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모르겠다

in #kr6 years ago (edited)

#1
컨디션이 안 좋다. 감기 걸리기 직전의 느낌이다. 주말 내내 날이 꽤 쌀쌀하던데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그런가보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무리한 일정이었다. 5월이 되니 주말마다 결혼식으로 스케줄이 터져나간다. 몇 탕 씩 뛰어야하기도 한다. 다들 봄의 신랑 신부가 되고 싶어하나보다. 난 아무리 그래도 5월에 결혼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5월은 가정의 달이어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으로 바쁜데, 결혼식까지 겹치면 더 정신없을 거 같다. 나를 위해서도, 내 가족을 위해서도, 내 지인들을 위해서도 이건 아니다. 5월은 패스.

#2
생각해보니 결혼식을 여러 개 참석한 것 보다 골프치러 간다고 꼭두새벽에 일어난 게 내 컨디션 악화에 크게 일조한 것 같다. 최근 몇달간 바쁘다는 핑계로 멤버들이랑 필드에 못 나갔더니 원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이번엔 꼭 가려고 기를 쓰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잔디를 밟으니 두근두근했다. 날이 좀 안 좋긴 하지만 뭐…

#3
그런데 괜히 갔다. 내가 제일 못 쳤다. 연습을 너무 안 했더니 전부 다 엉망이다. 지는 느낌 너무 싫다. 멤버들이 다 비웃으면서 연습 좀 하라고 했다. 다음번에 치러 올 때는 반드시 나 혼자 의기양양하게 웃을거라고 큰 소리쳤다. 이제부터는 주말마다 특훈할거다.

#4
그래도 클럽하우스에서 오랜만에 먹는 고등어소바는 여전히 맛있었다. 예전엔 엄마랑 이거먹으러 자주 왔었는데.. 너무 바쁘다. 나도 엄마도.

#5
어떤 걸 보고 예전에 입사하기 전에 했던 수많은 인터뷰가 생각났다. 그때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내가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지원한 회사에 다니는 선배들을 만나 mock 인터뷰를 수도 없이 봤다. 그리고 나를 직접적으로 잘 아는 선배들한테 internal referral 도 많이 받았다. 다른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준비과정이 토나올정도로 힘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 과정이 정말 신났다. 친했던 선배들 만나서 역할극하듯이 interviewer-interviewee 로 mock 인터뷰 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그 선배들이 소개하는 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실제 인터뷰는 더더욱 재미있었다. 분명 지원자를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분위기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다들 기본적으로 나한테 호의적이어서 편하게 인터뷰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편한 사람들이랑 같이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가고 싶었던곳에서 합격 통지가 와서 정말 기뻤다. 그런데 결국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A 가 아닌 가장 명성이 높은 B 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B 는 회사 & 부서분위기가 너무 나 잘났어 하는 분위기여서 마지막까지 갈까말까 고민했는데, 네임밸류에 결국 넘어갔다. 그런데 막상가서 보니 나랑 B 회사랑 의외로 잘 맞았다. B 회사 입장에서 날 인터뷰 했을 때 나도 one of them 인게 보였나보다. (…) 그 때의 내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아주 가끔은 상상해본다. 내가 B 가 아닌 A 에 갔으면 어땠을까.. 뭐 그래도 지금의 내 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을거다. 여전히 난 지금 이 모습일거다.

#6
If 라는 단어를 별로 안 좋아한다. 어차피 결정은 내려졌고, 나는 그 결정이 낳은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구질구질하게 “이랬더라면…” 하면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곱씹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도 ' 이 선택을 안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라고 생각하는 선택이 있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너무나 멍청했던 나를 탓하게 된다. 처음 겪은 실패였다. 그 실패를 겪고 나서야 내가 실패한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실패에 흔들리는 내가 너무 불쌍했다.

#7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을 낳은 그 전 선택이 문제다.
아니네, 그 전 전 선택이 문제였네.
아닌가? 그 전 전 전 선택이 문제였나…?
모르겠다.
그냥 나 자체가 문제일수도.

#8
여기까지 쓰고났더니 몸살기운이 강하게 올라왔다. 약 먹고 잤다. 그리고나서 3일이 지난 지금 마저 쓰고 올리려하니 뭘 쓰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안난다. (…) 에라 모르겠다.

#9
요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을 읽고 있다. 사실 읽은 지 한참 되었는데도 다 못 읽었다. (...) 그래도 책 속에서 기억나는 구절이 있어서 공유하고자 한다.

화가 크람스코이의 <관조하는 사람> 이라는 뛰어난 그림이 있다. 겨울 숲을 묘사한 그림으로, 그 숲속에 길 잃은 작은 몸집의 농부가 다 해진 카프탄을 입고 짚신을 신은 모습으로 홀로 깊은 고독 속에 서 있다. 그는 그렇게 서서 생각에 잠긴 것 같지만 사실 어떤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멍하니 뭔가를 ‘관조’ 하는 것이다. 만약 그를 툭 친다면 그는 흠칫 놀라 마치 잠에서 깬 것처럼 어리둥절해서 바라볼 것이다. 그는 곧 제정신을 차리겠지만 그렇게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거의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관조 중에 받은 인상은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간직될 것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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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감기는 심한 증상을 유발하더군요. 건강 잘 챙기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사실 모든 사람은 각자 항상 그 순간의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입장입니다. 아마 예전으로 돌아갔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게 (그 당싀의) 최선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qrwerq님의 말씀처럼 저 때의 저 상황에서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어요. 신과 같이 모든 상황을 꿰뚫어보는 판단을 인간이 할 수는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안타까움은 감출 순 없지만, 후회는 크게 안하나봅니다.

에고고....쉬엄쉬엄...건강 챙기세요~~

날씨가 계속 꾸물꾸물한 것도 컨디션 난조에 일조하네요 ㅠㅠㅠ agee00 님도 건강관리 잘하세요 !!!

인간관계나 직업이나
매 순간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특히 #4 는 저랑 좀 비슷한 생각인에요 ㅎㅎ
몸살 때문에 해야할 일, 하고픈 일 못하면 속상할 수도 있을텐데..ㅠ
건강부터 우선적으로 챙기길 바라요!

그저 제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일이니 열심히 할 뿐이예요 ㅎㅎ
후회해서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어요. 후회할 시간에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게 더 가치있는거라고 믿어요 :D
c1h 님도 건강관리 잘하세요 ㅠㅠ 날이 꾸물거리고 요새 에어컨을 틀기 시작해서 더더욱 감기 걸리기 쉽더라구요 ㅠㅠ

5월에 결혼기념일까지 겹치면 힘들겠죠^^

그런 의미에서 5월이 결혼기념일이신 모든 부부님들 존경스럽습니다. ㅎㅎㅎ

이제 감기 기운은 좀 괜찮으신가요?

저는 친구들보다 좀 일찍 결혼하고는 곧 나와살다보니
친구들 결혼식을 거의 못가봤어요.
그래서 결혼식 많아서 바쁘시단 이야기가 생소하네요 ^^

계속 날이 안 좋아서 그런지 컨디션이 여전히 안 좋네요 ㅠㅠ 그래도 쓰러질 정도가 아니면 어떻게든 맡은 바 책임은 다해야겠지요 ... 쓰고보니 회사의 노예같네요 (...)

결혼식 챙기다보면 주말이 슝 지나갑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주 친한 사람들 결혼식만 가려고 마음먹었어요. ㅋㅋㅋㅋ

에고... 너무 무리마시고 푹 쉬세요!
건강하셔야 일도 더 잘하실 수...

그렇게 전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

아 그... ^^;

요즘 날씨가 휙휙 바뀌면서 감기 걸리기 딱 좋은 것 같아요 . 저도 코감기가 오는 듯한..
건강이 최고 입니다

저녁때 너무 쌀쌀해져서 더 그런가봅니다 ㅠㅠ 제가 주로 새벽에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을 하다보니...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이 최고라는걸 깨닫게 되네요 :)

골프 좋아하시는 군요 저는 맨날 배운다고 해놓고 못배우네요ㅜㅜ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도스토예프스키 정말 좋아해요 저도~

골프는 미리미리 배워둬야 좋다고들 하더라구요 :) 저도 나중을 위한 투자라는 생각으로 배우고 있어요 ㅎㅎ 운동하는 느낌도 있고!

면접 인터뷰 보는 게 체질적으로 맞나보네요ㅎ 많은 분들이 부러워하실듯ㅋ 5월 정말 바쁘죠. 호국보훈의 달이 와야 좀 여유가 생길 듯. 그래도 쉬는 날 많아서 좋네요. 오늘도 화이팅하세요^^

저도 인터뷰 당하는 입장이 되는건 안좋아하는데, 어쩔수 없이 봐야한다면 제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밑작업(?)을 최대한 해놓는 스타일이예요 :) 그 결과 저 시기에 저를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이미 저에 대한 호감이 있었어요 ㅎㅎ 그 덕분에 즐길 수 있었지, 그게 아니었으면 저도 인터뷰 싫어했을거 같아요 ㅎㅎㅎ 소울메이트님의 5월도 화이팅 +_+

더 어렸을 때는 제 자신이 승부욕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며 돌이 깎여 부드러워지듯 제 성격의 모난 곳들이 이제는 많이 둥글어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남들 인터뷰 지도하는 것은 좋아하는데 제가 직접 준비하는 건 싫어하는 타입 입니다 ㅋㅋ 자존심이 쌘지 누구한테 훈수 듣는게 싫더라고요 (고쳐야 될 성격이죠).

그래서인지 최근에 봤던 인터뷰들은 기본만 준비하고 (why this company / elevator pitch 등등) 나머지는 그냥 기분대로 했던 것 같네요. 후배 입장에서는 셀레님 같은 선배님이 훨씬 더 좋은 롤 모델일겁니다 ㅎㅎ

날씨도 좋아졌는데 골프 많이 치러 다니시길 - 그리고 건강 꼭 챙기시고요.

제가 내는 성과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승부욕이 강하다고도 표현하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보다는 저 스스로와의 싸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라 보통 말하는 승부욕은 별로 없어요. 남들이 얼마나 잘하든지 저는 스스로 세운 기준을 통과하고 싶은게 먼저이기 때문에.

인터뷰는 기본만 확실히 준비하면 되더라구요. 그런데 그 기본을 제대로 준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ㅎㅎ

셀레님과 저는 따로 채팅방을 열던지 나중에 실명까고 커피숍에서 만나던지 풀 이야기 보따리들이 정말 많을것 같습니다 ㅎㅎㅎ

공통점이 어떤 게 있는지 미리 알면 이야기보따리 풀 준비를 하기가 더 쉬울텐데 ㅠㅠ

5월의 결혼식이 싫은 이유는 셀레스텔님이 가을을 좋아하셔서 그런 것 같은데 가을엔 예쁜 꽃을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 작약이랑 수국 가득한 부케를 만들고 싶었는데, 수국만 겨우 구했다는.

저는 인터뷰 본 적이 몇 번 없어서 M님 인터뷰 글만 읽어도 힘들던데 심지어 그 상황을 즐기셨다니. +_ + 승부욕👍

이미 지난 일에 대해 지금은 후회하실 지 몰라도 또 시간이 지나면 그 때 그래서 다행이었다. 라고 생각하게 되실 수도 있어요. 전 그렇게 되더라구요.

가을엔 예쁜 꽃이 없나요 ?! 띠로리 ㅠㅠ 저도 작약 좋아하는데 !!!!!!!! 전 은방울꽃도 좋아하는데 그것도 가을에 구하기 힘들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ㅠㅠ

그나저나 써니님 가을에 결혼하셨나봐요 ! 제가 좋아하는 계절에 써니님이 결혼하셨다니, 역시 써니님과 전 통하는게 많다는 걸 다시한번 확신하게 됩니다 :D

M 님 이라니 전 누군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승부욕은 전혀 없었고, 그냥 학교에서 선배들이랑 팀프로젝트하면서 서로의 의견 교환할 때의 분위기였어요. 만약 절 압박했으면, 전 interviewer 보다 더 세고 시니컬하게 반응했을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그럼 전 과연 합격할 수 있었을까요............

아직까지 허우적대는 느낌이 없잖아 남아있어요. 그래도 언젠간 그때 그래서 다행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Mention을 피해가는 이런 교모한 방법이...!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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