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열적은 국군의 날
1950년 10월 1일 국군의 날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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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다. 요즘에사 국군의 날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국군의 날은 엄청난 기념일이었다. 여의도 광장은 완전무장한 보병들의 기계같은 행진으로 메워졌고 국군의 위용을 과시할 최신형 무기들이 그 뒤를 따랐으며 하늘에선 오색 구름 찬란한 편대 비행과 낙하 시범이 이어졌다. 국군의 날이 신났던 것은 그 볼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10월 3일 개천절, 10월 9일 한글날에 간혹 추석과 일요일이 겹치면 황금보다 더 값진 연휴가 화려하게 펼쳐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국군의 날이 10월 1일이 된 것일까. 도대체 무슨 날이기에.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이 유래를 대개 안다. "국군이 최초로 북진을 전개한 날"이다. 동부전선에서 육군 3사단 23연대 3대대 10중대가 38선을 돌파하여 양양에 진입한 것이다.
육군 3사단이라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부대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학도병들을 포항에 놔두고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이동했던 김승우가 소속된 부대가 3사단이었고 영화 <고지전>에 등장하는, 아군을 쏘아죽이고 살아남은 트라우마를 지닌 것으로 설정된 악어 중대 역시 그 전투지가 '포항'이라면 3사단일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10사단은 국군 편제에 없다)
그만큼 많은 희생을 치른 부대였고 "꽃같이 별같이" 사라져간 동료들을 생각하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38선을 넘어서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3사단 23연대장은 북진 1호를 빼앗긴다면 연대원 앞에서 자신이 배를 갈라야 할지도 모른다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3사단이 별나게 용맹하여, 그리고 자랑스러운 선봉으로 38선을 '돌파'했던 것은 유감스럽게도 아니었다. 이들은 어떻게 38선을 넘어서게 된 것일까.
환도 기념식에서 만난 맥아더에게 이승만은 북진을 호소했으나 "아직 권한이 없다"고 거절당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맥아더는 "좋긴 한데 10월 1일날 항복 권유를 할 예정이다. 그 뒤에 하자."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승만은 이렇게 되받았다고 한다. "사기충천한 현지 부대가 사고를 쳐도 이해하시오!" (신동아 2006년 6월호) 전쟁 이래 당할 대로 당한 터라 국군의 복수심과 사기가 드높기는 했지만, 미군의 허락 없이 한국군이 자력으로 38선을 넘을 수는 없었다. 그저 38선 앞에서 혀 내미는 인민군에게 감자나 먹일 밖에. 그런데 일찍이 도망 하나는 기막히게 잘 쳤던 노대통령이 결기를 세운다. 9월 29일 군 수뇌부 회의에서 이승만은 그 후 60년 동안 툭하면 우리 사회에 던져지는 질문 하나를 던진다.
"님자들, 군 통수권자가 나 리싱만인가 아님 맥아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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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즘 민족주의자들이 들으면 기립박수를 칠 명언이 이어진다. "UN이 우리의 통일을 막을 권리가 없어. 나는 국군을 북진시킬 생각이야. 어떻게들 생각하나?"
이에 참모총장 정일권이 대답한다. "작전권이 UN군 사령관에게 있기 때문에 이중의 명령은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UN의 결정을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이승만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지만 정일권은 이렇게 말을 이음으로써 노여움을 피한다. "이건 군사적인 견해고, 각하께서 북진을 명하시면 복종하겠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내가 미국을 위해 죽도록 싸웠습니다."라고 자랑하는 간첩 같은 관료나 "미국은 우리의 아버지"라는 정신 나간 목사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승만은 만(晩)자 명령서를 들이민다. “북진하라.”
이 명령을 받은 사단장이 몸소 짚차에 타고 38선을 넘으며 돌격을 부르짖고 휘하 장병들이 “우리들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노래를 목메어 부르면서 성큼성큼 행군했다면 좋았겠는데 또 사정은 그렇게 여의치 않았다.
9월 30일 38선에 진출해 있던 육군 1군단장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나 참모총장인데, 혹시 38선 북쪽에 ‘어느’ 고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아군이 진격하는데 큰 손실을 ‘입게 될’ 고지가 없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즉 질문은 미래형이었다. 이 철저하게 미래형의 질문 앞에 군단장이 대답한다. “3사단 앞에 하조대라고 그럴 만한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득달같이 미 8군 사령관에게 달려간 정일권 참모총장은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했다. “제3사단이 38선 바로 북방에서 적의 치열한 사격으로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부득이 고지를 점령하여야겠습니다. 38도선에 기하학적으로 뚜렷한 선이나 장벽이 있는 것도 아니니 문제 없을 겁니다." (국방일보)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이를 승인했고, 정일권은 강릉으로 날아가 이승만의 명령서를 들이민다. 그 연후에야 10월 1일 새벽 3사단은 38선을 ‘돌파’하는 것이다. 이미 넘어간 작전 지휘권을 거스르지도 않으면서 이승만의 자존심도 살리는 좋게 말하면 양수겸장, 좀 비틀어 말하면 꼼수였다.
솔직히 나는 왜 이 날이 국군의 날인지 모른다. 살수대첩일도 아니고 귀주대첩일도 아니고 청산리대첩일도 아니고 광복군 창건일도 아니고 국방 경비대 창건일도 아니고, 약간의 꼼수까지 써서 38선을 넘어간 날이 왜 우리 국군 최대의 기념일이 되었는지 나로서는 흔쾌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게 그렇게 의미가 있다면 있는 것이니 캐묻지는 말자. 60년이란 없는 의미도 만드는 세월이니까.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명문이네요.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저는 국군의 38선 돌파라는 의미를 부여해서 기념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 명령권의 한계로 이후 조치들이 꼼수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시선을 차이 아닐까요^^
디테일한 사실을 기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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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럼 하다못해 파로호 전투라든가 백마고지 승전일을 기념할 수도 있었을 거 같아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