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 성격설은 과학이었을까

in #kr6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newage92입니다! 글의 가독성을 위해 독백체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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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상화폐 토론으로 곤욕을 치르셨던 정재승 교수님의 강의를 보았다. 사실 강의라기보다 교육이 조금 가미된 예능 방송이었다. 아마 재미를 살리기 위해 어려운 내용이 생략되다 보니까 과학자의 관점도 인문학자의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그런 내용이 들어간 방송이었으면 시청률 때문에 피디들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강의 내용은.

혈액형 성격설, 미신인가?

사실 나도 대화주제가 없으면 혈액형 성격설을 활용하기도 한다. 일반화하다 보면 타로 점처럼 끼워 맞추는 재미가 쏠쏠하니까. 그런데 교수님이 이걸 지적하시는 것을 보면 진짜로 믿는 분들이 있는가 보다. (너는 내게 모욕감을 줬어. 이 남자 성격 a형인 것 같애. 그죠?) 방송에서 소개된 혈액형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혈액형 연구의 역사는 길지 않다. 길어봐야 1세기 정도. 1901년 오스트리아의 란트슈타이너는 수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하던 중 혈액형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특정 혈액을 식별하려면 다른 혈액들과 응집이 가능한지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형질은 일정한 패턴으로 자식에게 유전된다. 우리에겐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당시엔 훌륭한 성과였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혈액이 다른 유형의 피와 섞이면 응집되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것이 발견되기 전의 외과의사들은 집도 중 환자가 과다출혈로 죽어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했다. 하지만 위 연구에 의사들만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과학의 권위는 그 당시 제국주의자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혈액의 유형으로 인간을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 분류할 수 있다는 그의 발견은 단순히 의학적 발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동시대 사람들의 사회적 상상력, 특히 인종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독일의 내과 학자 폰 둔게른은 동물의 혈액형에 대한 임상조사를 통해 대부분의 포유류는 B형이며, 침팬지와 사람에서만 A형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혈액형의 기원과 진화, 유전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독일의 72개 가계, 348명을 대상으로 혈액형 조사를 실시하여 혈액형이 세대 간에 멘델의 법칙에 따라 유전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제자 힐슈펠트의 공동 논문으로 발표했다.

정준영. (2012). 피의 인종주의와 식민지의학. 의사학, 21(3), 521.

서양에서의 혈액형 연구는 검은 피부를 가진 피지배자들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마침 A형의 비율은 북유럽에서 아시아로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를 관찰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인종 계수 (A형 인자/ B형 인자)를 만든다. A형의 비율이 높을수록 진화한 민족이라는 가설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해당 주장은 학계의 관심을 받았고 곧 예외적인 사례로 반박 당했지만 이후 O형의 비율도 반영한 계수가 나타나는 등 인종 간 우열을 측정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의학적으로 실용성이 없어보이는 인종주의적 분류학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과학이 단순히 ‘기술’과 ‘돈’으로만 환원되는 학문이 아니고 순수한 지식체계만 가지던 것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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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해당 연구는 일본에 전해졌으나 다소 비판적인 시선이 존재했다. 당장 제국주의 열강 중 유일하게 아시아 출신이었고 러시아의 남하를 힘겹게 막아내는 신참 제국에게 인종계수는 반가운 도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대국에서 분리되는 장벽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일본에선 인종주의적 접근보다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에 집중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B형으로 분류되는 국민들이 군인으로 복무하기에 적합한 성격이라는 주장이다. 어쩌면 일본, 대만,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혈액형 심리학이 본토의 과학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성격설이 한참 논의되던 20세기 초와 오늘날과의 갭을 설명할 근거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식민지로 전파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겠다.

한편 조선에서의 혈액형 연구는 유럽과 조금 비슷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외관상 조선, 만주인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해야 하는 일본인에게 혈액형 비율처럼 ‘수치’적인 지표는 의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우등한 인종은 장신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앞서 소개한 인종계수를 조사한 일본은 본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 남부가 북부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인종계수를 가진다는 것에 주목했다. 처음 도시에서만 진행되었던 혈액 채취는 조선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나아가 전쟁이 있는 만주까지 확산되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인종계수가 낮아지는 패턴을 발견한 것이다. 이 와중에 예외적인 경향을 보이는 중국인들은 배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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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혈액형 분류학의 역사가 재미있었던 것은 첫째, 식민지였던 조선에서의 연구가 본국에서의 그것과 전혀 다르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백인 제국들이 논의하던 인종계수에 대해선 싸늘한 시선을 보였지만 식민지에선 매우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만주에서의 혈액형 분석은 전쟁이 한창일 때인 1930년대 중반에 진행되었는데 군대와 과학이 함께 움직이며 급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사단은 때때로 비적들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의학교실에서는 지금 만주, 조선 각처를 순회하며 혈액형결정에 교원을 총동원시키고 있고 장학금도 받아가며 일을 하고 있다. 이 조사를 하기 위해 교수와 조수 한명이 만몽을 여행중 비적의 습격을 받아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우리들 기억에 새로운 바이다.” (정근양)

식민지에서의 인종계수 연구는 제국이 지원할 동기가 충분했지만 안전이 완벽히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연구를 강행할 정도로 의학자들을 움직인 동기는 무엇일까?

두번째로 조선의 과학(의학)자이자 지식인으로도 볼 수 있는 백인제와 같은 인물들도 해당 연구에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백인제는 조선 남부와 북부에서의 인종계수 차를 주목하며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한다.

“이 결과에 의해 대화민족과 조선민족의 선조가 누구인가를 추정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지만. 그래도 다른 역사학적, 인류학적, 또는 언어학적 연구와 여러 가지로 서로 대조해 보면 대체로 다소의 추정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키리하라 / 백인제: 1922: 281)

3.1운동에 참여했고 후기엔 백병원을 세워 보건에 힘썼던 그가 조선과 일본의 교집합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 특이할 점이다. 제국에서 지원받았던 연구비와 경성법의학교실의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당시 세계관으로 깔려있던 식민사학의 영향이 그의 연구동향에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위 사례를 짚어볼 때 적어도 의학에 한해선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의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신과 피지배자를 완전히 분리시키려 했던 백인들과 달리 일본은 민족간 우열은 인정하되 혼혈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관에도 강하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끌려가는 일본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구경하는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자발적, 적극적으로 내지 창조적으로 저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을 바늘 끝으로 찔러도 일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 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광수)

모든 사람들이 이광수와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피는 1930년 중요하게 논의되던 키워드 중 하나였고 문/이과를 통틀어 많은 지식인들은 피의 섞임에 대해 고찰했던 모습이 발견된다.

어쨌든 중국인들의 조사결과가 배척된 만주/조선/일본의 인종계수 분포는 제국의 이해와 맞아떨어졌고 전폭적으로 지원받는다. 그리고 분석된 인종계수는 내선일체를 정당화하는 증거로 쓰인다. 본국과 식민지의 차이를 고려해보면 비록 수(數)로 재현되는 과학자들의 보편적인 연구가 문화적/사회적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글에선 소개하지 않겠지만 일제강점기 조선 식물학의 역사를 지켜보면 색다른 모습이 보인다. 중립성을 추구하는 정치랄까.

이러한 점에서 과거에 행해진 국가주의적 성격설과 인종주의적 분류학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 ‘미신’으로 치부될 수 있는지 딴지를 걸어보고 싶었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때문에 긴 글을 읽으러 오신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시대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우리들이야 “혈액형 심리고 뭐고 다 미신이에요~”라고 하겠지만 그 시대엔 ‘과학’으로 평가받았다. 과학이 아니었으면 중앙 정부에서 무엇 때문에 연구비를 지급했겠는가. 또한 순수한 과학이 제국주의에 오염되었다는 의견이 나올 수 있는데 나는 그저 과학의 문화/정치적인 측면을 강조해보고 싶어서 글을 썼다. 지금은 해당 연구를 엉터리라 비웃지만 정작 우리들의 인식은 그때와 비교해서 얼마나 발전했을까? 피지배자였던 우리가 과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아내려면 과학의 역사를 냉철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과학이 거의 모든 생활에 적용되는 상황에서 위의 질문들은 전부 의의가 있고 가치중립에 대한 고민 또한 꾸준히 고민해봐야겠다. 해당 방송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고 이미 세상에 소개 된지 몇 년은 지난 혈액형 연구의 역사가 대중들 사이에서도 논의되었으면 좋겠다.

글을 마치며
JTBC에서 진행되었던 블락체인 토론을 보면 불편한 감정이 생깁니다. 특히 대표 ‘지식인’이었던 사람이 내내 외치는 ‘문송한데요’라는 문장과 ‘비트코인은 엔지니어의 장난감’. (‘문송합니다’는 선진국에서도 보편적으로 쓰이는 문장일까?) 여기서 ‘문송’은 취직시장에서 소외 받는 감정과 부족한 이과 지식에 대한 무안함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듯 하지만 후자가 좀 더 강하게 쓰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장난감’이란 단어는 공학자들이 가치판단에 관심이 없고 경제에 무지하다고 암시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한국은 유독 이과와 문과 사이의 거리가 먼 것 같은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문제점을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간극이 젊은이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와 인문학자간에도 존재한다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비록 저는 학자가 아니라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런 불편한 감정을 없애줄 성찰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1분기 1과학글 가즈앗! 그리고 여성 미술사도 슬슬 가즈앗!

참고한 논문은 ‘피의 인종주의와 식민지의학: 경성제대 법의학교실의 혈액형인류학’ (정준영) / 1930년대 피의 담론과 일본어 소설(윤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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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겨우 4가지 유형으로 나누는게 말도 안되긴 하지만 재밌긴한거같아요 ㅎㅎ
팔로우 보팅하고갑니다 :)

ganzi님 팔로 보팅 정말 감사합니다!!

혈액형 성격을 따지는 사람들 보면, 혈액형이 자기가 생각하는 성격과 다르면, 그것도 유형이 있어서 그래 등등 없는 이론도 만드시더라구요. .ㅎㅎ

흠 열심히 자기 이론을 강화시키는 모습이군요. 옛날엔 기업에서도 혈액형 정보를 수집했는데 요샌 어떨지 모르겠네요. ㅎㅎㅎ

묘하게 일본에서 건너온 우생학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때의 그...물은 답을 알고 있다나 뭐라나라던가.....바이오리듬인가 뭐시기라던가 ㅋㅋㅋㅋㅋ

저는 혈액형만 팠는데 다른 우생학도 있나보군요! 혹시나 관련된 재밌는 얘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셔요~! 팔로하고 합니다. :D

아주 긴 글인데 흥미롭게 잘 보고 가요 !!

유행어들도 일본의 것들을 많이 차용하죠.

식민지배를 받아서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씽키님 글(예술의 위기?)을 읽었는데 우리 역사는 학문이 성장할 여유가 너무 없었던 것 같아요.

학문은 다 통하는데 이과 문과를 상당히 구분하는 경향이 있죠.
전 전공계열을 바꿨는데 희안하다는 듯이?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음 시리즈도 기대할께요! ^^

맞아요! 저는 기초과학을 전공할까 고민하다가 같은 학과 동생이 와선 "그 쓸모없는걸 왜 배우노" 하더군요. 인문학은 그냥 취미요. 과학은 경제발전의 도구일 뿐이로다... 앞으로 인식 개선을 위한 글을 쓰겠습니다!!

제 두 아들은 같은 혈액형인데 성격이 완전하게 반대입니다. 제가 A형, 아내가 O형이니 두 아들은 동일하게 AO A형입니다. 완벽하게 똑같은 혈액형인데 성격은 완전하게 완벽하게 반대입니다.

네 거의 상관관계가 없다고 밝혀졌죠. 혈액형 성격설은 대만, 일본, 한국에서 유독 역사가 길다고 합니다. 정말 일본의 영향을 받았나...

혈액형은 상관관계가 있을 수가 없죠.. 4기질론과 같이.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ㅠㅠ 기자 지망생으로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여성미술사 글도 기대되네요.

좋은 글 읽고 팔로잉&보팅하고 갑니다. 자주 소통해요 ㅎㅎ 맞팔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1. 앗 칭찬 감사합니다. 여성미술사도 최대한 관점을 담아서 꼼꼼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여성'이란 단어엔 많은 감수성이 담겨있으니까요.

  2. 사실 제 생각은 아니고 이미 석학들이 잘 정리해놓은 지식을 옮겨서 오독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날로 먹은 느낌도 드는데 ㅠㅠ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담론을 들어보면 조금 답답한 마음도 있어서 글을 써봤어요.

  3. 저도 (예비) 기자님 글 열심히 구독하겠습니다! 화이팅!

제 블로그에 첫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미셸 푸코가 맞습니다. 이 글에서 잘 나타나듯이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이라는 방법론이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정신의학의 역사도 예외일 수 없는데 미셸 푸코가 이런 부분을 잘 짚어내고 있어서 좋아합니다. ㅎ

네 인문학에서 비슷한 지적이 조금 나오는데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냐 정치적이냐 이 논쟁이 사실 지식인들에겐 많이 민감한 문제라고 합니다.
정신의학과 푸코. 혹시 관련해서 포스팅하신다면 열심히 읽겠습니다! (다른 글두요!)
이번 글에 달린 댓글로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기겠네요. ㅎㅎㅎ

가만히 보면 은근 맞는 것 같은데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합니다 @_@

ㅋㅋㅋ 단순히 재미로만 맞추는 것은 괜찮은 것 같아요. 저도 즐겨 장난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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