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무엇으로 글을 쓰느냐에 대해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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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를 말할 때 흔히, ‘정신과 육체의 협업 작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글쓰기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들을 육체적인 활동을 통해 ‘보이는 문자’로 나타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의 작용은 마치 정교한 생산 공정 같습니다. 머리와 마음에 담겨 있는 마법의 재료는, 펜을 들거나 자판에 손가락을 얹었을 때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합니다. 손을 움직여서 생산 라인을 가동하면 생각들이 손끝에서 문자로 생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이 물리적인 작용으로 가시적인 생산물로 변하는 그 공정을 생각하면 무척 신기합니다.

 펜이나 컴퓨터 같은 글쓰기 도구는 정신과 육체의 협업에서, 육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정신과 육체의 협업’이라는 공정의 측면에서 봤을 때 ‘글쓰기 도구’는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 위상을 철학적-인문학적으로 진지하게 논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흥미 거리 수준에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이름난 작가들이 어떤 도구를 가지고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얘깃거리일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훌륭한 기타리스트인 ‘에릭 클랩튼’이나 ‘지미 페이지’가 어떤 기타로 연주하는지 궁금한 것과 비슷한 정도의 흥미 거리일 것입니다. 어쩌면 낚시가 취미인 사람들이, 19세기의 전설적인 고래잡이배의 선장 B.j.허브가 그의 주종인 밍크고래를 잡을 때 작살을 썼는지, 고래 표면에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거대한 낚싯대를 썼는지에 대해 가지는 궁금증 정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치 챈 분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B.j.허브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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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

 사실 작가들이 펜을 들고 글을 쓰든, 타자기를 치든, 컴퓨터 자판을 눌러 글을 쓰든,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는데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단테가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서 <신곡>을 썼어도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고전이 되었을 겁니다. 물론 수정이 쉬운 컴퓨터로 썼다면 지워졌을 등장인물이나 묘사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쓰던 잉크가 떨어져서 막 쓰려던 날씨 묘사를 다음으로 미뤘다가 까먹는 일은 없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거대한 서사에 영향을 주진 못합니다.

 도구의 효율성에 있어 스포츠는 글쓰기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많은 스포츠는 사용하는 도구가 기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즐기는 운동인 ‘탁구’도 그 중 하나입니다. 탁구는 커트나 드라이브처럼 공의 스핀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하는데, 이 스핀을 잘 주려면 탁구 라켓의 고무 성능이 큰 역할을 합니다. 질이 떨어지거나 오래된 고무는 책받침처럼 미끄러워 공에 스핀을 주지 못하지요. 하지만 좋은 고무는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공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스포츠에서 도구는 기량과 경기 결과에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에 반해 글쓰기는 도구의 영향이 작가의 기량과 재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진 못합니다.(급하면 화장지에 아무 펜으로 갈겨써도 작품이 됩니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처럼.) 다만, 제각기 ‘차이가 있을 것이다’라고 느끼는 차이는 존재할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문체 면에서 작은 차이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작가들의 경우



 폴 오스터는 주로 만년필로 글을 씁니다. 늘 손으로 글을 쓰지요. 그는 자판이 자신의 글쓰기를 방해한다고 말합니다. 자판에 손가락을 얹으면 또렷한 생각을 할 수 없다고도 하지요. 그는 펜으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이런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펜은 (컴퓨터보다) 훨씬 더 원시적인 도구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말이 몸에서 흘러나오고, 그 말들을 종이에 새겨 넣는 과정을 느끼는 것이지요. 늘 글쓰기는 촉각적인 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육체적인 경험이라고 해야겠지요.” -폴 오스터


 타자기에 대해 특별한 감각이나 기억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가 바버라 애버크롬비는 <작가의 시작>이라는 책에서, 타자기로 한 작업은 수정하기가 번거로웠던 만큼 더 많이 생각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자신이 일하고 있다는 걸 알 정도로 요란한 타자기 소리도 좋았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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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속죄>의 작가 이언 매큐언은 폴 오스터나 바버라 애버크롬비의 느낌과 전혀 다른 견해를 밝힙니다. 그는 초기에 만년필로 작업하다가 타자기를 사용합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 컴퓨터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직접 원고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최종본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무척 만족스러워 합니다.

“워드프로세싱은 내면적이어서 생각하는 것 그 자체에 더 가까웠어요. 돌이켜보면 타자기는 엄청난 기계적 방해물이었던 것 같아요.”


 작가들의 경우만 살펴봐도, 글쓰기 도구들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르지요. 저마다 얼마나 익숙한지,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 느낌으로 쓸 수 있는지에 따라 도구를 선택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글을 쓰기 시작한 오늘 날의 젊은 세대의 절대 다수는 대부분의 글을 컴퓨터로 쓸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과연 펜으로 쓰는 글은 특별한 게 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또 하나의 재미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라는 필터를 거쳐 나온 산물



 지금은 많은 이들이 노트북이나 컴퓨터로 글을 씁니다. 자신만의 신념을 가진 몇몇 사람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럴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컴퓨터로 글을 쓰는 이유는 컴퓨터 글쓰기가 매우 큰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대 장점은 ‘효율성’입니다. 수정하기가 쉽고 타자에 숙달되면 펜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빨리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같은 분량의 원고를 쓰는데 훨씬 적은 시간이 드는 것이죠.

 사람들 중에는 효율성이 높은 기계보다 ‘핸드메이드’를 선호하고 거기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지요. 저 역시 대부분의 글은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서 쓰지만, 아직도 어떤 글은 펜으로 씁니다. 펜으로 글을 쓰면, 생각과 이야기가 몸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필터를 거쳐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조금 더 나다운 요소가 첨가된 글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정확히 문장의 어떤 면이 다르다는 걸 집어낼 수는 없지만, 똑같은 생각을 바로 컴퓨터 화면에 나타낸 것과 육체를 꾸역꾸역 거쳐서 종이에 글자를 쏟아낸 문장은 분명 어딘가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훈증을 거쳐 향이 추가된 고기 같다고나 할까요.

 손으로 쓴 글이 워드프로세서를 통해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지면, 글이 꽤 달라 보입니다. 더 세련되게 느껴진다고 할까요. 이런 점도 손으로 글을 쓸 때 즐기는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지저분하고 난잡한 육필 원고가 곧 워드프로세서를 통해 그럴싸하게 바뀔 거라는 기대감 말입니다. 글을 쓰는 순간의 만족도라는 건 어차피 이런저런 느낌이 좌우하는 거니까요.

 늘 자판을 두들겨 왔다면, 워드 프로세서를 밀쳐두고 오로지 펜으로 글 한 편을 완성해 보는 건 어떨지요. 문장에 다른 맛이 나는지 알아보는 것도 괜찮은 시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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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반격. 몰스킨의 감성과 잘 어울리는 글이네요 ㅎㅎ

디지털에 푹 젖어 있으니, 가끔씩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손으로 쓴 글이 워드프로세서를 통해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지면, 글이 꽤 달라 보인다. 더 세련되게 느껴진다고 할까

손으로 쓰면 느릿느릿 적기에 성질이 급한 저는 많은 단어를 함축하고 생각해서 쓰기란 어려운데 타자로 치게되면 정갈하게 그리고 빠르게 옮겨지니 마음이 조금더 가는편이에요. 손글씨와 컴퓨터는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사실상 뭘 더 선호한다 보단 뭔가 떠올랐을때 바로 옆에 있는 도구(?)로 그냥 막 휘갈겨 쓰는게 제일 많은 경우인듯 싶네요. ^^

확실히 도구에 따라 생각을 문자화 하는 속도 차이가 생기죠. 타자로 칠 때 조금 더 직관적인 느낌이 있죠. 생각이 바로 옮겨지는 느낌 말이죠.
효율성의 관점 말고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손으로 쓸 때 느릿느릿 하다는 건 긍정적인 측면도 있을 거 같아요. 또다른 '맛'이 추가될 여지가 있다는 것으로요.^^
레일라님이 어떤 악상이 떠올랐을 때, 책상 위에 나뒹구는 볼펜을 집어들고 악보를 막 휘갈겨 그리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 모차르트가 연상되네요.ㅎㅎ

기술이 발전해 생각을 그대로 도구 없이 바로 출력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그때는 컴퓨터도 지금의 펜과 같은 감성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치만 정제되지 않고 바로 출력되는 게 꼭 좋은 작업이 될 것 같진 않아요 ㅎㅎㅎ

네 동의합니다. 생각이 여러 곳을 통과할 때 독특한 뭔가가 더해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는데요. 바로 출력이 된다면 뭔가 심심할 거 같기도 하고요.ㅎㅎ
미래에 그런 도구가 나온다면 그건 '글'보다는 '말'에 가까울 거 같아요.

저는 컴의 출현으로 구제받은 케이스죠
워낙 초딩체라 글도 들이지만 써 놓으면 못봐줘요

글씨와 그림 실력은 상관관계가 없는 건가요?
금손 라흐님, 의외네요.^^

펜으로 쓰는 것은 왠지 낭만적일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원고지를 찢어 뭉쳐서 아무렇게나 버린 어느 작가의 방이 떠오릅니다..ㅎㅎ

네 가끔은 자기 혼자만 낭만을 느끼죠ㅎ
그 작가 누군지 궁금하네요. 이야기로 가득찬 방에서 사는 거군요^^

확실히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자기로 쓰는 글보다 직접 손으로 펜을 쥐어가며 적을 때, 조금 더 감성적이 되는 것 같아요. 글 수정할 때 손이 많이 가서 번거로운 느낌이 드는데 그게 또 아날로그의 맛을 불러 일으키는 과정일 것 같아요.

분명히 자판을 쳐서 쓰는 글과 펜으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쓰는 글은 느낌이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느낌이 다르면 글의 분위기나 문장에서도 조금 차이가 생길 거 같긴 합니다. ^^
디지털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가끔은 아날로그를 소환해줘야 신선한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ㅎㅎ

폴 오스터의 올림피아 타자기가 생각나는 글이네요 😊

ㅎ 폴 오스터가 타자기를 내세운 글도 꽤 썼지요. 타자기로 글을 쓰는 느낌도 한번은 경험해보고 싶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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