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붙이지 못한 단상들의 번호일기

in #kr4 years ago (edited)


  1. 사람도 사랑도 선택의 일부이며, 이를 포함한 모든 것은 선택의 연속이다. 근데 나는 왜 선택받지 못하는가... 중얼거리면서 테이블을 치웠다. 포크와 식기가 어지럽게 놓여져 있어 일단 시야에서 치우는 것이 급했다. 밖은 밤 9시가 되어도 훤하다. 적막보단 음악이 방을 채우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곧 흥미를 잃었고 시끄러운 총소리가 가득한 액션영화를 틀었다. 어지러운 화면 속 내 눈이 따라가는 대상은 금방 목적을 잃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거둘 수는 없었다. 갈 곳 없는 생각을 굴리다가 이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메모장에 적었다. 종이 위에 안착하는 동시에 안도감을 얻었다. 그나마 쓰이는건 이것 뿐이구나 싶어서.

  2. 게임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선 모두가 게임을 하고 있다. 즐기던, 어쩔 수 없이 행하건 어쨌거나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을까. 복잡한 정황속에서 게임을 할수록 내 자신은 드러나고 벗겨진다. 사람들 사이에 놓여진 룰은 단 한가지. 과거로 돌아가는 머신을 타거나 또는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는 수는 없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선택은 신중히 내려져야 한다는 공연한 룰. 설령 이를 거부하고 싶다 해도, 게임을 멈출 수는 없다. 선택은 앞만을 향해 나아가는 연속성을 띄기 때문이다.

  3. 몸 군데 군데 열이 난다. 입술, 손가락, 목 뒤, 발바닥... 사소하고 은근하게 달아오르는 열 때문에 괜시리 손을 쥐락 펴락 하고 선풍기에 목 뒷덜미를 대기도 하지만 쉽게 가시질 않는다.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지는 몇 주 정도 되었는데, 4년 전 나의 몸 상태와 굉장히 대비된다. 보이차를 아침 저녁으로 때로는 연습실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방문 횟수만큼 자주 마시곤 했던 그때 어느 한 곳 딱히 아픈 적이 없었고, 일년에 한번 의례 앓곤 하는 감기도 겪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차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몸 구석구석 퍼지는 따듯한 기운 덕분에 사시사철 찾아오는 바이러스에도 몸은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4. 이 중 가장 곤란한 곳은 입술이다. 조금이라도 피곤할라치면 슬금슬금 입술 주변이 간질거리기 시작한다. 잠을 한 두 시간 덜 자거나, 작업을 하느라 하루 종일 책상을 벗어나지 못한 날 다음날이면 백이면 백 입술 주변에 느낌이 왔다. 요동치는 입술을 각종 비타민 섭취와 생활 루틴을 돌려놓는 것으로 간신히 잠재우고 나면, 사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입술엔 더 이상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손으로 입술을 꾹 눌러봐도, 깨물어봐도 마치 내 살이 아닌 것 마냥 느껴지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 이리저리 들춰봐도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는데. 마치 치과에서 마취 주사를 놓은것 같은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5. 입술에 피어오르는 열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다른 것에 몰두해야 했다. 물론, 입술 외 많은 곳에서 열이 났다. 하지만 그중 신경 쓰이는 점은 입술이었다. 열이나는 곳 모두 신체의 일부였기에 소중하지 않은 곳 없었지만 왠지 입술만은 계속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신경을 자극했다. 가장 신경이 없는 곳에 신경이 쓰인다니. 웃긴 일이다.

  6. 읽을 거리는 넘쳐나지만 더욱 격렬하게 읽고 쓰고 싶었다. 가끔은 자신을 방에 가둬놓고 읽기만 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마음의 남아있는 잔해가 늘 훼방꾼을 자처한다. 끓이고 남은 차의 찌꺼기는 뜨거운 물에 남긴 향이라도 품고 있지, 마음의 찌꺼기는 쓸데없는 감정만 일군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망상에 빠진다. 맛있는 차 한잔이 간절해졌다. 그럼 몸을 달구는 열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식혀질 것만 같은데.

  7. 반가운 작가님의 신작이 이번주에만 두 권이 출판되었는데, 실상 전자책으로 발행되기 전까지는 읽을 수 없고, 설령 발행 된다해도 시간이 걸리기에 아쉬워하고 있다. 출판 준비중인 내 책보다 더욱 반가운 사람들의 소식이다. 문득, 나의 글도 누군가에겐 자신의 것보다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8. 모든 것은 선택의 연속성을 띄지만 그 중 대부분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일상처럼 선택 '되어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것들을 습관이라고 한다. 이 습관을 쌓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의지와 품이 필요하다. 예를들면 마우스를 딸깍거리거나 타이핑을 하는 일, 매일 매일 쏟아지는 정보들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대충 처리하는 일, 반가운 사람을 발견하고 (자동적으로) 손을 흔드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 습관들은 대부분 너무 낡았다. 그럼에도, 내가 '선택적'으로 행하는 일이라는 것에 의의를 두고 계속해서 나를 구성하는데 일조를 하도록 내버려 둔다. 더 이상 품을 들이지 않아도 유지되는 유일한 것들이니까.

  9. 바쁘면 얼굴만 비추고 가요. 이미 아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 외에도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많은 표현들은 실제로 잘못되었지만 대체 어디에 물어야 하는지, 어떻게 확인해야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을 꼽자면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얼굴을 비추다, 라는 표현이다. 거울에도 강가에 비추는 거라면 모를까. 상대방에게 얼굴을 비춘다 라는 표현이 왠지 낭만적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10. 지금 내게 가장 낭만적인 일은 쓰기와 얼굴을 비추는 일, 이 두 가지인 듯 하다. 매일 머릿속에 떠올랐다 희미해지는 개념들,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전부 일일히 적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어느 시간과 동기를 통하여든 다시금 떠오를때, 그 생각들은 기어코 쓰이고야 만다. 메모장에, 패드에, 선반 옆 책에, 가끔은 흔들리는 버스 안, 두켠 반의 휴지 위에도 쓰인다.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집요하게 쓰여진 생각 조각들은 금새 잊히거나 다시금 일상 속의 의미를 갖게 되기까지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다. 잊지 않기 위해, 사라지게 하지 않기 위해.

  11. 이번 주말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알차다고 해서 꼭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월요일이 될테고, 그렇다면 얼마나 시간을 알차게 보냈는가, 얼마나 시간을 허비하고 또 활용하였는가를 자문하며 괴로워 할 것이다. 선택과 집중. 둘 다 나에게 달렸다. 애잔한 일이다. 히비스커스나 한 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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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는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은 쉽게 되지 않네요 ㅎㅎ
요즘 저는 모바일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 모바일 게임 좋지요. 저는 복잡한건 하지 않는 대신 꾸준히 브롤스타즈 하나를 파고있어요. ㅎㅎ
선택을 받던 받지 않던 주체로서 밸런스를 유지해야 하는데.. eversloth 님 말처럼 감정이 따라오기에 참 어려운것 같아요. 잘 되지도 않고요.

읽을 거리가 넘치는 시절입니다. 다른 할 것들도 많고...

그러게요. 하루종일 읽고 듣는데 익숙해지는터라 점점 말하기 능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도 종종 듭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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