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룸 12. <남한산성>, 평온한 절망 속에 몰아치는 모순의 설전
<남한산성>, 평온한 절망 속에 몰아치는 모순의 설전
'굴' 같은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인조의 조정. *사진 : 다음 영화 <남한산성, 2017> 스틸컷
1. 지독한 겨울의 이미지로 그리는 소리 없는 절망 : 이미지와 서사로부터
겨울의 소리 없는 묵직함을 정면으로 바라본 일 있는가. 눈 밟는 바스락 소리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설원 속에서 온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떨어지는 함박눈을. 비명 하나 없이 생명이 멈추는 겨울의 시간 속, 아마도 우리는 지극한 평온 속의 절망을 느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해 남한산성은 몹시 추웠다’는 문구와 함께 겨울의 이미지를 밀고 들어오는 <남한산성>의 첫 장면은 그 자체로도 상징적이다. 겨울은 지극한 평온이지만 생명이 멈추는 계절이며, 뭇 살아있는 것들이 웅크리는 계절이다. 병자호란이라는 겨울에 놓인 인조의 조정 역시 한없이 웅크리기 위해 굴 같은 남한산성의 성문을 열고 들어온다.
절망적인 역사를 다루면서도 이 영화 속에 절망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단지 고립된 성안에서 혹독한 추위에 마주친 사람들을 날것으로 중계하는 것만으로도 절망은 충분히 전달된다. 신음하는 사람이나 비명 따위가 없어도 영화는 이미 절망으로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시종일관 고요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인조(박해일)를 비롯한 두 신하, 이판 최명길(김병헌)과 예판 김상헌(김윤석)의 어조는 침착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일상적인 조정의 논쟁 자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온하다. 그들의 입에선 상황을 타개할 ‘방법’들이 튀어나오지만 절망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는다. 왜? 어차피 이미 그들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소리 없는 절망으로 가득하니까.
오히려 인물들이 보이는 침착함은 냉랭한 겨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며, 전란에 지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마저 겨울을 닮아있다. 과연 이 겨울 속에서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한다. 일국의 재상에서부터 비천한 노비와 대장장이,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그렇기에 겨울의 이미지 속에 담긴 동적인 객체들은 어떤 의미로 ‘눈’을 닮았다. 겨울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만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 <남한산성>이라는 겨울 속에서 인물들은 ‘눈’처럼 내린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상황들은 더 차갑게 다가온다.
‘겨울화’된 작품의 이미지 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서사와 그 속의 인물들의 행위 혹은 대사들은 한기가 서려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성곽을 지키는 장정들의 뼈있는 농담 속에서도 한기가 느껴진다. 단결이나 화합이 가지는 따뜻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대립과 분열이 지배하는 서사 속에서 상황의 흐름은 냉혹하기만 하다.
이 지극한 냉기는 비단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만 느끼는 것은 아니어서, 극중의 인물들도 종종 겨울을 입에 담기도 한다. 가령 극의 후반부 최명길과 김상헌이 ‘이 지독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을 토로하는 것이나, 봄을 언급하는 나루(조아인)의 순수를 바라보는 ‘겨울 속’ 김상헌의 모습처럼 인물들의 말 속에서도 겨울은 자주 은유된다.
그런데 이처럼 인물들의 대사에서 엿볼 수도 있듯이 이 작품이 겨울로 절망만을 그려내지는 않는다. 조용히 생명이 죽어가는 겨울이 지나면 만물이 싹트는 봄이 오듯이, 이 작품도 겨울 뒤에 다가올 봄을 그린다. 그런데 기존의 희망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 어떤 희망들은 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무참히 꺼지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살아남아 삶을 이어간다는 메시지를 통해 어떤 절망도 쓰러뜨리지 못하는 희망의 끈질긴 생명력을 역설한다.
그래서 <남한산성>의 겨울은 겨울로서의 본질을 날것으로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의 희망조차도 평범한 수준에 머물지 않게 한다. 가장 강력한 적을 쓰러뜨린 영웅이 더 뛰어나 보이듯이, 이 작품은 가장 지독한 절망을 담아냄으로써 그에 비례하는 희망의 봄을 탄생시킨다. 치욕에 역사에 겨울의 절망까지 덧칠했기에 이 서사에서 살아남은 것들의 가치는 크다.
영화가 줄곧 최명길의 입을 빌려 '일단은 살아남아야 모든 것을 다시 추스를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죽음으로 뒤덮인 언땅 아래 잠든 씨앗을 보는 것만 같다. 어떤 비참함이 있더라도, 사계의 운영이 멈추지만 않는다면 봄은 다시 오니까. 그리고 땅 밑에 고이 살려낸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울 테니까.
영화는 인조, 그리고 김상헌과 최명길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사진 : 다음 영화 <남한산성, 2017> 스틸컷
2. 모순을 짊어지고 맞이하는 봄 : 인물들로부터
이 작품은 절망의 역사에 겨울로 절망을 덧씌워 그에 비례해 커지는 '삶'이라는 희망을 그려내고 있다. 이 과정은 절망과 희망의 공존이라는 모순적인 모습을 띠는데, 영화의 서사를 이끄는 주요 인물들도 이 '모순'을 한껏 끌어안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삶'을 향해 나아간다.
먼저 <남한산성>을 이끄는 주축인 김상헌을 살펴보자. 그는 주전론을 주장하며 대의명분을 내세운 이상주의자로 그려지지만 실상은 지극한 현실주의자이며,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는 운명에 놓인 자신을 깨닫고 있다.
김상헌은 영화의 시작부터 운명의 굴레로 내몰린다. 그는 전날 얼음길 위에서 어가를 안내했던 노인을 만나 안내를 받는다. 김상헌은 청군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삯을 챙기겠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 그를 죽이는데, 그 노인은 후에 등장할 나루의 유일한 혈육임이 밝혀지고, 김상헌은 유일한 혈육을 죽인 원수이면서도 나루를 거둬야하는 운명의 장난에 놓이게 된다.
극 전체를 아우르면 낭비되는 신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사실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다. 김상헌은 주전론(검)으로서 현실주의자(나루터의 노인)를 죽이게 되고, 그 결과 삶에 홀로 내던져진 아이(인조)를 거둔다. 그리고 아이의 보호자를 죽인 죄업(신하로서 왕을 보필하지 못함)은 감당할 수 없는 양심의 가책(자신의 이상으로 왕을 모실 수 없었던)이 되어 스스로를 죽여야만 하는 운명에 놓이게 한다.
굴욕 후에 나루(곧 인조)는 살아남아 삶을 일구게 되고, 꽃피는 봄에 달고 고소한 고기를 잡아 계속해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결국 이상은 무너지고 현실이 지배할 ‘삶’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이상의 검을 놓을 수는 없었던 김상헌의 운명적 굴레가 영화의 서사를 무겁게 짓누른다.
현실주의자이면서 이상주의자의 탈을 써야했던 김상헌 *사진 : 다음 영화 <남한산성, 2017> 스틸컷
비단 나루를 통한 은유에 그치지 않고 극중 김상헌의 현실주의자적 면모는 서날쇠(고수)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한 신분의 날쇠의 계책을 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전령임무를 맡기는 등 국운이 걸린 일을 귀천을 따지지 않고 맡기는 것 또한 그의 현실주의자적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명분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적인 그의 모습은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처럼 본디 현실주의자인 김상헌은 왜 대의명분을 중시한 이상주의자의 입장을 펼치는가.
만약 최명길과 김상헌 모두가 주화론을 주장해 쉬이 청에 굴복했다면, 인조는 어떤 상황에서도 싸워볼 생각조차 않고 살아남기 위해 애쓴 왕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누군가는 척화를 주장해 왕이 ‘최선의 노력은 했으나 어쩔 수 없이 굴욕을 겪은 것’이 되게 한다면 역사에서 왕의 굴욕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운명의 준험한 심판에 따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김상헌은 청과 화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또힐 그 자신이 지극한 현실주의자면서도 주전론을 펼쳐 왕에게 자신을 죽여 ‘삶의 명분’을 주게 되는 것이다.
'명분'으로 인조를 옹립했지만 현실주의자의 탈을 써야했던 최명길. *사진 : 다음 영화 <남한산성, 2017> 스틸컷
극중 또 다른 한 축인 최명길 역시 김상헌이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으며, 인조옹립으로 말미암아 인조를 지키기 위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신이 ‘삶의 길’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그로인한 비난을 몰아 쓰고자 했다. 그래서 최명길은 ‘저는 역사에 길이 역적으로 남게 될 것’이라면서도 스스로 그 주박을 쓰게 된다. 그는 조선이라는 이상을 지키기 위해 현실주의자의 태도를 취하고 선비들의 비난을 온몸으로 감당하면서 김상헌과는 또 다른, 이상주의자이면서도 현실주의자의 길을 걷는다.
결국 최명길과 김상헌은 인조와 나라를 살린다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서로 대척점에서서 각자 모순된 이상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으며, 비참한 운명 속에서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들을 나눠서 책임졌던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과정은 조금 다른데,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은 최명길의 항복문서를 찢기도 하는 등 둘은 첨예하게 대립했었다. 호란이 끝난 후에야 함께 옥살이를 하면서 둘은 서로의 방식이 모두 나라를 위한 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서로를 인정하게 되는데, 아마도 영화의 각색은 이 과정을 좀 더 ‘남한산성 쪽’으로 밀어 넣은 것 같다.
어쨌거나 이처럼 모순을 끌어안고 삶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주요 인물들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또 한편으로 사실상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말하는 최명길의 사상과 철학도 주목할 만하다. 그의 태도는 ‘일단은 살아남아야 모든 것이 있다’는 노장사상과 통하며, 그의 전략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의 승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의 병략과도 일치한다. 또한 나라를 운영함에 있어서 그 근간이 되는 ‘법’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어떤 유연함을 발휘하는 일, 즉 ‘술(術)’을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한비자의 사상도 내보이고 있다.
국가운영은 명분보다는 이를 취해야하는 일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명분보다도 중요한 것이 표면적인 실제 상황이다. 국가의 최우선 목표는 그 국가의 건재함이며, 나아가 국가에 소속된 인명의 보존이다. 이 두 가지 상황이 충족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떤 명분과 대의가 있어도 무용한 것이다. ‘전쟁은 이미 승리해놓은 뒤에 그것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라는 손무의 말처럼, 가장 좋은 것은 이미 승리해놓는 일이지만, 그것이 미처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준비할 때까지 저자세를 취하는 ‘술’을 부릴 줄도 아는 것이 군주의 으뜸가는 지혜다.
<광해 : 왕이 된 남자>에서 하선이 처음 광해군을 만나는 장면. *사진 : 다음 영화 <광해 : 왕이 된 남자, 2017> 스틸컷
이런 점을 놓고 보면 <남한산성>에 최명길 역을 맡은 이병헌을 통해 <광해 : 왕이 된 남자>를 오마주한 것은 참 흥미롭다. 공교롭게도 이병헌은 <광해>에서 광해군의 대역인 하선을 연기했으며, <남한산성>의 초반부 인조가 최명길에게 계책을 묻자 최명길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를 말하며 쇼트가 전환된 부분은 <광해>에서 광해군을 처음 만난 하선의 모습과 중첩되기도 한다.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던 역사적 인물의 단순한 나열이라고 하기엔 이 오마주는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일등공신이 최명길이니까. 두 역사적 인물은 같은 사상을 가지고 나라의 실리를 위해 정사를 논했지만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이 현실주의를 대변하는 노인을 이상의 검으로 찔렀던 은유처럼,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통해 광해군과 최명길을 잇는 감독의 연출은 결국 광해를 폐위시킨 최명길이 자기 자신을 찌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는 명분론을 내세워 광해를 폐위시킨 최명길이지만 결국 같은 길을 걷게된 것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담아내고자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결국 영화가 추구하는 '삶'이란, 명분보다 실을, 죽음보다는 살아가기를 추구하자는 것이니까. 비록 최명길이 뒤늦게 그러한 길을 택했더라도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은 남으니까.
*사진 : 다음 영화 <남한산성, 2017> 스틸컷
영화, <남한산성>
원작의 힘이 있었다곤 하지만, 어떤 걸작이 되었건 그것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한산성>은 이미지 속에 녹아있는 절망으로부터 이미 절제를 얻었으며, 정갈한 한식을 먹는 것과 같은 깔끔함을 보여준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음’에 도달한 영화가 진정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면, <남한산성>은 그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남한산성>은 이미지에 충실한 영화의 성질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타 장르가 따라올 수 없는 영화만의 ‘연출’에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영화 고유의 몽타주적인 성격, 이미지와 서사의 병치를 활용한 의미 전달도 뛰어나다. 때문이 이 작품은 어떤 요소를 살펴봐도 읽는 맛이 쏠쏠한, 그야말로 ‘영화 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잘 읽었습니다. 추석 때 새벽에 몰래 큰 집을 나와 영화관에서 새벽에 본 영화인데.. 이런 배경 탓인지 영화의 잔잔함을 견디기 힘들더군요ㅠㅠ
근데 글을 읽어 보니까 나중에 제가 영화 보는 눈이 좀더 높아진다면 다시 보고 싶네요:)
저는 이미지를 읽어내는 게 아직 너무 어려워서..저는 좀 <밀리언 달러 베이비>같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추구하는 어떤 밑도 끝도 없는 절망, 그 속에서 가끔씩 피어오르는 실낱 같은 희망을 좋아해서 이 영화도 퍽 마음에 들었답니다 :)
이미지에 관해서는... 저도 배우는 처지에 이미지를 더 잘 읽고 못 읽고가 있겠습니까 ㅎㅎ 영화 보는 눈은 모두 제각각이라고 생각해요. 내용에 중점을 두는 분도 있고 이미지에 중점을 두는 분도 있고 감독이나 배우에 중점을 두는 분도 있고....... 저는 감독이나 배우는 잘 알지 못하는데 혀니님께 많이 배우곤 합니다 :)
영화의 인기에 상관없이 저도 참 인상깊게 봤던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의 총체적 모습을 담고있는 듯 한 남한산성. 이렇게 또 다시 보니 새롭네요.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 )
앗, 그리고.
@pistol4747 님!
7일간의 흑백사진 챌린지에 지명되셨어요.
링크 읽어보시고 자유롭게 참여해주시면 됩니다!
https://steemit.com/sevendaybnwchallenge/@chaeeunshin/7-day-black-and-white-challenge-1-day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하는데, 이것만큼은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흑백사진 챌린지는 이웃님들이 종종 하고 계신걸 봤는데, 곧장 다른 분을 지목하면 되나요? 별도의 태그 같은 것을 달지 않아도 되나요? (궁금궁금)
넵! 매일 다른 분을 지목하시면 되구요, 태그는 링크에 표시해두었습니다^^ 7일간 매일 다른 분을 지목하시면 되어요:-)
남한산성이 개봉하기전에 많이 기대했는데, 의외로 관람평이 안좋아서 머뭇거리다가 지금까지 못보고 있었어요. 경민님이 쓰신 리뷰를 읽으니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간에 언급하신 노장사상과 손무의 병략, 한비자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분들이 꼭 한번 읽어봤으면 하네요. 영화 남한산성의 배경이되는 병자호란 때와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저만 하는걸까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과연 현재 우리나라에는 최명길과 김상헌과 같은 인물이 있을까요?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네요.
저는 그래서 평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지요 ㅎㅎ 작년에 개봉한 장편 한국 영화 중에서는 거의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추천은 잘하지 않지만 이 작품이라면 추천드리고 싶네요 :)
지리적 이점 때문에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좋은 먹잇감인 듯 합니다. 게다가 냉전을 거치고나서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국경선역할까지 떠안게 되었지요. 나날이 풍전등화인데 부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강한 힘을 길러 모두가 현명하게 난세를 헤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글을 추천해주신 것도 감사한 일인데 이벤트 당첨금을 제게 주시다니 ㅠㅠ 더 열심히 좋은 글을 쓰라는 셀레님의 격려로 알아듣고 좋은 글 쓰는데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