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일지] 작곡가들은 대체 어디서 영감을 받는가?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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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잘 보지 않는 텔레비전을 우연히 틀어 바래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소음에 취약한 편이라 일상적인 소음 외에 주변의 소음들은 민감하게 차단하는 편인데, 어제 조언자님 으로부터 마감이 있는 과제(?) 를 받았기 때문인 가능성이 큰듯.. 라디오는 소리를 녹화하는 방식으로 '대화' 또는 '해설', '음악' 에 초점을 맞췄다면 텔레비전은 (특히 한국 예능) 셀 수 없는 방청객들의 무분별한 반응, 박수, 지나친 효과음 등으로 수시로 바뀌는 현란한 화면과 매치 되도록 여러 주파수를 동시에 한꺼번에 내보내기 때문에 민감한 나는 한 시간 이상 듣고 있기가 힘들다. (상상 이상의 수준 차별과 혐오가 난무하기 때문에 부러 차단 하는것도 있지만)

    하지만 오늘은 일상적이지 않은 백색소음이 필요한 날이었다. 보통은 잠자리에 들기 한 두 시간 전에는 미디어를 접하거나 새로운 정보를 읽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머리를 비우고 온전히 잠에 들어도 푹 자는 날이 많지 않은 예민한 잠자리를 가지고 있는 나로선 잠들기용 화이트노이즈가 필수적이다.

    철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한국에서 사는 프랑스인 친구와 이 '잠' 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20대의 대부분을 잠과 씨름하며 보냈다고 한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고단한 몸을 침대에 뉘어도 떠오르는 온갖 일상의 잔해와 과거의 잔상들 또는 공부하고 있는 주제, 아이디어들로 인해 잠을 푹 자 본 날이 손에 꼽혔다고, 너의 잠 못자는 고통을 이해한다고 했다. 글쎄, 듣고 보니 나는 그 정도 까진 아닌데..(한번 잘땐 또 잘자니깐..) 보통 곡 작업을 하다 보면 옆에서 정말 간절히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때가 있는데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온갖 집중력과 에너지를 불태우고 나면 소모되는 그 정신력이란 순간 놓지 않으면 산산이 깨어질것 같은 약한 것이어서 쓰러져 잘만 자는걸. 하지만 가끔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하나 하나 의미를 곱씹으며 분석하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데, 겨우 잠이 들어도 새벽같이 눈이 떠지는 일 년에 몇 안 되는 주가 있다. 어제가 그 스타트를 끊은 날이다. 화면에서 나오는 몇 연예인들이 대화하는걸 흘려들으며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야기가 순간 그 집중력을 끊었다. 바로 곡 작업의 '영감' 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대화였다.

-넌 어떨 때 가장 영감을 많이 받아?

-전 샤워 할 때요.

-보통 잠잘 안자지? 자도 늦게 자고?

-그런 것 같아요. 밤에 생각을 많이 하니까 아이디어도 많이 떠오르고..

-되게 많은 사람이 샤워할 때 영감을 받는다고 하더라. 근데 그럼 어떻게 해? 적어놓을 데가 없잖아. 막 갑자기 뛰어나와서 온몸이 젖은 채로 써놓나? 하하

-맞아요. 제 몸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갈 때, 그리고 피부가 그 물에 닿는 느낌에서 새로운 영감을 많이 얻는 것 같아요.

-나는 요리할 때. 사실 요리할 때 정신없잖아,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해야 해서. 근데 난 멀티가 돼서 그런지 그때 가장 많이 영감이 떠올라. 이상하지.



    이 대화를 듣고 있자니 대학 때의 한 일화가 떠올랐다. 작곡 수업 과제 때문에 학교에 늦게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남아 있었는데 (집에선 집중이 안 되기 때문에) 같이 큐베이스를 찍으며 밸런스 조절만 끝내면 집에 갈 수 있다고 열을 올리던 선배가 옆에서 시끄럽게 한 구간 재생 반복을 틀어놓는 거다. 한 30분 정도 꾹 참고 내 할 일하다가 도저히 안되어서 말을 걸었다. 저 선배님, 밸런스 안 맞는 것 같아요. 헤드폰 끼고 듣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자 선배는 화들짝 미안하다며 재생 반복을 해놓은 줄도 몰랐다고 황급히 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헤드폰으로 아웃풋을 바꾼 후, 무려 10분만에 작업을 마무리하는 거다. 나는 아직 십 분의 일도 하지 못해 밤샐 각오로 커피를 리필하려 일어나던 찰나, 선배가 가는 길에 사주겠다며 손을 잡아 이끌었다. 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지라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온통 큐베이스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선배가 고맙다고 말을 꺼냈다. 뭐가 고맙지, 궁금해 하기도 전에 선배는 본인이 듣고 싶은 소리만 골라 듣고 있던 와중에 가장 들어야 할 밸런스를 화이트 노이즈로 간주하여 놓치고 있었다고, 작업할때 흔히 그런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나선 헤드폰을 끼고 듣는데 새로운 영감이 떠올라 다음 과제할 곡 스케치도 대충 적고 나왔다고 했다.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요점은 '소리', '감각(터치), '기후(온도), '대화' 등등 그 어떤것이든 곡의 영감이 될수는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나 보던 조그만 하얀 방에 혼자 갇혀 있는데, 어디서 새소리가 짹짹- 하고 한번 들렸다고 해서 베토벤의 Op. 몇장 같은 악상이 단번에 떠오른다는 수준을 얘기하는게 아니고. (내가 그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논할수는 없음..) 내가 그때 참을 수 없는 불편함에 말을 걸지 않았다면 선배는 끝내 영감의 사막에서 갈증을 갈구하다 나와 녹음실에 남아 일출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으러 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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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은 크게 멜로디 반주와 반주 작업으로 나눌수 있다고 하는데, 나도 가장 중요한 요소인 멜로디를 만드는 작업에 가장 공을 들인다. 내가 여태까지 들었던 많은 작곡 수업의 커리큘럼의 대부분도 어떻게 하면 좋은 멜로디를 만드느냐, 에 접목한 부분이 가장 많았을 정도. 과학적이고 계산적인 영역으로 곡 작업을 배우는 초반 단계와는 달리 어느정도 곡을 작업하는 훈련이 된 이후 부터는 어느정도의 감성적인 영감도 작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정복해야 할 것은 어레인지먼트인데, 멜로디가 아무리 좋아도 연주하는 악기의 특성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냥 별거 없는 미디 작업에 불과한 수준의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 주는 악보에 적힌 그대로, 정확하고 명료한 노트를 쳐야하는 연주자와는 달리 작곡가는 이 모든 화성과 연주자들간의 호흡을 미리 어레인지 하고 악보를 만드는 '작업자' 단계의 직업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버스를 타고 무심히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볼 때 영감을 많이 받는다. 나와는 상관 없는 사람들의 옷차림, 표정, 건물들의 색깔.. 이 모든게 파노라마처럼 주욱 지나가는 걸 보고 있자면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그중 악상으로 많이 변환되어 마치 캐치마인드를 플레이 하는것처럼 순간 걸러지는 형태가 생긴다. 곡의 형태나 분위기, 가끔은 화성이나 코드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그 순간 바로 확인하지 않으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바로 어플이나 튜너로 확인하고 적어놓곤 한다. 길을 천천히 걸을때 갑자기 떠오르는 악상들도 있는데, 가장 떠오르는 그럴듯한 이유로는 집에 앉아서 가만히 눈과 귀를 닫고 있을때보다 인풋이 많은 밖에 있을때 여러 소리와 감각, 냄새들이 교차되면서 뇌신경을 자극해 악상이 더 많이 떠오르는것 아닐까. 물론 악상이나 가사 외에도 영상 연출, 특정 분장이나 의상, 줄거리 등도 자주 떠오르는데 파리로 이사온 후 모아놓은 시시콜콜한 시나리오만 꽤 되는 편. 테마별로 노트에 정리해 놓았는데 지금 읽어보면 웃음만 나오는 수준이지만.

    가끔은 인풋은 너무 많은데 아웃풋이 없어 곡 작업이 원하는 만큼 활발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일들은 끝이 있고, 그 끝에는 마감이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어야 빛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음악뿐이 아니라 글쓰기도 마찬가지.. 언젠가는 그 어떠한 심리적인 압박 없이, 자유롭게 글과 음악을 쓰고 어떠한 제약도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져도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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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다 싶을때 자신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임하는 모습 아주 보기 좋은것 같습니다.

응원할게요 @laylador

감사합니다. 제 한계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응원의 댓글이 달리면 깨부수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⁰▿⁰ ...

화이팅!! 온맘으로 응원을 보냅니다!!! ^^

저도 전심으로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당^^ 같이 화이팅! 해요!!! ^^

뭔가 창작하시는 분들에게 항상 궁금하던 것이 이런 거거든요. 어떤 심리, 상황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지요. 얼마전에 제이미님 한테도 물어봤었는데 터치와 온도도 영감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니 참 신기하네요.

제가 무언가를 창작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쉽게 상상은 안가지만 어렴풋이나마 이해는 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네요.

지극히 제 작업 영감을 받는 과정을 적어논것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를수 있어요. ^^ 제이미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많은것에 영감을 다르게 얻으실수 있죠. 음악적 영감에서 터치는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하는데, 유명한 곡들중에 너의 숨결, 짜릿한 느낌, 부드러운 살결... 뭐 대충 비슷한 느낌의 가사가 많은걸 보면 알수 있습니다. 화성도 편안한 느낌을 많이 줄수 있는 오픈보이싱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구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다른 창작자 분들의 영감적 근원지가 늘 궁금하긴 합니다. ㅎㅎ

소중한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D
알기 쉽게 말씀해주시니 조금 더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아 멋지네요...
대마에 의한 영감은 어떤가요? ^^;;

프랑스는 대마가 합법이라 그런 질문을 종종 하시는분들이 있는데.. 대마의 각성 효과가 음악의 창작 과정에 어떠한 영감을 줄거라 생각하지도 않고 해보질 않아서 모르지만, 신경정신적인 효과는 주관적이며 개인편차가 있기때문에 사람마다 다를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오오 답변감사합니다 👍
엄청 자세하게 써주셨네요 ^^

난 하늘을 볼때 .....🌈

그 영감이 지금 저에게 마구 필요합니다. 보내주셔요 ㅎㅎ

휘이익~~~~ 받아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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