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을 만큼 강한, 이길 수 없을 만큼 약한

in #kr3 years ago

지지 않을 만큼 강한, 이길 수 없을 만큼 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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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홈랜드>의 마지막 시즌을 보고 있다. 제목도 그렇고 처음에는 미국 만세나 미국인만을 위한 휴머니즘이 넘치는 내용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를 두고 "9.11이후 온 나라가 미쳤다."고 뇌까리는 CIA 요원들이 미국과 중동과 유럽을 무대로 스파이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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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거기엔 영원한 적과 동지가 없다. 완전히 나쁜 놈도 없고 주인공도 정의롭지는 않다. 상대적으로 불균형할지언정 테러리스트의 항변도 곧잘 들리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얼마나 냉정한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드라마적인 과장과 어이없는 설정은 간간이 보이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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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는 CIA의 동지였고 미국의 아프간 침공 이후로는 줄기차게 미국과 싸워 온 하카니라는 탈레반 수장이 등장한다. 그는 CIA와 미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서 쳐죽이고 싶은 테러리스트였다. 간 크게도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관을 습격하여 수십 명을 죽여 버린 '극악무도'한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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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도 끝없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평화 협상에 응한다. CIA 출신의 국가안전보좌관 사울 배런슨은 자신의 부하들을 비롯 , 수많은 생명을 빼았던 하카니와 평화를 논하게 된다. (물론 미국인들은 그 몇 배를 죽였을 테지만) 위에서 얘기했듯 그들은 소련 침공에 맞설 당시에는 동지였다.
그러나 하카니의 젊은 아들 잘랄은 이에 반발했고 아버지를 암살하려 들다가 발각된다. 그때 하카니는 "우리는 강하다."는 아들에게 이렇게 절규한다. "우리는 절대 지지 않을 만큼만 강할 뿐이다. 또 우리는 절대 이기지 못할 만큼 약할 뿐이고."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1980년이니 30년이 넘도록 싸워 온, 온 인생이 투쟁으로 그득한 전사이자 테러리스트의 말이 귀에 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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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을 만큼 강하기도 어렵지만 이길 만큼 강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악조건 속에서 버티고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들은 존경스럽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강하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박멸하지는 못할 만큼만 약한' 막강한 적에게 승리할 수 있는 주객관적 조건을 갖추고, 그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은 그저 부러운 일이다. 더하여 승리를 유지하고 지켜나갈 수 있는 능력은 말할 나위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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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지지 않을 만큼은 강했던" 역사는 우리에게도 풍성한 듯 싶다. 그런데 "절대 이기지 못할 만큼 약했던" 기억 또한 조촐하지는 않다. 드라마의 결말이 궁금하구나...... 이미 아버지 하카니는 아들의 배신과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 아프간 정부군에 체포돼 목숨을 잃었다.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오늘 밤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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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2002년 도로폭보다 더 넓은 개조장갑차로 갓길에 두 여학생 효순이미선이를 깔아버린 미군들....

무죄판결을 받고 씩 웃어버린 그 재판이 생각 납니다.
박노자씨는 그 때 그 미군의 웃음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포격으로 터져 죽은
수많은 중동의 효순이미선이의 부푼 배가 떠올랐다고 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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