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목욕탕에 관한 짧은 단상

in #kr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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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목욕탕을 가는 목욕탕파와 평생 목욕탕을 가지 않는 비목욕탕파. 한국인을 이 두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전자다. 평생 건선이고 민감한 피부로 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뜨끈한 몸에 불리고 나서 시원한 물로 마무리하고 나오면 상쾌한 그 느낌, 보송해진 피부의 느낌이 참 좋았다. 하지만 그동안 이래저래 차일피일 목욕탕행을 미루고, 집에서 하는 샤워 또는 가끔 가는 욕조를 구비한 본가 방문으로 그 느낌을 채워왔다. 생각해보면 운동과도 약간은 비슷한 과의 일인가. 하기 전까지는 늘 생각하고, 해야함도 알고 있지만 막상 하기 까지가 오래 걸리는 미스테리. 마음을 먹는 것부터가 어렵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오랜만에 목욕탕엘 가서 나와 머리를 말리는데, 옆에서 머리를 말리던 한 사람이 꽤나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다. 통화속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힐긋, 나를 의식하는 눈치였다. 엄마 지금 목욕 끝내고 나왔어, 이제 나갈거야 라고 말하곤 끊는걸 보니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이내 나에게 말을 거는 듯, 아닌듯 허공에 대고 말을 한다. 어휴, 요새 애들은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요. 스물 다섯인데 아직 애야 애. 나는 대꾸는 않고 잔잔하게 웃었다. 들리지만 딱히 듣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머리를 말리는데 다시 집중한다. 그런 나의 태도를 느꼈는지 이내 화장대 다른 한 구석에서 몸을 닦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로 슬쩍 넘어가 말을 건다. 아니 언니, 저번에도 본것 같은데. 여기 근처 살아요?


 천천히 머리를 말리고 짐을 챙겨 나오려는데, 계속해서 말소리가 들린다. (어쩔수 없이 다 들리는 좁은 공간이었다.) 아니 그래서, 저쪽 아파트 산다구. 응응. 언니 나는 저기 뭐야 부동산 해. 가만 있어봐 내 명함 하나 줄게요. 친목을 다지려는 시도였나, 스치듯 생각했다가 또 잔잔한 웃음이 나온다. 언니는 잠재고객을 열심히 발굴하는 중이였던 거다. 짐을 하나하나 세며 챙긴다. 시계, 가방, 목욕용품, 핸드폰 등. 이번에 미국행 출장을 앞두고 선물 받은 잰스포츠 가방에 짐을 차곡차곡 담는다. 느리게.


 요새는 자주 웃음이 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의 작고 사소한 장면들을 혼자 포착하고선 즐거움을 느낀다. 혼자 중얼거리기도 한다. 재미있다고 느낀 어느 한 순간들이 쌓여 나의 하루의 침전물들을 조용히 개어주는 것 만 같아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숨기려 애쓰지 않는달까. 순수한 마음으로, 눈으로 사람과 사물들을 바라보는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나 싶다. 한동안 이런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고, 매일이 즐겁지 않았던 것 같은데. 긴장과 스트레스 불안의 연속이었던-타인의 불행을 내 마음으로 옮기기 힘들고, 내 자신조차 줍기에 바빴던-지난 날들은 찰나일지라도 결국엔 지금의 평화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


 종종 문득 생각나는 가사를 흥얼거리고, 읊기도 한다. 그러다 떠오르는 멜로디나 가사는 노트 귀퉁이에 적어둔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서 헤엄치는 백조같이 적당한 텐션으로 회복하는 중이다. 물론 머릿속은 달력을 펴두고 기한이 남은 일들을 빠르게 계산하고 게으름을 경계한다. 이토록 혼자만의 시간을 영위하고 있는 내게 목욕탕의 언니처럼 사교적인 유형의 사람을 목격하고 나서의 기분은 뭐랄까,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가장 가까운 말을 고르자면 조금 신선하달까.


 목욕탕을 자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의 계획이 되겠지만, 지키기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예전엔 얼마나 자주 갔는지 쿠폰제로 끊어서 격주로 방문하거나 아니면 환기가 필요한 시점에 슈퍼마켓을 가는것 마냥 다녀오곤 했으니까. 유당불내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욕후 마시곤 했던 그 달달한 인공적 바나나 우유맛은, 오랜 추억이자 습관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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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욕탕파로서.. 레일라님이 목욕탕파라니..! 추..충격적입니다..! 기회가 되면 진지하게 목욕론에 대해 듣고 싶어지네요.

레일라님이 웃는다니 상상만 해도 너뮤 좋아요 (엄마미소!)

비목욕탕파시군요.. 뭔가 서로 신기해하는중(?) 목욕론은 별거 없어요. 사우나파와는 또 다르기 때문이지요 (저희 어머니는 사우나파라는..) 말 나온김에 진지하게 목욕탕 담론을 형성해볼까 하다가 또 웃고 맙니다. 이런 시시한 웃음이지만, 스텔라님이 좋아해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전 비목욕탕파 인데.. 나이드니 한번씩 가는 목욕탕이 힐링이 되더라구요. 천천히 여유롭게 몸을 씻는 행위... 뜨끈한 탕목욕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

경계에 계시는군요. ㅎㅎ 여유를 가지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좋아지는건가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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