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구렁이

in kr •  9 months ago

새하얀 바탕에 둘둘 휘감은 보라색 무늬들..

아니,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꼭 보라색만은 아니다. 여러가지 색깔이 뒤섞인 그것은 꼭 구렁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끔은 그 색상과 무늬에 매료되어 물끄러미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쳐다보게 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이것이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은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글쎄,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가 도무지 요즘 여자답지 않게 순수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나를 웃게 만든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 마치 당신밖에 없다는 듯한 그 무기력에 가까운 유혹의 손길, 이 세상의 것에서 저 세상의 것을 발견하는 듯한 창의력.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나를 끌어들이는 것은 그녀의 강한 저항에 담긴 나를 향한 강한 의존.

그것을 동시에 담고 있는 불가사의한 너란 존재.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

글쎄, 내가 그녀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녀가 도무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랑이란 모름지기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녀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다. 나를 언제나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니까.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그녀 앞에선 나는 언제나 죄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고 했나.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질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억울하지 않다. 더 많이 줄수록,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은게 사랑 아닌가. 사랑의 이 아름다운 정의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그녀의 철없는 투정도, 그녀의 새침한 질투도, 그녀의 탐욕도 모두가 그녀만이 가진 매력이니까.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면 과연 그것이 사랑일까.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나는 가장 싫어한다.

문제는 이런 나를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언제나 그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탓하고, 나를 원망하며, 나에게서 도망친다. 차라리 아주 멀리 멀리 도망쳐 버리면 내가 죄책감이라도 없으련만, 언제나 내가 손이 닿을만한 반경에서 나를 시험한다.

도망치면서도 나의 손길을 애타게 바라는 그녀는 정말 연애의 신, 밀당의 고수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그녀를 알게 되고 한번도 마음이 편안해본 적이 없다. 그녀를 사랑할 때도, 미워할 때도, 껴안을 때도, 밀쳐낼 때도 상황은 다른데 이상하게 마음은 항상 비슷한 선상에 있는 느낌이다.

강이나 바다나 계곡이나, 이름은 다 다른데 사실 다 비슷한 물인 것처럼 언제나 비슷한 물 안에서 헤엄치고 있다. 불안이라는 물에서 가끔은 평온하게, 가끔은 격렬하게. 생사의 위협이 있으면 짜릿해서 좋고 가끔 평온하면 또 나른해서 좋다.

철없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언제나 뼈를 깍는 고통으로 나와 그녀, 또 우리 사이를 미소 지으며 바라본다. 나의 이 고통을 누가 알까. 내가 너를 위하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까. 또 누가 알아줄까.

사랑은 어렵고 고귀한 것이기에 나는 오늘도 이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영원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사랑이니까. 사랑은 내 존재의 이유이니까.

울부짖는 건지, 신경질적으로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 나는 피식 웃음이 난다. 정말 귀엽다. 내가 웃으면 그녀는 더더욱 흥분한다. 신경질적으로 웃는 건지 울부짖는 건지 사실 잘은 모르겠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을 때 나는 신이 된 느낌이 든다. 나는 그녀의 세상이고 그녀는 나의 세상이다. 우리는 서로를 기필코 원하고 또 기필코 뿌리친다.

원하나 원하지 않는, 하지만 끈끈한 거미줄 같은 정으로, 아니 사랑으로 돌돌 휘감겨버린 우리.
그 보라빛 사랑은 정말이지 신성하다.

가끔은 너무나 힘에 부친다.
이 아름다운 사랑이. 이 지겨운 사랑이.
이 끝나지 않는 사랑이..

그녀를 덜 사랑하고 싶은데 자꾸만 더 사랑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그녀의 새하얀 살결, 천진한 눈빛, 무기력한 의존, 나를 신으로 만들어주는 그녀만의 매력을, 아니 마력을, 나는 저버리질 못한다.

그 지저분하지만 촘촘히 짜여져 있는 거미줄처럼, 우리의 사랑도 이미 촘촘히 짜여져 있으니까. 이 모든 것을 허물기엔 이미 너무나 멀리 와버렸으니까.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저 세상 저편 어딘가에서 또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사랑하러 갈 시간이다.

언젠간 이 사랑도 이해받을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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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셨네요 ^^
그 사랑은 누구일까요...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아름답기만 한것은 아닐지도 모르죠.
이해 받을 수 없어도 또 그저 그뿐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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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아름답기만 한것은 아닐지도 모르죠>

아..ㅠㅠ

정말 그런거 같습니다..

육아를 하다보니 (사실은 멍때리다 보니) 정신차려보니 어느새 시간이 ㅎㅎ

픽션 맞습니까? 묘사가 무척 사실적입니다. 포대기에 쌓인 따님이야기 같기도하고...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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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맞을겁니다 ㅎㅎㅎ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힘든 세상사를 - 겉으로 보기에는 - 별 무리없이 넘기는 사람에게 '능구렁이'란 표현을 쓰는 것 같아요.

이번 글은 '능구렁이'가 되기 직전의 '구렁이' 같아요.
아직 성숙되지 않은, 어설프고 미숙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조금 더 들어가면 - '그'에겐 '그'가 되고, '그녀'에겐 '그녀'가 될 수밖에 없는 -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라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고 했나.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질 수 밖에 없다.

이 생각할 수 있다는 자체가 자신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는 것 같아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런가?'... 생각이 깊어집니다.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저 세상 저편 어딘가에서 또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사랑하러 갈 시간이다.

신경질적이지만 '웃음소리'라서 다행이란 생각을 합니다.
나의 '그'에게, '그'의 나에게 신경질적이지만 웃음소리를 줄 수 있다면 '이제 사랑할 시간'은 아직도(?) 남아있다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이게.. 참 무서운것같아요..
사랑이라는 것이 쌍방이 함께 해야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한쪽이 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하면 언젠까지 한쪽이 희생하며 사랑할 순 있을진 몰라도 결과는 좋지 않더라구요..

저도 처음엔 사랑은 희생이라고 생각하여 많이 참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혼자 열심히 해봤지만 사랑은 둘이 함께 노력해야하는 거라는 것을 결국엔 깨닫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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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공감합니다! 혹자는 사랑은 뭐...아낌없이 주고도 혹시 모자라지 않나 돌아보는??? 뭐 그런거라고 하던데...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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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지 않나 돌아보기까지...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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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에 그런줄알고 그런 사랑을 했는데 사람마음이라는게 또 그게 아니더라구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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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이란게.. 참 복잡하고 어려운거 같아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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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한길 물 속은 알아도 열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말이 있듯이.. 옛말 틀린거 하나 없는거아시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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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람 속이 제일 깊고도 깊은가봐요... 인간의 내면이란 참 단순하지가 않아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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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왜그래 횩횩이 잘 안해줘?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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횩횩님께서 요즘 무심하시군요..

언젠가 이해해주지 않아도.. 또다른 언젠가를 바라보며 계속 사랑하겠죠?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왜 제목이 구렁이인지 한참 생각했네요.ㅎㅎ
왠지 제가 생각하는게 아닌 거 같기도 해서 말은 못하겠지만요 ^^
오랜만에 글 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megaspore님~~
메가님 글은 댓글도 꼭 읽어야하니 다시 와서 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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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정답이 없어서 좋은거 같아요 ㅎㅎ 제가 정답 있는건 다 못하거든요 ㅎㅎ 본인이 읽고 무언갈 느꼈다면 그것이 정답이겠죠..^^ 작가가 의도한 바는 있겠지만 그것이 그닥 중요하진 않은거 같아요..^^

예전에 읽었던 모순이라는 소설이 생각이 나네요.
주인공의 이름 자체부터 모순이었던...
진지하고 더 진지하라고 지은 이름이 '진진'인데 성이 '안', 그래서 '안진진'으로 시작된 그녀.
상황과 생각, 선택은 항상 모순적으로 묘사되고 있던 그 소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앞서는 것이 끌림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메가스포님의 주인공도 이성적으로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끌림의 울타리 속에서 모순적으로 보이는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닐지~
근데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한테 이해받기 위해 하는 사랑이 아니기에 존중되어야 하는 사랑인 듯 보입니다~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

사랑에 대한 소설이군요...
실제 갈등을 느끼듯 읽어 내려갑니다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칸씩 비워 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이성선님의 가을편지 중에서...

님... 힘내세요... 더 좋으신 여성분 만나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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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ㅎㅎ 저도 님에게 심심한 위로를 왕진우님과 함께 전합니다..

구렁이... 많은 것을 대입해 볼 수 있겠네요.ㅎㅎ
원래 구렁이가 영물이라고 하잖아요. 사랑을 아낌없이 주다보면
벅찬 보답을 받는 날이 올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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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가 영물이었군요! ㅎㅎ

이제 사랑하러 갈 시간이다.
언젠간 이 사랑도 이해받을 날이 오겠지..

마지막 두 문장이 문득 예전의 저를 떠올리게하네요..

오랜만에 오시니 더 반갑습니다. 자주오세요ㅎㅎ

오랜만에 픽션이네요.
픽션이지만 딸을 키우는 엄마 맘이랑 많이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목에서는 구렁덩덩신선비를 떠올리게 하고요.

오래간만 이세요
이렇게 늦은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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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입니다! ㅎㅎ

가끔 잠 못 이룰 때가 있더라구요~~
아님 그저 커피 과다 복용 때문일지도요 ㅎㅎ

아이들이란 존재는 다 그런것 같아요
볼수록 이쁘고 사랑스럽고~^^
나중에 아이들이 부모가 되면 그때는 이해하겠죠. 우리가 그럤던 것처럼...^^

사랑 사랑 사랑.. 한 쪽만 바라보다가 자신이 뒤돌아 서게되는 사랑.

오랜만에 뵙는거 같아요 메가스폴님 ㅎㅎ
사랑은 자석같은?

내리사랑을 잘 표현해 주셨네요.. 항상 새끼새를 돌보는 것 같은 조바심이 듭니다.

오랜만에 글 보는것 같네요 ㅎ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