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삼월의 비, 삼일의 빗속에서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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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일 동안 비가 내렸다. 오늘도 아침부터 날이 흐리다. 출·퇴근길에 함께 등·하원을 하는 네 살 딸은 차에 타면, 아빠 창문 닦아! 라고 외친다. 앞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이 와이퍼에 쓸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 아이는 탄성을 지른다. 와이퍼를 켜두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인다. 다음 작동 시간까지 아이는 기다리지 못한다. 우리의 영웅들이 “영미!”를 외치듯 “아빠!”를 외친다. 나는 아이에게 네가 주문을 외우면 창문이 닦일 거라고 말한다. “얍얍!”이라고 외쳐보라고 한다. 아이는 “얍얍!”을 반복한다. 아이의 주문이 우연히 와이퍼가 움직이는 타이밍에 맞기라도 하면 아이는 내게, “창문 닦았어, 창문 닦았어.”를 반복한다. 난 그래 창문 닦았네, 라고 대답하며 아이의 무한반복 스피커를 오프 시킨 뒤 다시 운전에 열중한다. 차 안을 채우는 음악을 듣는다.

2
 내 취향의 노래를 가득 채워둔 CD에선 마침 존 박의 ‘그 노래’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래 속의 화자는 어떤 노래를 듣고 옛 추억을 떠올린다. 그 추억 속엔 설렘과 고통과 사랑했던 그녀가 있다. 이 노래가 아니라도, 난 모든 노래에서 옛 추억을 떠올린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걸맞게 무겁고 음울한 선율이다. 절규하듯 내 지르는 존 박의 목소리와 꽤나 잘 어울린다. 가만, 이 노래,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멜로디다. 그래, 김동률도 이 노래를 불렀었다. 찾아보니 맞다. 멜로디에 김동률이 묻어 있다. 김동률이 만들어준 노래를 존 박이 불렀고, 2년 뒤에 김동률이 직접 불러 앨범에 실었던 노래였다. 김동률의 목소리로도 많이 들었던 노래.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 생각엔 어떤 노래를 듣고, “아 이건 그의 노래다!”라고 특정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스타일이 확실히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니까. 글에서도, 그림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신경숙의 초창기 소설들이나 김훈의 소설을 보고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아 이건 소울메이트 것이 맞구나, 문학잡화점 표구나! 한다면 내 스타일이 구축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건 시장 한 복판에서 10년 전의 지인이 내 얼굴을 알아봐준 것처럼 반가운 일일 것이다.

 노래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지금 나는 다시 그때 그 날로
너로 설레고 온통 흔들리던 그 날로~

3
 비와 관련된 영화가 개봉했다.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영화의 일본판은 2005년 초에 개봉했고, 난 그 해 가을쯤 대학교 안에 어두컴컴한 DVD 자료실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러브레터> 이후로 일본 멜로 영화를 꾸준히 보았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를 거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냉정과 열정 사이>, 그리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까지. 하나같이 조심스럽고, 공손하고, 내향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일본 멜로 영화에 푹 빠졌던 시절, 난 그때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고, 공손하고, 내향적이었던 내가 했던 연애들이 그 시절의 영화처럼 아스라한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의 20대를, 철없고 풋풋한 시절을 아는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라는 사람이 가진 고유의 것들을 더 많이 보존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대학교의 어두컴컴한 DVD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작은 교대의 규모만큼이나 작은 곳이었다. 감상실 옆에 있던 사무실에서 DVD를 고르고, 대출 대장에 제목과 내 정보 등을 기입하고 나서 감상실로 들어간다. 한 열 두 평 정도나 될까. 내가 자취하던 원룸의 방과 비슷한 크기였으니. 벽면을 빙 둘러 도서관처럼 칸막이가 있는 책상에 컴퓨터 화면과 DVD플레이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감상실에 들어서면, 세상 고독한 사람들로 보이는 몇몇이 커다란 헤드셋을 끼고 저마다의 영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연애 중인 사람은 절대 들어오지 않을, 어둡고 꿉꿉한 장소였다. 난 자취방에서도 홀로 영화를 볼 수 있었지만, 가끔씩 그곳에 들러 꾸역꾸역 영화를 보았다. 자취방에서는 진짜 혼자였지만, 그곳에선 홀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고독의 연대’로 묶인 느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작고 어둡고 눅눅한 DVD 감상실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딘지 영화스러운 느낌이 있었다고 할까. 그 때문에 그 감상실에 들어서면, 작은 영화의 일부가 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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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와 관련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20대의 초입에 봤던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20대 중후반까지 내 인생의 최고 영화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이의 로맨스라니. 더군다나 아주 가끔, 한석규와 이미지가 비슷하다는 얘기를 듣던 내게 이 영화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주인공들의 극중 이름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정원이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창문을 열고 여름의 바람을 맞는 장면이나, 자신의 죽음 후에 홀로 남겨질 아버지를 위해 TV리모컨 사용법을 스케치북에 적어 내려가는 장면이나, 청순하고 순진한 주차관리원 다림과의 소박한 데이트 장면 등. 이 영화 곳곳의 많은 장면들이 마치 내 이야기였던 것처럼 내 장기 기억 저장소에 기록되어 있다. 많은 장면 중에, 소나기가 내리던 날, 정원과 다림이 작은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장면은 낭만의 절정이었다. 후에 교양과목으로 포토샵을 배웠을 때, 맨 먼저 한 것이, 이 장면의 스틸 컷 속 한석규의 얼굴을 내 얼굴로 합성한 것이다. 그런 만행을 통해서라도 삐뚤어진 애정이나마 표현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면 용서 받을 수 있을지.

5
 한때 애창곡 중에, 윤종신의 <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엔 이런 가사가 있다.

비가 오면 가려진 우산 속에
더 가까이 그대의 내음 느꼈죠.

 오늘처럼 우중충하고, 삼일동안의 비가 포개진 날엔 이런 노래를 듣는 게 답이다. 낭만이 죽었든 살았든지. 그게 여러 날 내리는 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윤종신, <길>


P.S.

오늘도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잠이 드는 바람에,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까스로 일어나 쓰던 글을 마무리해서 올린다. 삼일 연속으로 잠이 드니, 이거 잠드는 게 습관으로 굳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다.
정겨운 이웃들의 포스팅도 보고 싶은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낮에 둘러볼 것을 다짐하며, 본의 아니게 불금이 된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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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날 '그 노래' 무한재생하면 좋겠네요. 노래는 항상 추억을 간직하게 해주는거 같아요 ~!!

네 그 노래 맑은 날에도 마음을 센치하게 만들더라구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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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good! Thank you! ^^

저는 같은시간 같은공간에서 계속 들었던 그 노래들이 들려오면 그 시절이 생각나요. 추억을 로딩하는 그런 느낌? ㅎㅎ

네 노래가 추억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모든 감정에 노래가 매칭되어 있는 거 같아요ㅎ

차 안에서는 음악과 함께해야 제맛이죠~
가끔 혼자일때는 미친놈처럼 크게 따라부르기도 하구요~~ 잊고있던 노래찾아 “아 맞다!! 이 노래였지...” 하며 아무생각없이 흥얼거릴때가 참 좋은것 같습니다.
요즘엔 날이 좀 풀려 딸아이와 오픈에어링 하는 맛이 좋네요~~~

딸이 아빠가 듣는 노래를 허락해주지 않고, 나비야를 외치는 일이 많지만요ㅋㅋ
딸과의 드라이빙 즐겁지요ㅎ

자전거 여행 중 군산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묵었던 숙소 아저씨의 소개로 소고기 무국을 먹으러 갔었는데, 그 집 바로 앞에 글쎄 ‘초원사진관’이 있더라구요.
영화 속 그대로 그 자리에 말이죠.
그들이 타고 타닌 오토바이도 세워져 있도, 다림이의 주차단속 티코도 세워져 있고요.
사진관 쇼윈도우에는 앙다문 입술의 다림이 사진도 있고요.

소고기무국도 맛있었지만 ‘초원사진관’을 만나 더 즐거웠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작년에서야 그 좋아하던 영화를 찍었던 곳이 군산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ㅎㅎ 출장가서 우연히 알게 되었지요.
영화에서 보던 초원사진관과 다림이가 타고 다니던 주차단속 자동차 등을 보면서 설레는 기분이 되살아났지요^^ 그곳을 지나셨군요. 그 소고기무국집도 알 거 같아요. 담에 가족들과 또 와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신기합니다.
맛집, 관광지,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 하며 떠들썩하게 홍보하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이렇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앞으로는 긍정적으로 봐야겠는데요..ㅋ

스팀가격이 떨어지는 절대보팅금액이 줄어드네요...
ㅠㅠ
그래도 같이 힘냅시다!! 화이팅!
후후후 딸기청이나 만들어볼까합니다!
https://steemit.com/kr/@mmcartoon-kr/6jd2ea

감사합니다. 짱짱맨!^^

<지금 만나러 갑니다> 리메이크 됐군요! 이 영화 좋아했는데 +,.+
소울메이트님 글을 읽고나니 비에 젖 듯 추억에 젖어듭니다!

배우가 소지섭. 손예진이라니 더 기대가 되는데요.ㅎ 곧 비에 젖은 추억 그림 하나 그리시려나요?^^

저도 한때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다시 좋아해 봐야겠어요. 비 오는 날도 나름 운치 있는데. 그쵸? :)

네 비오는 날, 운치있지요ㅎㅎ 대학 다닐땐 비오면 자체 휴강하고 집에서 분위기도 잡았었는데요ㅋ

비오는날 듣는 음악은 그 감성이 더 짙게 다가오는것 같아요. ^^ 쏠메이트님 글은 단번에 앗 쏠메이트님 글이다 라고 알아차릴만큼 잔잔한 색이 있어요. 저 개인적으론 위에 언급된 8월의 크리그마스같은 느낌이랄까요. :) 지금 만나러 갑니다 영화 리뷰 보니 괜찮더라구요.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느낌의 글~ 아주 기분좋은 비유입니다ㅎㅎ 짙은 감성이 무색하게 오늘은 날씨가 아주 쨍쨍합니다ㅋ

밀라노에 빗소리 ㅎㅎ
그 한 컷으로 냉정과 열정도 비영화가 되는 군요 ㅎㅎ

저도 비가 오면 감성이 녹아버리는데
상담공부하며 알게된것
.....그냥 성격이래요. ㅎㅎ
지금 만나러 갑니다.
본 영화인데... 기억이 하나도 안나요 ㅠㅠㅠ
뭔가 잔잔하고 슬펐던것 같은데..
저의 착긱인듯합니다. 이런 기억의 편집.

네 인상적인 장면에서 비가 왔다면 비영화의 자격을 얻게 되는 거죠ㅎ 비가 오면 감성이 녹는 사람들이 많은데 성격이군요. 간단하네요^^
저도 오래전 본 영화라 자세한 기억은 없어요. 소지섭 손예진 버전이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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