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유 노'의 기억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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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게 된 외국인 여행자들 중 절반 이상은 김정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이름을 정확히 모르는 이들은 '그 있잖아! 북한! 뚱뚱한! 이상한 헤어스타일!'하고 호들갑을 떨며 내 입에서 그 이름 '김정은'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렸다. 대부분이 그의 헤어스타일과 뚱뚱한 몸을 조롱했는데, 그들에게 김정은은 그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괴짜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떤 덴마크 여행자는 김정은의 '은' 발음이 재밌었는지 연신 '김정, 응! 김정, 응!'거리며 똥 싸는 흉내를 냈다. 이들에게도 '응' 소리의 느낌이 '똥'과 연결되는 걸까. 아무튼 그에게도 김정은은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웃긴 헤어스타일을 한 뚱뚱한 김정은에 대한 이야기는 나아가 김정일, 핵미사일 실험, 전쟁과 같은 당연한 레퍼토리로 흐르기도 했다. 누군가는 김정남 피살 사건의 전말을 궁금해했고, 또 누군가는 위키피디아를 뒤져가며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맨 이야기까지 했다. 그는 미국 사람이었는데 위키피디아 '김정은' 항목은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며 두 눈을 반짝였다. 정말 정말 흥미진진하다나?

2016년과 2017년에 외국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국적과 관계없이 대부분 '도날드 트럼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미국은 미국인지라, 그의 등장은 전 세계 여행자들에게 큰 이슈였으니까. 미국 여행자들 중에는 안 마시던 술을 퍼마시거나, 크게 한숨을 내쉬거나,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여행자들이 그 절망에 공감했다. 2016년에 도날드 트럼프만큼이나 유명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게 된 외국인 여행자들은 대부분 "아, 너희 대통령 뉴스 본 적 있어."라며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지를 물어댔다. 설명해주다 보면 그들은 대부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트럼프 이야기를 하다가 안 마시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미국인 알라나는 '대통령이 친구에게 조종당했다는 거야?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대통령 스스로 의도한 것이라는 거야?'라고 물었는데, 이것도 저것도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며 정말이지 자괴감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날 우리는 제 나라 대통령을 안주 삼아 꽤나 많은 술을 마셨다. 아무튼 제 나라를 떠나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여행자들도 여전히 세상 속에 있고, 궁금해하며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고 있다는, 그런 말이다.

9년 전 터키를 여행하고 있었을 때, 이스탄불의 숙소로 향하는 길에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골동품 상점이 하나 있었다. 구경이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한 시간 넘게 사장 할아버지에게 붙잡혀 일장 연설을 들었던 일을 계기로 그 상점 사람들은 나를 친구로 여겼는지 - 호구로 여겼을 수도 있고 - 내가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들어오라고 손짓에 발짓에 성화였다. 유명 관광지의 골동품 상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하루를 통째로 반복하고 있는 듯 나른한 표정의 가게 주인과 심드렁한 시선을 던져두고 그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 어두침침한 공기 중을 떠도는 먼지 냄새, 가게 안을 가득 채운 비슷비슷하게 생긴 알록달록한 물건들, 그 모든 뻔한 것들 가운데 새로울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어짜 낸 낯선 것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들의 초대에 몇 번 응했지만, 아메리칸 인디언처럼 생긴 한 직원의 느끼한 표정과 말투에 마지막 남은 동기마저 사라져 버렸고 결국 그 앞을 지나지 않기 위해 매번 머얼리 돌아가는 길을 택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집요함도 집요함이지만 그냥 지나쳐 버리면 될 것을 나도 참.

여하튼, 노인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줄곧 늘어놓던 이야기는 제국의 찬란한 역사에 대한 것이었다.

"두 유 노 오또만?"

이 짧은 질문을 시작으로 그는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었던 보물상자라도 되는 듯 낡은 상자를 하나 가지고 오더니 수 십 점의 세밀화를 내게 꺼내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게 이 그림을 팔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친구가 필요한 것인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것 좀 봐! 정말 정교한 그림이지? 이게 다 오또만 제국 시절의 그림들이란다! 아! 오또만! 아름다운 제국!' 나는 물건을 팔기 위한 장사꾼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와'거리며 대충 환호하다가 이내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때는 '너 오또만 제국 알아?'라는 이 질문이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가장 많이 듣게 될 질문 중 하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장사꾼의 언어가 아니었고, 내 나라 역사에 대한 진심이 담긴 경외와 찬탄이었던 것 같다. 더불어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의 어떤... 그런... 애티튜드? 그리고 그것은 내가 만난 대부분의 터키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탁심 네비자데 거리의 한 펍에서 먹고 마시며 미친 듯이 춤을 추다가 만난 여자애조차도 '야! 너 아야소피아 가봤지? 아... 아야소피아는 정말이지! 아야소피아는 우리의 자랑이야! 제국의 관용을 상징하는 위대한 건축물이지!'라며 제국과 그의 업적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으니!

'두 유 노 오또만?' 만큼이나 자주 들었던 질문은.

"두 유 노 아타튀르크?"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가 내가 아는 '케말 파샤'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은 친구의 설명을 듣고 알게 되었다. 누구는 제국에 대한 자긍심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공화국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다. 쿠르드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 터키에서는 눈이 닿는 곳 어디에나 빨간색 국기를 볼 수 있었다. 딱히 기념할만한 일이 없어도 그냥 달아 놓는다. 공화국 선포 동시에 전국을 국기로 도배할 기세로 국기를 찍어댔다는데, 제국 시절에 솥 만들던 사람이 공화국이 선포되자마자 국기 만들기로 전업하여 전설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알만 하다. 아주 일상적으로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말을, 그리고 그에 대한 동의(?)를 - 잘 모르더라도, 약한 긍정이라도 - 구해오는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봐, 너희 나라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단 말이야... 국제무대에서 어떤 '확실한' 정체성을 갈망하는 그들에게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터키를 여행했던 것이 벌써 9년 전이니 술탄이 지배하던 시절의 강력한 이슬람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듯 보이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새로운 정책 아래 그 모든 것들을(?) 겪어내고 있는 '지금의' 터키 사람들이 아직도 외국인들에게 '두 유 노 아타튀르크?'라고 묻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아무튼 신기했다. 그들의 질문은 말하자면 두 유 노 김치도, 싸이도, 치맥도, 아! BTS도 아닌, '두 유 노 조선 다이너스티?', '두 유 노 킹 세종?'과 같은 것이란 말이다! 내가 외국인에게 물어본 '두 유 노'는 뭐가 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두 눈을 반짝이며 코리아에 대해 썸띵을 아냐고 물어본 일이 없나 보다. 아마도.

아, 그러고 보니 터키 축구리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자꾸만 다짜고짜 응원하는 팀을 하나 고르라고 해서, 갈라타사라이, 베식타시, 페네르바체 따위의 이름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때 내가 어떤 팀을 골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쿠르드 애랑 터키 애가 서로 자기 팀 고르라고 소리소리를 질러댔던 일은 기억난다.

아, 또, 그러고 보니 작년에 외국에서 많이 받았던 질문은 '너 BTS에서 누구 좋아해?'였는데, 나는 그때 BTS가 '방탄소년단'의 줄임말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문제적 남자'를 통해 랩몬스터가 그 그룹의 리더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하지만, 제작자인 방시혁의 랩은 20번 넘게 들었다. 데헷. 좀 비슷하게 따라할 수도 있다.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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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여행을 많이 다니시나봐요~ ㅎㅎ 팔로우하고 가요~

그냥 여기도 살고, 저기도 사는 사람입니다. :) 감사해요! 저도 팔로우하러 갈게요!

해외에 나와 있다 보면 우리가 살던 세상에 대한 뜻하지 않은 관점을 만날 때가 많죠. 트럼프 당선될 때 미국 친구들이 울었던 게 기억납니다. 나라를 잃은 양 진심으로 울어서 좀 당황스러웠죠. 한 친구는 이후 sns를 분노에 가득찬 포스팅으로 도배하더니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네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터키인인 한 친구는 프랑스도 싫고 터키도 싫다면서 중앙아시아로 떠났지요. roundyround님이 보고 듣고 겪으신 얘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하하하하하. 그 터키 친구는 투르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중앙아시아로 떠난 것이 아닐까요!? @kimthewriter 님 말처럼 여행하다 만나는 새로운 생각들이 여행의 재미를 만드는 것 같아요. :)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하루에 한가지 소원만을 들어주는것처럼
짱짱맨도 1일 1회 보팅을 최선으로 합니다.
부타케어~ 1일 1회~~
너무 밀려서 바쁩니다!!

짱짱맨 태그가 달린 글마다 하나하나 보팅에, 리플까지 그 정성의 크기는 도대체 상상할 수도 없네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 짝짝짝!!

터키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이랑 성향이 비슷한가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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