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점 잇기

in #kr3 years ago

이제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Connecting the dots 인생의 점들을 잇는 것>에 관한 얘기를 했다.

“여러분은 믿어야 합니다. (본능이든 운명이든 삶이든 인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점들이 연결되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여러분 마음을 따르는 것이 잘 닦여진 길로부터 벗어나게 이끌 때조차 여러분 마음을 따르도록 하는 자신감을 줄 것입니다.”

“ 그리고 그것은 모든 변화를 만들 것입니다.”

나는 경기도 소재 대학 중국학과를 나왔다.

고등학교 때 눈밭에서 “오겡끼데스까~~”라고 외치는 [러브레터]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일본어에 급관심이 생겨 일어학과를 지망했고 지원했으나 아쉽(지 않)게도 떨어졌고

그냥 성적 맞춰 지원한 중국학과에 붙어 어쩔 수 없이(?) 중국어를 전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중국 남자와 결혼해 중국에서 9년째 살고 있다..)

한자를 싫어하고 못 해 중학교 때 단발머리의 한 덩치 하셨던 무서운 한자 선생님께 매도 많이 맞았던 내가 중국어를 배워야 하다니..

출석만 네~^^(해맑게) 하고 대답하고 슬며시 뒷문으로 빠져나가길 여러번, 대부분의 중국어 수업은 재수강이 안 되어 그 이름도 슬픈 ‘D’와 재수강이라도 되니 그나마 덜 슬픈 ‘F’로 안타까운 결말을 맞았다..

그 당시 내가 한 말이 기억난다.

“차라리 영어가 낫겠어.. 중국어는 정말 나한테 안 맞아..ㅠ_ㅠ OTL..”
(지금은 “영어는 정말 안 맞아..OTL” 하고 있다..)

중국어가 정말 싫었던 나는 편입을 결심했고 6개월동안 김영편입학원을 다닌 후 6개월동안 친언니와 함께 (그당시 엄마와 함께 미용 일을 하던 언니는 다시금 대학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도서관에 아침 7시에 줄을 서 제일 집중하기 좋은 구석 자리에 앉아 밤 10시에 별을 보며 산뜻한 밤공기를 맡으며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언니를 내려다 보다가 (나는 언니보다 키가 크다) 언니의 풍성한 머리카락 속의 오백원짜리 동전만한 원형 탈모(!)를 발견하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언니는 더 이상 탁 트인 사람 많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용기를 내지 못 했고 편입시험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던 우리는 둘이 집에서 큰 책상을 가져다 놓고 서로 마주보며 앉아서 열공(열심히 공부..올드한 말..)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에서 공부를 하던 우리에게 어떠한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아버지의 전화통화 소리였다. (학원 차량 운전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낮에 집에 계셨다)

언제나 딴 세상에 사는 듯 세상 눈치에 둔감한 나는 아버지의 통화 소리에 별다른 것을 감지하지 못 했으나 언니는 아버지의 통화 내용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고 방에서 열심히 방문에 딱 달라붙어 소머즈의 감각으로 자세히 들어본 결과 아버지가 내연의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을 어머니께 알린 우리 자매는 그 이후에 여러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결국 이혼에 성공(?)하는 것에 큰 기여를 했다..(아직도 엄마는 그 결정은 정말 탁월한 결정이었어..하며 우리 모녀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시곤 한다..)

국어교육과 등 교육학과로 편입을 지원했던 나는 역시나 아쉽(지 않)게도 떨어졌고 또 역시나 그냥 안전빵으로 지원한 서울 D여대 독일어과에만 붙어버렸다..

(같이 편입을 준비했던 대학 친구는 독일어과에 가길 추천했으나 나는 독일어보다는 중국어가 전망있다고 여겼기에 입학을 포기했다. 훗날 남편에게 내가 독일어과에 갔었어야 했어..그랬다면 독일 유학을 가 독일 남자를 만났을텐데..하며 한탄했고 남편은 그것에 격한 동의를 했다..)

독일어과 입학을 포기하고 중국 유학길에 오른 나는 중국 항주에서 평생을 함께 할 나의 영원한 남의 편을 만나게 되었고 그와 함께 십년 가까이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편입 준비를 하던 그 당시 나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결국은 실패했고 그 당시의 실패는 나에게는 절망으로 다가왔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자랑하던 우리 언니는 뜬금없이 닥친 탈모의 충격으로 헤어나오지 못 했으나 결국 그 덕분에 우리는 아버지의 부적절한 내연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아버지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하시던 엄마를 어쩌면 평생 벗어나지 못 할 뻔 했던 아버지란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해드릴 수 있었다.

최선의 노력을 다 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맺었던 시험. 그 실패로 인해 가게 된 중국 유학. 그 곳에서 만나게 된 나의 영원한 반쪽. 내 사랑.

탈모의 충격으로 장시간 집에 있게 되어 우연히 발견하게 된 아버지의 내연의 관계. 그것으로 아버지 때문에 항상 괴로워하시던 엄마를 결국 아버지와 이혼하실 수 있게, 늦게나마 행복을 찾으실 수 있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

이 모든 것은 그 당시에는 절망으로만 보였던 일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결과였다..

부모님께서 드디어 이혼하신 후 언니는 엄친아(말 그대로 엄마친구아들)와 일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나는 중국 유학에서 만난 지금의 남편과 4년간의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엄마 말씀으로는 아버지와 이혼을 안 했으면 아버지 때문에 우리 두 딸들도 결혼도 못 했을거라고 하셨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저 절망으로만 보였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그 일 덕분에 내가 이렇게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 보석같은 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그 당시엔 행운인 줄만 알았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내가 그 일 때문에 더 성숙해지지 못 했던 안타까운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 지금 당장 절망으로 느껴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저 절망에 빠져있지만은 말자.

그 일이 나중에 돌이켜 보면 나를 더 나아지게 만들어준 보석으로 탈바꿈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지금 당장 행운으로 느껴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저 너무 그것에 빠져 주위 다른 것들을 돌보지 못 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자.

그 일이 나중에 돌이켜 보면 나를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게 만든 내 인생의 장애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일희일비하지 말자.

인생,

새옹지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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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없는 인생... 정답입니다.
세옹지만 역시 정답입니다.

북한과 남한으로 이렇게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대한민국의 이 엄청난 성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6.25 전쟁이 없었으면, 정말 아이러니 하게도
대한민국이 발전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뭐 그런 사건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개인사에서도 굵직한 것만 세도 손가락 발가락 다 써도 모자랍니다.

너무나도 큰 아픔이지만 그런 아픔이 없이는
성장이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괴로움이죠.

그래서 고통이 훗날 보면 기쁨으로 변해있고
기쁜 일인 듯 보였던 일은 슬픔으로 다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보는 끊임없는 시련 때문이라는 토인비 형의 말마따나
인간이 개체로는 너무나 연약해서
그로인해 이런 문명이 생겼다는 아이러니...

일희일비 하지 않겠습니다!!
ㅎㅎ 그런데 그러면 너무 무표정일라나 ㅋㅋ

자발적으로 일희일비 하기를 '선택'한다면
무지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올 것 같은데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일어나는 양은 같으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거 같아요~!!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글 너무 잘 읽었어요 메가님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뿐이기에
삶이 역동적이겠지요.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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