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반추反芻 (12)

in #kr7 years ago



반추反芻 (12) - 문희 어머니와 오빠 문석의 사고

“형! 어떻게 알았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태식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태근이 형의 팔을 붙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심문하듯 물었다.
“뭘?”
“뭐긴, 문희 말이야? 어떻게 알게 됐냐구?”
“결혼할 생각이냐?”
태근이 형은 태식이의 묻는 말에는 정작 대답을 하지 않고 태식에게 되물었다.
“그건 왜?”
“태식아! 실은…”
태근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태식에게 은행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태식에게 문희에 대하여 물었고 태식은 태근이 형에게 문희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대로 털어 놨다.
“형, 나 문희 많이 사랑해. 비록 가진 것 없고 힘들게 살지만 참 좋은 여자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응. 그러니까 형이 좀 도와줘.”
“나야 너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형이 좀 도와 달라는 거 아냐.”
“뭘 도와주면 되는데?”
태식은 태근이 형에게 먼저 부모님께 문희의 가정형편에 대해 함구해 줄 것과 은행에 절반 정도 남은 부채를 해결해 주어 월급이 제대로 나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문희를 보면 그녀가 어색하지 않도록 편하게 잘 해 줄 것도 잊지 않고 말했다.
“너, 벌써 그 정도로 문희씨 사랑하는 거냐?”
“그래, 사실 문희씨를 봐서라도 빨리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물론, 어머니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 하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참, 너도 골치 아픈 일 사서한다. 사랑이 뭔지… 난 신경 쓰지 마라 먼저 장가가겠다면 쌍수를 드리어 환영해 줄테니깐.”
“고마워 형.”
태식은 태근이 형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태식은 못내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결혼을 승낙받기 전에 말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부모님의 표정이 마치 그림처럼 태식의 머릿속에서 환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한동안 태식은 번역일이 밀려 야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문희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머릿속에 잠시도 문희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것은 문희가 집에 오더라도 사실을 말하지 않은 채 온다면 불안한 상황은 계속 될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문희의 집에는 아직 전화가 없었다. 수요일, 마침 바쁜 일을 끝내고 난 후 태식은 정 상무에게 일찍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문희의 집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미리 적어 놓았던 집 주소를 가지고 근처에 있는 전화국에 들러 전화를 신청했다.
오후 이른 시간에 찾아 온 문희의 집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문석이 형! 나왔어!”
태식은 방문 앞에서 문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발은 분명히 마루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음에도 방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어머니?”
태식은 문희의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태식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어 몇 번을 망설이다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 문희의 어머니와 문석이 자고 있는 듯 했다. 방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태식은 곤히 자고 있는 두 사람을 깨운다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방문을 닫았다.
순간, 방문을 닫으며 태식의 얼굴에 이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어? 이건…”
그것은 분명 연탄가스 냄새였다. 태식은 신발을 벗을 여유도 없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문석과 어머니를 차례로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두 사람은 깨어나지 못했다. 태식은 급히 뛰어나가 골목길에 있는 슈퍼의 공중전화를 붙들었다. 막상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전화국에서 전화를 신청하고 온 터라 문희 집 주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우선 태식은 112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수화기에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리치듯 말했다.
“연탄가스 중독이요! 빨리요.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할지 몰라 전화했습니다. 도와주세요!”
날씨가 추웠음에도 태식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전화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수화기를 힘주어 잡고 있었다.
“어딥니까?”
태식은 단숨에 문희 집의 주소를 불러 주었다. 저는 ‘김태식’이라고 합니다. 빨리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문희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엌문과 방문을 모두 활짝 열어 놓고 문석과 어머니를 바르게 눕히고 부엌에서 찬물을 적셔 온 수건으로 얼굴을 번갈아 가며 닦아 주었다. 태식은 무서웠다. 그저 일이 잘못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연탄가스를 마시고 의식을 잃은 사람을 겪어 보지 못했던 태식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연탄가스가 빨리 방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한 쪽 구석에 있던 신문지를 잡고 부채질을 하는 것밖엔 없었다.
다행히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태식은 반사적으로 어머니를 먼저 들쳐 업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무작정 사이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쳐나갔다.
구급차는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뒷문을 열어 들것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구급요원들이 태식을 보자 급히 문희의 어머니를 받아 침대로 들어 올렸고 이내 산소호흡기를 가져다 대었다.
“또, 있어요. 저기 저 집…”
태식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짧은 거리였지만 단숨에 뛰어나온 터라 문희의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구급 요원들은 급히 집으로 들어가 들것에 문석을 싣고 나왔다.
그리고 나머지 한 쪽 침대에 눕힌 후 산소 호흡기를 대었다. 태식이 구급차의 뒤편에 함께 올라타자 차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태식은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를 들어 줄 분이 누구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다만 간절히 마음속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나오는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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