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비, 계속 올까요(2nd)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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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회사로 들어가자, 난 길 잃은 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차를 움직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다시 회사에 충성하기 위해 어느 병원 구석 병상에서 링거를 꽂고 누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자니 원래 일하던 이 시간에 집에 있으면 죄를 짓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내 정신이 조직 사회에 예속되어 버렸다는 방증이었다. 오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그 시간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 후회스럽지 않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난 대학가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예전에 자주 가던 북카페였다. 북카페에 가지 못한 2년이라는 기간은 회사에 입사해서 그때까지 보낸 시간과 일치했다. 그러고 보니 2년의 시간동안 ‘하릴 없이’ 어떤 행위를 해본 적이 없었다. 늘 어떤 목적에 따라 움직였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바빴고, 회사와 생활이 요구하는 것들이 많았다. 취업 전엔 목적에 따른 행위보다 하릴없이 하는 행위가 더 많았다. 몇 년 사이에 내 행동의 패턴이 이렇게나 달라졌다는 것이 놀라웠다.

 오늘, 하릴없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릴없는 시간’은 상공에서 등을 떠미는 스카이다이버 교관처럼 나를 상념의 공간으로 떠밀고 ‘나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도록 했다. 난 날고 있었다. 생활과 나 사이에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을. 난 나를 내려다보면서 한없이 떨어졌다. 이런 세계가 있었다니. 생활과 나 사이에.

 건물 2층으로 올라가는 북카페의 회색 계단은 내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다시 돌아와야 할 곳으로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모든 것이 반갑고 신기했다. 창살 문양으로 세공된 북카페의 섀시 문과 사자가 조각된 손잡이도 반가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난 이곳으로 돌아오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이들이 서가가 둘러싼 넓은 공간에 있는 1인석에 앉아 책을 보거나 노트북을 펼쳐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몇 개 되지 않는 창가 테이블 자리는 세 커플의 연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밖과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공간이었다. 그곳을 떠도는 음악은 비온 날의 습기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빈 1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 북카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할 때 자주 들렀다. 취업 준비를 하며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다른 곳에 쓰는 건 아까웠는데, 이곳에 쓰는 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곳에서 주로 하던 책 읽기와 글쓰기는 내게 있어 생산적인 일이었다. 이곳은 일종의 공장이었다. 내 이름이 찍힌 정신의 재화가 생산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 쓴 돈은 소비가 아니라 투자에 가까웠다.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은 다 바뀌었고, 50대 초반의 사장만 그대로였다. 사장은 예전처럼 음악을 플레이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가끔씩 마우스를 움직여 음악을 틀곤 했다. 늘 고개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단골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에게는 손님을 끄는 것보다 음악을 틀고 책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와 말을 섞은 기억은 없지만, 난 그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 같은 날 그가 예전 단골이었던 날 알아보고 근황을 물어왔다면, 2년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압축해서 들려줘야 할지 잠시라도 고민에 휩싸였을 것이다. 나 자신도 정리되지 않는,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알지 못할 그 시간들을 남에게 말해야 하는 부담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은 동네 입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큰 버드나무처럼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가 오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말도 건네지 않는 존재 말이다.

 주문 벨이 울려서 아이스 카페라테를 찾으러 갔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뚜껑이 달린 플라스틱 잔을 건넸다. 잔을 들자 얼음이 서로 부딪히면서 서걱대는 소리가 났다. 난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한 모금을 빨아 마셨다. 커피는 분명 매번 바뀌는 아르바이트생이 만들 텐데, 어쩜 이렇게 커피 맛이 한결 같을까. 이곳에서 커피를 만들다보면 손맛이 다 똑같아 지는 걸까. 아니면 커피를 만드는 테이블 위에 카페라테 만드는 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걸까. 커피 맛은 더 나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았다. 기계로 찍어낸 것처럼 일정했다. 커피 맛이 나빠진다고 해도 이곳에 오는 사람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곳에 커피 때문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커피 맛을 불평할 수는 있어도 장소를 옮기진 않을 것이다. 이곳은 다른 목적을 갖고 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곳에서 썼던 소설을 떠올렸다. 국어국문과 출신이라면 명색이 소설 하나쯤은 써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썼던 소설이었다. 작은 발상에서 시작된 문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꼬리를 맞댄 문장들은 이야기가 되었다. 난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을 이곳에서 썼던 것이다. 오전에 취업을 위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오후에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비로소 이곳에 올 수 있었는데, 원고지 200쪽의 중편을 삼일에 걸쳐 썼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의 그 희열이 아직 손가락 끝에 남아 있다. 그 소설은 어떤 목적도 없이 씌어졌다가 단 세 명의 독자에게 읽히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내가 그 당시 쓰던 구형 노트북의 윈도우가 깨졌을 때 사망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유일한 인쇄본은 급하게 메모할 종이를 찾던 어머니의 눈에 띄어 일부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곳에서 생산한 생각들은 그렇게 제 갈 길로 갔다.

 서가에서 영화 잡지 하나를 꺼내서 자리로 왔다. 고등학교 땐가, 영화를 소개하는 잡지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왜 봐야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그냥 보면 되는 것이지, 왜 굳이 그런 수고를 할까. 영화를 그냥 보고 자신이 느끼고 싶은 감정을 느끼면 되질 않나. 왜 남의 생각이 중요한 걸까. 그런 저런 짧은 생각들을 했던 것이다. 나중에 영화 잡지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영화를 보는 일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볼 영화를 미리 훑고 대비하기 원한다. 자신이 느낄 감정에 대해서, 떠올릴 깨달음에 대해서. 고2때 늘 영화잡지를 가지고 오던 친구는, 나의 영화 잡지 무용론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필요 없으면 안 보면 되잖아?”
 애초에 녀석은 나와 그 문제를 두고 논쟁할 생각이 없었다. 나의 생각이 그 친구에게 조금의 설득력도 발휘하지 못했던 이유일 것이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초점 잃은 눈을 하고는 서 있는 내가 불쌍했던지, 녀석은 한 마디 덧붙였다.
 “궁금하잖아. 똑같은 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똑같은 걸 보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해 했던 친구는, 영화 평론가가 되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 친구가 평론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내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국문과에 오긴 했지만, 별다른 동기가 없었고 글을 쓰는 일은 거리가 멀어 미래를 떠올리면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나고 보면 다행스럽게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전공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인쇄기에 들어가는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의 사무직이었다. 간접적이나마 난 출판이라는 산업에 기여하고 있었고, 그 출판의 저작물에는 내가 배우거나 들었던 문학의 일부가 들어차 있을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도 난, 내 전공을 살려서 일을 하고 있다고 있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영화 잡지 두 권을 샅샅이 훑고 나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밖의 빗줄기는 눈에 띄게 가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밖으로 나가긴 싫었다. 난 이미 예전에 느끼던 소박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겐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고, 또 아무도 묻지 않을 그런 행복감이었다.

 이곳에 오무라이스를 판매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식사 메뉴는 그거 딱 하나였다. 하다못해 라면이라도 끓여 팔 수 있을 텐데, 아니 왜? 요새 말로 이거 실화냐, 하기 적합한 상황이 아닐까.

 난 그녀의 브리핑이 끝났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도 점심을 먹을 누군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잠시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 때문에, 그녀로 인해, 그녀에 의해, 내가 이곳에 있는 게 아니었던가. 이곳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보다 예전의 ‘나’를 더 생각하고 집중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계기로 얻은 시간에, 나는 뜻밖에도 나와 대면하고 있었다.

 “오므라이스 좋아하세요?” 거두절미하고 그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의 브리핑이 끝났을 거라는 보장이 없고, 직접 전화를 한다는 게 어쩐지 쑥스러워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오므라이스면 위로가 될까요?” 1분도 안돼서 그녀에게 이런 문자가 왔다.
 “축하가 아니고, 위로인가요?”

 “네. 확실히요. 과장님이 일찍 퇴근 시켜 주셨어요. 그게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30분쯤 뒤에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그녀가 내 앞에 있었다. 줄곧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한 커플이 마침내 자리를 비운 창가 자리에 우린 마주보고 앉았다.


To be continue. 3편에 계속.


P.S.

 어제 학교에 글을 쓰는 노트북을 두고 왔었기에, 2편을 쓰지 못했다는 변명을 해봅니다. 소설 쓰기는 괴로움이자, 희열입니다. 이렇게 저를 괴롭히는 일도, 이렇게 저를 황홀하게 하는 일도 없거든요. 그런 괴로움과 희열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저는, 오늘도 맛있는 글을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드립니다.
 빨래가 다 되어서 아까부터 제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래를 널고 체력과 시간이 되면 좀 더 놀다 자고, 둘 중 하나도 안 된다면 첫째 딸 옆에 몸을 누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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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느낌 너무 좋은데요!
다음편 기대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ㅎ 느낌있게 써보겠습니다.ㅋ

소설쓰기야말로 창작의 고통이자 창작의 기쁨이죠. ^^ 저는 시간만 나면 다음 회차 내용을 구상합니다. ㅡ.ㅡ 꿈에서도요. ^^

네 매일 쓰려면 그 이야기에 푹 빠져 살아야 하지요.ㅎㅎ 고통도 감수할만큼 짜릿한 일이죠.^^

오늘도 좋네요... 마약같은 매력이 있네요. 어서.. 어서.. 다음편을!!

매력을 느껴주시니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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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재밌당 ㅠㅠ 오므라이스 먹고 싶어지네요 ...

오므라이스 협찬 받아야겠군요ㅎㅎ

소설 쓰기는 괴로움이자, 희열

저에게 소울메이트님의 소설 읽기는 평화이자, 쾌락!

평화와 쾌락! 젤 좋은 것들을 주는군요ㅋ 에빵님의 평화와 쾌락을 위해 건배!!^^

소울메이트님, 주말 동안 하릴없는 시간을 충분히 즐기시길 바랄게요. 전 숲속에서 하릴없이 멍 때리고 싶어요ㅎ
학창시절엔 스크린, 씨네21? 같은 영화잡지 보는 거 좋아했는데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잡지를 거의 안보네요. 잡지 보는 것만으로 영화를 보 것처럼 뿌듯했었죠. 패션잡지도 그렇구요.

하하. 제게 하릴없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렇겐 안될 것 같네요.ㅋㅋㅋ 우리 둘째가 이제 곧 돌이라, 오늘 돌상을 차리고 가족들 모여서 사진 찍기로 했어요. 주말에도 즐거운 육아는 계속 될 것이구요.ㅎㅎ
마담님, 숲속에서 멍때리는 주말 되세요!! ^^

이제야 보들레르의 글이 들어옵니다. 처음 듣고 굉장히 충격적이라 생각했거든요. 영감이 고작 매일 일하러 가는 것이라니... 아 그거누됐고, 그녀를 만났군요 이제 ㅎㅎ

매일 영감을 만나러 갑니다.ㅋㅋ 할머니 말고 영감이어야 합니다.(죄송요;;;)
그녀를 끝까지 안만날까도, 잠시 고민했습니다.ㅋ 남자 혼자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끝나는 것도 재밌을 거라고요.ㅎ

잼있습니다~어서 다으편보러~휘리릭~

휘리릭~ 새벽에 오셨군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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