다케유키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질이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고 해. <뮤지컬 덕혜옹주>에서 등장하듯 동경제대를 나온 엘리트에 시화에 두루 능했던 교양인이었으며 덕혜옹주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남편이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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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가미자카 공원에는 그의 시비가 서 있는데 그 시를 읽으면 마지막 대마도 번주 (그 뒤를 누가 이었는지는 모르나) 로서의 긍지와 애틋함이 드러난다. “섬도 야위었지만 친구도 야위었다. 물고기 조각하며 바다를 훑으나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리 말하면 친구는 웃겠으나 깊은 밤 콤파스를 잡고 대마도를 축으로 크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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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대마번주, 우리 식으로 말하면 대마도주는 역시 멸망한 나라의 황녀를 아내로 맞아. 1931년 5월 8일이었지. 덕혜옹주는 1911년 생이니까 우리 나이 스물 하나. 하지만 덕혜 옹주는 이미 마음의 병이 들어 있었어. 여덟살 나이로 엄마 품 떠나 낯 설고 말 설은 (일본인 보모가 돌봤다니 일본어도 웬만큼 했을 테지만) 고장에서 자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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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족으로 대우받기도 했지만 망한 나라 황족이란 게 거기서 거기지. 일본 국회의원의 딸은 “나같으면 독립운동을 할텐데 너는 왜 안해?”라고 묻기도 했다는데 덕혜라고 해서 그런 괴리감이 없었겠어. 독살설이 있던 아버지의 영향인지 항상 보온병을 들고 다니며 물을 마셨다니 참으로 괴로운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봐야겠다. 결혼 역시 사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억지로 짝 지워진 것이었고 그나마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처럼 해로라도 하면 좋았을 테지만 둘은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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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오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구타했다거나 강간하여 딸을 낳았다거나 하는 것은 억측이라고 해. 뮤지컬에서도 등장하지? 철저하게 덕혜를 배려하려는,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소오 마사유키의 모습이. 하지만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행복할 수 없었던 부부였다. 덕혜옹주의 병은 깊어만 갔고 소오 다케유키가 그녀와의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라고 표현할 만큼 삭막한 나날이었던 거야. 뮤지컬에서 네가 감탄을 금치 못했던 1인 2역 중의 하나인 소오와 덕혜의 유일한 딸 마사에는 자살을 예고하는 유서만 남기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건 그 절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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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에는 어머니와 거의 떨어져 살았어. 어머니에게서 배운 조선말을 쓰다가 조센징이라는 말을 들은 뒤에는 어머니를 싫어했다는 소리도 있더군. 하지만 마사에 그러니까 정혜도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면서 어머니를 의식하게 됐겠지. 그 기구한 삶과 가련한 인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고 자기가 기대고 기댈 수 없었던 어머니 말이야. 한 시대의 불운한 역사가 탄생시킨 사생아같은 자신의 처지를 재삼 인식하게 되었을 수도...... 뮤지컬 속에서 아버지 소 마사유키는 딸을 찾아 달라고 절규하지. 내 착하고 귀여운 딸이 점점 망가져 가고 있는 걸 몰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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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덕혜옹주와 소 마사유키는 한국과 일본의 황족과 귀족이라는 타이틀만 벗기고 보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행한 가족의 하나일 거야.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계속 일은 꼬이고 원치 않는 상처를 주고받고 그 상처 속에서 또 다른 고름이 솟는. 그래서 뮤지컬 <덕혜옹주>는 괜한 민족 감정 같은 거 덜어내고 볼 수 있어서 더욱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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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다케우치는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잃고 경제적으로도 궁지에 몰리면서 아내와의 이혼을 결정하게 된다. 지치기도 지쳤을 거야. 이방자 여사, 영친왕도 동의했다고 한다. 다케유키는 재혼하여 새 살림을 꾸렸지만 덕혜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이후 1962년 50년만에 귀국하여 여생을 보내게 돼.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기이한 인연이 자리잡고 있어. 영친왕 등 황족을 있는대로 일본으로 끌고가던 걸 봤던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를 서둘러 약혼시키는데 일본은 그 약혼을 깨 버리고 덕혜를 일본으로 끌고 갔단다. 그때 파혼당한 이의 형이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덕혜의 사연을 듣고 일본 정신병원에서 그녀를 만났던 거야.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호소했고 덕혜옹주는 현해탄을 건널 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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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을 때 순종비 윤씨에게는 큰절을 올렸지만 항렬상 아랫 사람들에게는 거리낌없이 절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신은 온전치 못했지만 돌아온 공주로서의 자각만은 놓지 않았던 것일까. 후일 다케유키는 한국을 방문하여 덕혜옹주를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지만 거절당해. 덕혜옹주의 올케이면서 일본인이었던 이방자 여사 역시 단호했다고 해. 하릴없이 일본으로 돌아간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보다도 먼저 세상을 뜨는데 그가 남긴 글들 가운데에는 덕혜에게 전하는 짤막한 글도 있다고 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그와 덕혜 사이가 어땠는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둘만이 알 것이지만 다케유키가 남긴 시를 보면 그의 마음의 시름과 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 조금 길지만 약간을 빼고 그대로 인용해 볼게.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은 무엇을 떠올릴 것이 있어 떠올릴까.
날밝는 것도 아까운 밤 굳게 먹은 맘이 흔들릴 것인가.
꽃이 아름답게 핀 창가에 등을 대고
썼다가 찢어버린 당신에게 보낸 편지 조각인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로 생각할 정도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두릅나무의 새순이 벌어지는 아침.
옷이 스치는 소리의 희미함과 닮아있다.
떡갈나무 잎에 들이치는 소낙비와 함께 저물었다.
사람이란 젊었거나 늙었거나
애처러운 것은 짝사랑이겠지.
지금 감히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늙기 전의 탄식이라고 해두자.
이 세상에 신분이 높건 낮건
그리움에 애타는 사람의 열정은 같을 거야.
그래도 대부분은 식어버리겠지.
새벽 별이 마침내 옅어지듯이.
빛 바랠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없는 사람이여.
(중략)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 칠석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동그랗고 달콤한 연꽃씨를
눈물과 함께 먹는 것은 재미가 없다.
연꽃 씨의 주머니가 터지는 것 처럼
내 마음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
근심이 있더라도 마음을 찢기는 일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겠지.
나의 탄식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내 몸도 또 언젠가는 죽어가겠지.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 바.
수많은 여자 가운데서
이 한사람을 안쓰럽게 여겨주실수 없는지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산은 낮은 곳에서 올려다 보고
바다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거라고 생각하여
어느 날 후지산 꼭대기에 올라
쯔루가의 여울이 빛나는 것도 내려다봤다.
또 어느 날은 파도치는 해변가에 나와
하늘을 가는 구름을 올려다 보았다.
그렇지만 마음은 달래어 지지 않고 바위를 끌어안는 것처럼
애처로운 가슴을 쥐어뜨는 것 같았다.
개미가 모여드는 계곡의 깨끗한 물을
손으로 퍼올리는 사람은 그 맛을 알고 있겠지.
높은 산 봉우리 봉우리에 피는 꽃 향기는
볼을 가까이 대야지만 비로소 맡은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너를 만나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내세를 기약할 수 있을까.
환상은 마침내 환상에 지내지 않으며
꿈은 꿈으로 깨어나지 않을 뿐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별것 아니야.
죄라고 해도 좋아. 벌도 받지 뭐.
유괴도 좋고 함께 도망을 갈 수도 있어.
함께 죽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뿐인 생명을 받았다.
이 세상을 감히 저주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미 미쳐버렸는가. 아니 아직 미치지 않았어.
지금 내리기 시작한 것을 싸라기 눈인가.
무거운 짐차를 끄는 사람은
가끔씩 쉬면서 땀을 훔친다.
얼마간 돈이 생기면
맛있는 술로 목을 축이겠지.
역에 내려 선 사람들은
각각의 걱정거리를 가슴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묵묵히 여기 저기로 흩어져 간다.
집에는 불밝히며 기다리는 아내가 있으니까.
거리에서 광고하는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애처롭다.
볼에 빨갛게 연지를 칠하고 거리에 서서.
간판을 걸치고 손짓발짓으로 손님을 청한다
되돌아 나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어린 여학생의 무리는
내게 가벼운 인사를 한 후 느닷없이 명랑하게들 웃더니
무리지어 화려하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한숨 휴식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남모르는 죄를 진 사람이
정해진 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정처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
봄이 아직 일러 옅은 햇볕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만 겨우 따뜻한 때.
깊은 밤 도회지의 큰 길에 서면
서리가 찢어지듯 외친다. 아내여, 들리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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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선택을 거부하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타에 의해서 철저히 침몰한 삶을 두고
무어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냥 우리의 흑역사라고 묻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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