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룸 9. <블랙 스완>, 너를 가두는 건 너다

in #kr8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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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room.9 (film)


<블랙 스완>, 너를 가두는 건 너다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블랙 스완>은 '백조의 호수' 공연 대미를 장식할 ‘스완 퀸’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백조여왕을 꿈꾸는 니나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이들의 열망을 그려낸다.

앞서 필자는 많은 어지러운 글들로 ‘자각하라’ 홀로 외치고 있었지만, 사실 그러한 행위들은 이 영화 앞에서는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만큼 이 작품이 우리의 외면을 벗겨내는 힘은 강력하다.

이 독특한 영화는 ‘백조’와 ‘흑조’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것에서부터 더럽고 저열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묻어있다. 그러나 ‘백조의 호수’ 공연을 완성하기 위해선 백조와 흑조 모두가 꼭 필요한 것처럼, 이들은 이질적이지 않고 ‘완벽’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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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검음'에 도달한 반타 블랙. 지금까지 인간인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검정색이다. 그러나 어딘가 낯설다. *사진 : 나무위키, 반타 블랙

1. 거울 그리고 완벽


인간은 분자 구조를 조작해 빛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완벽한 검음’을 얻었다. ‘반타 블랙’이라고 알려진 이 검은색은 너무 검은 나머지 공간에 구멍을 뚫어버린 듯한 착시효과까지 일으킨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검은색을 보고 먼저 완벽하다는 느낌보다는 이상하다거나,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왜일까? 세상의 어떤 검은색보다도 검은데 말이다.

우리가 반타 블랙에 이질감을 느끼는 까닭은 그야말로 ‘검음’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검은색의 전형은 ‘그림자’다. 사실 그림자는 완전한 검은색이 아니다. 그림자가 비친 물체 본연의 색깔의 가장 어두운 ‘빛깔’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검은색들은 대개 검지만은 않다. 가령 검은색으로 칠해진 고급 세단에는 검은색 위로 비치는 광택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어떤 검은색은 그리 검지는 않지만 주위가 밝기 때문에 검게 보인다. 즉, 검은색은 상대적인 것이 함께 있을 때 가장 검은색답다.

완벽은 단일한 것, 순도 100%의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언급했듯 지나침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가령 용기가 지나치면 ‘무모함’이 되고, 용기가 모자라면 ‘비겁함’이 되듯이 말이다.

극중에서 토마스(뱅상 카셀)가 니나(나탈리 포트만)에게 ‘백조는 완벽하지만 흑조로서는 부족’함을 계속 설파하며 아쉬워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순수함과 고결함도 그 이면의 타락과 부정이 있을 때 완성된다. 완벽한 선의는 그에 대응하는 악의가 있을 때 진정한 빛을 발한다. ‘백조의 호수’ 속 ‘스완 퀸’은 그 정점이고, 백조만큼이나 악랄한 흑조가 대비되어야 비로소 완벽한 순수를 맛볼 수 있다.

<블랙 스완>에서 자주 등장하는 ‘거울’의 이미지는 그 상대성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재료다. 거울에 비친 모든 이미지는 본체를 그대로 투영하기도 하지만, 그 방향은 반대가 된다. ‘이쁜이(Sweet girl)'로만 자라온 니나에게 흑조의 그 무엇은 없다. 타인이 원하는 모습, 엄마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라온 니나에겐 저항이나 성인으로서 주체성 따위는 결여돼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라온 니나가 뒤늦게 흑조의 모습을 자기에게 투영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니나는 ’흑조의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나는 곧 흑조를 직접 보게 된다. 같은 발레단 소속의 릴리(밀라 쿠니스)의 발레는 서툴지만 마음가는대로 행하는 무엇이 있다. 토마스 역시 니나가 릴리의 그런 점을 본받길 원한다. 사실 극중에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토마스는 니나에게 흑조를 보여주기 위해 릴리를 의도적으로 접붙였을지도 모른다. 토마스는 이미 니나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어떤 저항성, 흑조를 봤기 때문(특히 니나가 토마스의 입술을 깨무는 장면에서)이다.

흑조를 지배하는 근간은 자유, 그리고 원하는 것은 얻고야마는 열망이다. 니나는 그녀의 대역을 맡은 릴리를 통해 위기에 처한 열망에 '질투'라는 생명력을 부여하고, 릴리와 함께하는 순간은 니나의 내재된 성적 자유를 깨우며 타자성의 굴레조차 복속시킬 수 있는 저항력을 부여한다. 이처럼 릴리는 니나의 거울로서 철저히 흑조의 본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릴리와 엮이게 되는 순간부터 니나의 거울은 조금씩 변화를 보인다. 움직이지 않는데도 고개를 제멋대로 돌리는 거울 속 ‘또 다른 나’처럼. 오롯이 비추는 대상을 따라해야할 거울 속 이미지가 마음대로 행동한다. 물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니나의 심리작용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니나의 자아를 상징하는 거울은 이미 ‘변화’한 것이다.

니나를 거울에 비추면 백조 한 마리가 투영될 뿐이었다. 하지만 릴리에게서 전염된 흑조의 근원은 그녀 거울-자아 속에 흑조를 비추게 만든다. 즉 한 사람에게 백조와 흑조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니나의 백조는 대칭점인 흑조를 얻음으로써 완벽에 가까운 순수를 얻게 될까? 그건 아니다. 니나의 흑조는 여전히 거울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니나의 몸속에 봉인된 흑조는 니나의 피부를 뚫고 나오지 못한다.

내재된 억압은 현실의 표피를 뚫어야만 비로소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순간, 백조와 흑조를 마음대로 불러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완벽’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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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억압은 니나의 자아를 가두는데 일조한다. *사진 : 다음 영화 <블랙 스완>(2011) 스틸 컷

2. 나를 가두는 감옥들


니나의 자아는 뒤늦게 본연의 자유를 갈망하지만 내면에 자리 잡은 ‘흑조’는 니나의 피부를 뚫고 나오진 못한다. ‘나’라는 존재가 내 몸속에 고여 있는 존재라면, 우리의 외피를 이루고 있는 피부는 남에게 보이는 전부다. 즉 니나의 자아가 피부를 뚫고 나오지 못함은 그녀의 자아가 타인의 시선 혹은 억압을 뚫어버릴 만큼 강하지 않다는 방증이 된다.

극중 니나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이쁜이’일뿐이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리하는 ‘대리자’일뿐이다. 그녀는 오롯이 그녀의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행해왔으며, 그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세뇌 당해왔다.

이를 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 등장하는 ‘초자아(super ego)' 개념이 떠오른다. 초자아는 아동기에 부모를 향한 성적 열망을 대신하며 그 이상을 충족하도록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독특한 무의식 영역을 이룬다. 이때 초자아는 부모 그 자체보다 그 부모가 가지고 있는 초자아를 더 따르게 되는데, 니나가 백조의 호수 공연 속 ’백조 여왕‘이 되고자하는 열망도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극중에서 알 수 있다.

초자아의 기준에서 나쁜 것으로 간주되는 행동들은 애정의 결핍, 혹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준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워 죄책감과 같은 감정은 우리를 통제하기에 이른다. 이때 우리 안에 내재된 본연의 본능들은 억압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이상을 위해선 우리 자신은 파멸해야할 대상이 되고, 공격성을 억제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억제된 공격성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다.

니나에게 초자아를 이루는 이상적인 목표는 그의 어머니가 니나를 임신하면서 얻지 못했던 ‘완벽한 백조 여왕’이 되는 일이다. 완전한 순수와 고결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삶은 철저히 통제된다. 허나 앞서 말했듯 완벽한 백조 여왕은 그 이면의 흑조가 있어야만 완성된다. 그런데 니나의 초자아는 완벽한 백조 여왕을 추구하면서도 니나 내면에 있는 ‘흑조’를 박멸할 것을 명하고, 흑조를 얻지 못한 니나의 백조는 완성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는 초자아가 스스로의 완성을 위해 안정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과정에서 그와 배척되는 요소들을 방어함으로써 생기는 결점들, 그로써 결국은 완벽해질 수 없는 모순에 빠지는 속성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지만, 완벽해질 수 없다. 그것이 니나의 정신을 점점 오염시킨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완벽을 추구하면서도 완벽을 억제하는 자기 자신, 흑조를 꺼내 보일 수 없도록 통제하는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니나는 비로소 ‘항명’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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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내면의 흑조가 깨어나는 니나. *사진 : 다음 영화 <블랙 스완>(2011) 스틸 컷

3. 너를 가두는 건 너다


극이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부에서 니나는 어머니에게 정면으로 대적한다. 그리고 니나의 흑조는 피부를 뚫고 검은 깃털을 내보인다. 다리는 꺾이고, 한 마리 흑조가 금방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 잉태된다.

그리고 마침내 니나는 흑조를 가두고 있던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이쁜이’의 방안에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인형들을 모두 버리고, 어머니의 이상을 좇아 그렸던 자신의 어릴 적 ‘자화상’들을 모두 뜯어내버린다.

니나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연 당일 기어코 나가 자신의 흑조를 앗아간 릴리를 발견한다. 더 정확히는, 릴리에게서 흑조를 빼앗아버린다. 니나는 전신거울을 부수고, 그 파편으로 릴리를 찌른다. 이것은 니나의 자아(거울)을 해방시키고 그 자아로 흑조를 흡수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이제 방해될 것은 없다. ‘완벽한 스완 퀸’이 되는 일이 남았을 뿐.

니나는 본 공연에서 이제껏 보지 못한 온전한 흑조를 연기해낸다. 그것은 마치 진짜 ‘흑조’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는 것처럼 생경하다. 그리고 대망의 백조 여왕의 죽음이 이뤄지는 마지막 장에 앞서 니나는 자신이 죽인 줄 알았던 릴리의 축하인사를 받는다. 어떻게? 죽였던 릴리가 어째서 다시 살아나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걸까?

마침내 니나는 거울 파편으로 찌른 것은 릴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다. 완벽한 백조 여왕이 되기 위해서 그녀는 감옥 같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흑조를 연기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흑조의 본성을 억압하려드는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했다. 그렇게 흑조는 완성되고, 흑조가 완성됨으로써 백조 여왕의 순수도 완결된다.

“난 완벽했어.......”

니나는 ‘my little princess'를 연발하는 토마스 앞에서 피를 흘리며 말한다. 난 완벽했다고. 그러나 결국 그 자신을 잃는다. 백조로서 완벽했을지 모르나, 자기 자신이 죽음(이후에 실제로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알지 못한다)에 이름으로서 끝끝내 완전하지 않다.

니나의 끝이 결국 죽음의 이미지로 마무리 되는 것은 그 이상의 종착점이 니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리라. 어쨌거나 니나가 완벽에 가깝게 연기한 것은 극중에서 줄곧 토마스가 원한 모습이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니나는 자신의 완벽한 연기를 위해 자신을 옥죄던 굴레들을 파멸시켰다. 더 정확히는 그런 굴레에 옴짝달싹못하고 굴종하는 ‘나’조차도 부숴버린 것이다.

우리를 정의하는 것들, 타자성의 굴레들은 지금도 우리를 멋대로 정의한다. 특히 그 굴레는 ‘~니까’라는 어미로 우리를 속박시킨다. ‘너는 학생이니까’, ‘너는 직장인이니까’, ‘너는 나이가 많으니까’ 등등. 이 타자성의 굴레는 붙이려고 한다면 무한히 우리를 억압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선에 따라, ‘그런가, 나는 그러니까 할 수 없는 건가’라고 자기가 자신을 구속해버린다.

사회 속에서 이러한 굴레들을 개인이 부술 수는 없다. 이 모든 굴레들은 정교하게 조작된 사회장치의 한 부분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열망을 향할 때 그러한 굴레들을 ‘거부할 수 있는 강한 나’를 가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그 방해하는 일들에 굴종해버린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블랙 스완>은 그렇게 타자성의 표피 속에 갇혀버린 ‘나’들을 파멸시킬 것을, 그래서 진정한 나의 완벽을 얻으라고 외치고 있다.

너를 가두는 건 너다.

우리의 열망과 욕망에 솔직해지자. 그리고 우리의 긴 인생에서 나만의 흑조를 얻자. 그래서 나의 밝음도 더 밝아지도록, 진정한 나를 얻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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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영화 볼까말까 했었는데 봐야겠어요 :)
팔로우 +보팅하고 갑니다.

네 추천드립니다!
자주 들러주세요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 거울을 직접 비춰 보기 보다는
여러 각도로 비춰 보면서 알아 가면 덜 아프게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니나가 자아를 찾기 위해서 아파했던 장면들이 떠오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하고 그 면모들을 받아들이는 것 만큼 나 자신을 깨달아가는데 좋은 방법은 없겠지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입니다. 앞으로 더 볼거지만 지금까지 여러번 봤던 영화예요. 저는 예술혼을 불사르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ㅋㅋㅋ제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완벽한 경지의 예술을 위한 예술가들의 집념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들었습니당..완벽한 백조와 흑조가 되고 싶어서 주변 인물들을 왜곡하고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자신만의 흑조를 만들어내고..결국 완벽함을 보여주고 스스로 만족.. 흑조는 그 동안의 자신을 모두 버리고 스스로를 파괴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저도 공감합니다..ㅎㅎ그리고 흑조는 관능적인 여성이 되어야했기에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려고하고 성에 탐닉?하고..뱅상카셀을 유혹하고 경쟁자로부터 뺐고..이 모든게 완벽함을 원하는 그녀의 성격 혹은 예술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역시 보이는대로만 보는 사람입니다...ㅋㅋㅋ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당~!

말씀해주신 것처럼 이 영화 에서 니나가 자아를 찾는 과정엔 두 가지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지요.

  1. 니나는 오직 '완벽한 백조 여왕'이 되기 위해 흑조를 깨우려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진정 내면에 갇힌 자신의 흑조를 깨우고 받아들이게 된다.
  2. 니나가 흑조를 깨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역시도 '완벽'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통제였다. 결국 니나는 자신을 옥죄던 완벽주의 내지는 초자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저는 전자에 중심을 두었고, 무지개님은 후자에 중심을 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어느 쪽을 선택해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데 무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후자 쪽이 더 소름 돋는군요! 두 번째 방향의 해석도 해보고 싶지만 이 글이 뇌리에서 사라질 무렵(?)까진 기다려야겠습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영화를 볼 당시에는 제가 어리기도 했고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이게 무슨 소린지 벙 쪘다가 클라이맥스의 발레부분에서 넋놓고 감상했던 기억이 있네요.. 이렇게 자세한 분석글을 읽으니 제가 같은 영화를 봤는지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입니다 ㅠㅠ..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어요!

좋은 영화는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점들이 발견되곤 하지요 :) 저 역시 니나의 피날레는 언제 봐도 소름이 돋습니다!

제 안의 흑조를 인정하고 타협하는일, 협상하는 일을 그쳐선 안되겠네요 ! 감사히 보고 갑니다 :)

내 안에 잠재된 욕망과 솔직하게 대면하는 것도 자아를 찾는데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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