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s daily] 등 하나 켠 밤에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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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가졌었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것 같은 걸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그런 영화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호주머니를 뒤지게 된다. 내가 뭘 잃어버렸나 하고.

 한편으로, 지금은 없지만 예전엔 이걸 가졌었지, 하는 생각이 들면 가슴이 마구 뛴다. 설레기 시작한다. 사람은 다가올 것에도 설레지만, 지나간 것에도 설렌다.

 몇 년 전에 봤던 영화, <플립>이 그랬다. 호주머니를 뒤지게 하고, 가슴이 마구 뛰었던 그런 영화.

 영화는 풋풋한 소년 소녀의 설레는 감정을 보여주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주인공들의 주변 인물을 통해 삶의 신비한 단면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요즘 영화들의 강렬함과 자극에 뻣뻣해진 감성을 말랑하게 풀어주는 영화, <플립>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소는 그냥 소이고, 초원은 그냥 풀과 꽃이고, 나무들을 가로지르는 태양은 그냥 한줌의 빛이지만 그걸 모두 한번에 같이 모은다면 마법이 벌어진단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봐야지."



2

 언젠가 그녀에게 빠져 있을 때, 세상의 모든 좋은 언어를 끌어와서 사랑을 노래했다. 줄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고, 그거라도 해야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제어할 수 있었다. 내 심장에 고인 감정들을 언어의 빨대를 꽂아 배출하지 않으면, 심각한 내상을 받을지도 몰랐다.

 그녀와 멀어지고, 또 다른 그녀를 만났을 때도 난 사랑을 노래했다. 새로운 그녀를 만날 때마다 내 언어는 진화했고, 뼈대만 앙상했던 사랑의 노래에 살이 붙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바치는 노래는 부드러우면서도 격정적이었고 악기가 추가된 4중주처럼 풍성해졌다.

 내 언어는 날마다 살이 찌고 풍성해졌지만, 그 언어의 목적지에 서 있었던 그녀들에 대한 내 마음이 점점 더 풍성해진 것은 아니었다.

 헌사를 보냈던 누군가는 희미해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았다. 사랑을 노래하던 언어의 풍성함이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의 크기를 증명하지는 않았다. 언어는 그저 자신의 길을 걸었다. 언어의 풍요로운 정도를 떠나서, 나의 표현은 언제나 바로 그때 그녀에게 보낼 수 있는 최대치였다. 그 최대치의 용량이 점점 늘어난 건 그저 시간의 마법 때문이었다.

 언어와 기억은 다른 길을 간다. 그런 점에서, 빈곤하기 그지없는 언어를 주었던 사람이, 그 후 언젠가 풍성한 언어를 보냈던 사람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녀도 나도, 언어에 속아선 안 된다. 언어가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다. 정직한 건 시간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걸 밝히 보여준다. 적막한 밤에 작은 등 하나 켜진 방에서 떠올린 사람이 내 가슴을 쿡쿡 찔러대면 확실히 알게 된다. 시간만이 정직하다는 걸.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걸.


3

 오늘도 아슬아슬한 경계를 걷는다. 나를 보여주려고 하지만, 전부는 곤란하다. 그렇다고 내가 아닌 건 더 곤란하다. 내가 묻어 있고, 나의 체취가 나야하지만 나를 다 드러내선 안 된다. 내가 내뱉는 말은, 내가 쓰는 글은 그런 것이다.

 나를 말하지 않지만 나를 드러내는 것, 숨기지만 또렷한 것, 가리지만 빛이 가 닿는 것, 내가 쓰는 글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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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하니 글을 쓴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네요.

의식하고 쓰는 건 아니지요ㅎ 좋은 주말되세요^^

저는 거짓말을 하기 싫기 때문에, 시간이 알량한 거짓말이었음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매우 속이 쓰립니다. 자연히 맹세하지 않게 되는데, 그렇다고 믿음을 주지 못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맹세하지 않고도 믿음을 줄 수 있는 게 바로 고수의 경지지요.ㅎㅎ
소수점님은 바로 그 경지에 있군요.ㅋ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며
지내야하는데 나무만 보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요즘이네요

다들 그렇지 않나 싶어요.
그러다가 뭔가에 자극 받아 다시 시선을 멀리 던지곤 하는.ㅎ

언어와 밀땅 중이시군요..ㅎㅎ

힙합 밀당녀 육지담이 갑자기 생각나네요.ㅋㅋ

정직한 건 시간뿐이다.

밤에 전등을 켜놓으면 기분이 묘해요. 세상에 나혼자 남겨진 기분 어느때보다 솔직해지고 나도 몰랐던 숨겨진 마음들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해요. 다시 또 전등을 끄고 아침이 되면 일상을 살아가기도 하지만요. 유독 어떤 시간의 잔상은 오래가죠.

그 아슬아슬한 그 경계 솔메님은 늘 걷고 있었군요. 전 다 보여주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지라... 많이 배워가야겠어요 ^_^

밤에 전등을 켜고 그냥 막 손가락을 놀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면 이렇게 다분히 추상적인, 관념적인 글이 쏟아져 나온답니다.ㅎ 자주 이런 식으로 쓰는 건 아닌데, 가끔씩 날 것을 요리하는 기분으로 이렇게 쓰면 조금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지요.

고물님에겐 자신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있지요. 그걸 잃지 마세요.^^ 모순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고물님 같은 누군가는 다 보여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묘한 경계를 오가지요. 그래서 고물님의 글은 흥미로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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