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에서 관객으로

in #kr5 years ago (edited)

명상과 글쓰기를 한지 삼년 정도 되는데 나의 감각이 조금 더 예민해진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찾아오면 바로 휩쓸려 허우적댔는데, 지금은 어떤 감정이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물론 알아차리기에 실패해 잘 하다가 갑자기 미친女ㄴ이 될 때도 있다..)

어릴 적 경험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는데(특히 생후 삼년), 나는 그때 부모님의 이혼과 친척집에 맡겨지는 등의 일을 겪어서 그런지 내 기억에는 전혀 내가 그때 어떤 불행을 겪었는지는 없지만, 왠지 어릴 때 나의 인생의 장르가 어느 정도 결정지어진 느낌도 든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보면 나중에는 영화에서 나오는 니나의 관점이 진짜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지는데, 그건 고통을 겪고 자란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신착란 증상이라고 보여진다.

고통이 익숙해진 사람은 현실을 심하게 왜곡한다. 당연히 내가 보는게 현실인 것 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실제현실과 같다는 보장은 없다.

나의 인생의 장르가 어릴 적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 후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 장르로 다시 재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는 밤하늘이 로맨틱하게 느껴질 수도, 누군가에게는 공포로 느껴질 수도 있다. 현실은 로맨틱도 공포도 그 어느 것도 아니지만, 그저 밤하늘일 뿐이지만, 이미 정해져버린 내 인생의 장르로 나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공포영화의 주인공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은 늘 전전긍긍하고 경계하고 불안해하며 산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늘 과거처럼 산다. 슬프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밟아야 할 단계는 우선 공포영화의 주인공에서 공포영화의 관객이 되는 것이다.

비록 공포스런 혹은 기묘한 감정을 종종 느끼지만, 그 주인공이 되어 그 감정에서 허우적대다 나도 파멸하고 남도 파멸시키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공포스럽고 기묘한 감정을 바라보는 관객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이런 이상한 감정이 어느 순간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평소에 자신의 호흡이나 또는 나의 신체 감각을 (앉아있을 때 엉덩이의 감각 느끼기, 서 있을 때 발바닥의 감각 느끼기, 걸어다닐 때 움직이는 다리를 느껴보기, 밥 먹을 때 혀끝에 닿는 촉감을 느껴보기 등등) 주의깊게 집중해보는 명상을 자주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

그러면 어느 순간 ‘어, 이런 감정이 찾아왔어..’하며 나를 조금은 제3자 바라보듯이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사소한 나의 스쳐가는 생각이나 별 것 아닌 일상의 상처(일상의 상처는 보통 과거에서 연유되었기 마련이다)들도 지나치지 말고 사유하여 애매한 그것을 글로 정리하여 뿌연 나의 정신상태를 조금씩 맑게 닦아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나날이 명료해지는 자신의 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포영화 주인공에서 관객이 되는데에 성공했다면, 우리의 최종 목표는 우리의 원치 않았지만, 정신 차려보니 이미 결정지어졌던 우리 인생의 장르를 바꾸는 것이다. 공포를 로맨스나 어드벤처로, 스릴러를 따뜻한 감성 드라마나 코믹으로 말이다.

물론 불가능하리만치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인생은 불가능한 목표를 꿈꿔야 오늘 하루도 또 살아낼 힘이 나는 것 아니겠는가.

억울할 때도 있었다. 왜 내가 원하지 않는 환경에서 태어났는지, 왜 나는 늘 불안해하고 자신감이 없고 늘 나는 회색빛으로 세상이 보였는지에 대해서.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당연히 내가 가졌던 그것을 선택하지 않겠지만, 나에게 주어진 운명은 이거고, 바로 여기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운명의 열쇠를 찾아보고 싶다.

내가 그런 출발점을 가진 것이 어쩌면 나의 가장 큰 메리트가 될지도 모른다고 씁쓸한 위로를 해본다.

하지만,

제발 대물림은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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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정해져버린 내 인생의 장르'라는 표현이 팍 꽂히네요. ^^
정해진 것은 정해진 대로 두고 관객이자 주인공으로 살아야겠죠!

네 ㅎㅎ 정해진 것은 정해진대로 두려고 합니다 ㅎㅎ

맞아요. 대물림은 하면 안됩니다...

이글 좋은생각에 등재되서 많은사람이 공감할수있도록요~~ 좋은글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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