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나만 알던 누군가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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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에 정우 주연의 <바람>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겉으로 껄렁대지만 겁이 많은 정우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허세와 찌질함을 시전하며 졸업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다. 당시 그 영화는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 영화를 본 남자들은 거의 모두 영화와 주인공 정우의 팬이 되었다.

 정우가 연기한 고등학생의 모습은 우리의 고교 시절 언젠가 가졌을 법한 감정과 판타지를 자극했고, 그가 보여준 허세와 찌질함도 눈물겹도록 익숙한 것이었다. 나도 영화가 나온 이듬해 친구의 소개를 듣고 <바람>을 보곤 ‘숨은 명작’ 딱지를 붙여 내 마음의 전당에 걸어두고는, 주변에 숨은 명작을 찾는 이들이 있으면 소개하곤 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런 대단한 연기를 보여준 정우라는 배우를 왜 다른 곳에선 볼 수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2013년, 정우가 <응답하라 1994>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정우가 연기한 쓰레기라는 역할은 영화 <바람>에서 보여준 익살스러움과 찌질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반가웠다. 아, 이제야 빛을 보는 구나, 싶었다.

 드라마가 큰 성공을 거두자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 캐스팅 비화도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응답하라 1994>의 제작진이 영화 <바람>을 재미있게 보았기에 영화에 출연한 정우와 손호준을 캐스팅했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제작진과 이런 외적인 스토리를 공유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이제 정우가 나만 아는 배우가 아니라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지만 말이다.

2

 2004년에 두 번째 대학을 다녔던 나는 수업이 마치면 자전거를 타고 과외를 하러 다녔다. 학교와 가까운 거리는 아니어서 20~30분씩 걸리곤 했다. 난 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전거를 몰았다. 소니 CD플레이어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음악들이 나와 자전거가 달리던 거리의 배경을 바꿔놓곤 했다. 이소라의 <눈썹달>이라는 앨범도 그때 들었던 음악이다.

 이소라의 목소리가 내 귀로 스며들면, 자전거가 달리던 거리 위에 초승달 하나가 걸렸다. 세계는 필터 하나를 씌운 듯이 색채가 한톤 낮아지고, 마음은 고요해졌다. 내 자전거는 잠시 거리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을 달렸다. 나는 세계를 볼 수 있지만 세계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달려갔다.

 지금은 꽤 유명해진 곡이지만 그때는 나만 안다고 생각했던 <바람이 분다>가 귀로 스며들면, 과외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여야 하는 현실과, 근원적인 외로움과 좌절된 사랑의 이야기들 모두가 꽃단장을 하고 자전거 앞으로 등장했다. 외롭고 쓸쓸할 뿐인 대학생이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가진 풍요로운 인간이 되는 순간이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이소라가 자신의 씁쓸한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고 우아한 선율과 가사에 실어 내보이니, 나 역시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전 <비긴어게인>이라는 TV프로를 보다가 이소라가 <바람이 분다>를 부를 때, 문득 15년 전 과외를 위해 석양이 물드는 거리를 자전거로 내달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봤던 달과 거리와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신기한 건 그때의 기억만 떠오른 것이 아니라, 노래가 내 귀를 타고 들어와 내 심장을 건드리던 느낌과 기분까지도 느껴졌다는 것이다. 첫째 딸이 내 곁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현실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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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위에서 내게 숨을 불어넣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는 ‘나는 가수다’를 거쳐, ‘비긴 어게인’을 지나 이제는 유명한 곡이 되었지만, 한때는 나만 알던 명곡이었다.

3

 나만 안다고 느꼈던 누군가가, 무언가가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난 희열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낀다. 이렇게 좋은 걸 함께 공유한다는 기쁨 한편에, 보석을 은밀하게 보관하며 가끔 꺼내 즐기던 서랍 하나가 영원히 열려버린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훌륭한 것은, 좋은 것은, 언젠가 열리기 마련이다. 내가 언젠가 열리기를 바라는, 내 앞에 펼쳐진 길도, 내 삶의 새로운 페이지도, 끊임없이 ‘좋은 것’, ‘훌륭한 것’을 추구하다보면 열리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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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마인로고.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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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m13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jjm13님의 2019/3/22 JJM holder list

...dagascar cryptictruth earlmonk swapsteem
adal111 fur2002ks kyslmatepataty69 bbooaae
virus707에서 이어 받아서 정리하기 위해 다시 포스팅합니다.
JJM...

바람이란 영화 저도 보았어요. 익숙치 않은 엔딩도 기억이 남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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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셨군요. 짜임새 있는 영화였지요.^^

오.. 이 영화 별점은 높은데 잘 알려져있지 않아서 매번 클레멘타인 같은건가? 고민했었는데 실제로 괜찮나 보군요!

남자들은 특히 공감합니다. 더구나 배경이 부산이라 저는 완전 공감하면서 봤어요~^^

아아 부산!!! 남편이랑 보려면 통역까지 해야되는 영화였군요.

그 당시엔 정우가 무명 배우여서 영화가 별로 조명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구성도 좋고 캐릭터, 연기가 좋은 영화예요.ㅎㅎ

바람이란 영화도 있었군요!! 전 처음 들어보는데...ㅎㅎ
정우란 배우는 응답하라에서 처음보고 저도 좋아하게된 배우중 한명이네요^^

네 정우가 바람에서도 아주 활약을 한답니다.
바람에서 정우 선배로 나와서 코믹한 대사를 읊었던 배우가, '응답하라 1994'에서 미팅남으로 나와서 바람에서 했던 대사를 하기도 하지요.ㅎ "그래선 안돼~~"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바람'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장례식장에서의 장면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우 지금은 제 친구의 동생의 남편입니다. ㅎㅎㅎㅎㅎㅎ

혼자 간직하다 세상에 나오면, 저거 저거 나 전부터 아는 거야! 하고 자랑하고 싶어지죠.^^
허걱~~ 정우를! 친구 동생의 남편,,ㅎㅎ 꽤 가까운 인연이군요.
바람 보시며 비슷한 즐거움을 느꼈을 거 같네요.ㅋ

바람 완전 명작이죠~!! 저 세 번 봤어요 ㅎㅎ 정말 저의 학창시절을 보는 듯한^^;;
바람이 분다도 이소라를 워낙 좋아해서 나오자마자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다들 하시는 명곡이 되었네요^^

우리 스티미언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나만 알고 보고 싶기도 하지만 더 많이 알려져서 책이나 노래, 아니면 기타 유투버로 더 성공하셨으면 좋겠네요.

와~ 저도 세 번 봤는데요! ㅎㅎ 팥쥐님, 좀 아시는군요! ㅋㅋ
팥쥐님의 학창 시절,, 어떤 캐릭터와 비슷했을까요. 복학생,,은 아니..시죠?ㅎ
'바람이 분다'도 초기에 들으셨다면, 문화적 취향이 비슷하다고 할까요.

스티미언들 중에서 나중에, "아 이 분 나 알아!" 하는 분이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팥쥐님도 동화 작가로 대성하셔서,,^^

제가 열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열린 후엔 전혀 섭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활짝 열리길 바랍니다!^^

나만의 무언가가 대중의 무언가가 된다는 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받는 쾌감과 함께 그동안 고수해온 특별하고 흔치않던 나의 취향이 이제 흔한 유행이 되버릴 준비를 해야하는 서운함이겠죠? ㅎㅎ.. 누구나 느낄것 같아요. ㅎㅎ기쁘면서도 서운한 마음 그래도 기쁘게 축하해줘야겠죠 :D

하지만 훌륭한 것은, 좋은 것은, 언젠가 열리기 마련이다. 내가 언젠가 열리기를 바라는, 내 앞에 펼쳐진 길도, 내 삶의 새로운 페이지도, 끊임없이 ‘좋은 것’, ‘훌륭한 것’을 추구하다보면 열리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나만의 무엇이 모두의 무엇이 되어버리는 경험은 누구나 했을 법하죠ㅎ 우리의 글이 언젠가 모두의 글로 활짝 열리길 바랍니다^^

당시에는 그냥 B급 무비 느낌으로 봤었는데 여기 나온 배우들 중에 거물된 사람이 엄청 많아서 놀랍니다. +.+
정우랑 손호준도 그렇지만 황정음이 이렇게뜰줄 몰랐네용.

네 정우랑 손호준은 빵 떠버렸죠. 황정음은 그때 이미 주목을 받고 드라마 주연으로도 나설 때였는데 비중이 그닥 크지 않아서 좀 실망했던 기억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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