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집 1화 : 무제

in #kr6 years ago (edited)

요즘 들어 찾을 일도 별로 없는 녹색 창을 열어, 적당한 키워드를 검색한다. 또 이름 바꾸고 어딘가에 숨어들어가 있겠지. 역시나, 딱 느낌이 오는 이름이 있다.

혹시나 해서 최신 글을 몇 개 클릭해본다. 그럼 그렇지, 하나도 열람이 되지 않는다. 그제서야 가입하기를 누르고, 다소 귀찮은 가입 질문에 답을 한다.

벌써 38번째 가입이다. 매번 다른 닉네임을 정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 바람에 최근에는 방치해둔 트위터 계정으로 메시지가 날아들기도 했다.

"우선 연락만 하고 지낼 수 없을까요? 저는 서울 사는 자영업..." - 이런 글은 패스.

"혹시 OO에 글 남기신 분 맞나요? 아니라면 실례했습니다. 혹시 본인이시면, 인간 심리와 관계를 깊이 있게 아시는 분 같아서..." - 이런 글은 읽어는 주지만 결론은 패스다.

별달리 기대하는 말도 없는데 왜 이럴 여지를 열어두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어쨌든 힌트는 내가 뿌려두었고, 그걸 알아보는 몇몇이 있었을 뿐.

어차피 하루짜리겠지만, 새로운 듯 아닌 듯 한 닉네임을 넣는다. 이번에는 새로운 아이를 발견할 수 있기를.

첫 글을 작성한다. 역시나 가입인사 게시판 빼고는 접근도 안 되게 해두었다.

정직하게 글머리를 선택하는 이상, 조회 수는 단숨에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일명 희귀 성별, 희귀 성향이란다. 조금은 우습다.

가입인사를 빙자한 낚시 글을 올린다. 사실상 거의 복붙이다. 이제 탈퇴해도 상관이 없다. 쪽지함이 미어터질 테니까.

그 다음에는 매의 눈으로 정말 처음 쓰는 것 같은 쪽지를 골라낸다. 나이가 어린 것이 중요하지는 않은데, 경험이 없는 것은 중요하다. 어디서 길들여져 온 상대는 싫다.

주로 카톡 아이디 정도는 바로 보내온다. 요즘은 유독 라인이 많은데, 거른다. 내가 라인 계정이 없으니까. 새로운 계정 만들면서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이 바닥에는 나 같은 사람이 부족하다.

고르고 골라낸 쪽지에서 카톡 아이디를 읽어본다. 이 분야 전용 아이디 같지도 않고, 신선한 느낌이다. 곧장 추가를 해본다. 이런, 프로필에 떡하니 본인 얼굴이 있다. 예상한대로 앳된 얼굴이다. 대뜸 말을 건네 본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기다렸다는 듯한 타이밍. 마음에 들어.

어디 살아?

저는 OO동이요.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해본다. 걔의 답변 하나하나에 내가 관심을 못 느끼는 게 티가 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넌 진짜 처음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벌써 38번째라고. 다행히 나름대로 고민의 시간을 가져본 아이 같다.

섣부른 호기심만으로 이런 곳에서 연락해오는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기대를 갖고 있다. 마치 인터넷에서 캣우먼 의상이랑 채찍이라도 주문해야 될 것만 같다. 진지한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른 것도 아니지만.

어떤 거에 관심 있냐고, 최대한 심드렁한 티를 내지 않고 물어본다. 비슷비슷한 답변들이 돌아온다. 공통점이 있다.

너무 아픈 건 싫어요. 심리적인 게 좀 더...

내가 아주 약간의 기대감을 갖고 물어보는 질문들은 매번 정해져 있다. 가령 이런 것들.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 짧고 굵은 막대기 중에서, 넌 뭐가 좋아? 비슷한 강도로 맞는다는 가정 하에.

이때까지 한 번도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뭔가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 못했거나 과거에 보지 않은 것이 하나 없다. 상관은 없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으니까.

근데 언제부터 이런 거 해보셨어요?

글쎄, 매번 똑같은 결말인데 그게 의미가 있는 질문이려나.

있잖아.

네?

진짜 나 같은 성향인 사람은 누굴 괴롭히고 싶거나 때리고 싶은 게 아냐. 결국 귀찮아하게 돼.

뭘요?

그냥, 다. 너 같은 애가 바라는 것들을 해주는 것보다는 안 해주는 편이 나 같은 사람한테는 더 만족이 된다는 거지.

오늘도 그렇게, 가장 이해를 못할 상대에게 가장 솔직한 속마음을 얘기해버린다.

내가 누군가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느낌은 참 버겁다. 환상도 그러할진대 현실이라면 생각도 하기 싫다. 사라지고 싶다. 사라져야만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그럼 왜 굳이 타인이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확인만 한번씩 해보면 된다.

만나서 반가웠어.

차단, 삭제. 짧은 의욕의 짧은 꼬리. 그렇게 38번째 시도는 끝난다. 한숨 자야겠다.

Sort:  

이른 아침 잘 보고 갑니다!굿모닝~

아침에 글 쓰시는군요. 감사합니다!

ㄷㄷㄷㄷㄷ
뭔가 심오하네요 ㅋㅋㅋ

뭐 그렇지는...ㅎㅎㅎ

저같은 멍충이를 위해 혹시 나중에 소설에 대해 간단한 설명 글 올려주실수 있나요?

아뇨...철학서에서 읽은걸로 상상한거라서 더 이상 설명이 안돼요 ㅋㅋㅋㅋ

음... 무슨 시도인지 여쭈어봐도 되나용?

음...그냥 만나지도 않고 지워버릴 상대이지만 물색해보는 거 자체가 시도이죠(결말이 정해졌다고는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고...). 특이(?) 성향이라는 장치가 들어가긴 했지만 꼭 그런게 아니었다 하더라도 마지막 부분은 성립될 수 있으니까요...

이름이랑 소개 바뀐 거봐. ㄱㅇㅇ
가즈아가 아니었군요. 선비체로 급선회 합니다. 크흠

블로그 이름이랑 소개가 살짝 바뀌었길래....그것의 발견이 기뻐서 그만..자중하지 못 했군요 크흠

움? 스팀잇 오류가 났었나...아니면 바뀐걸 늦게 알아채신 듯?^^

와.. 나 진짜 그런거 빠른데..내가 늦은 거 였다니.. 제이미님 '글에만' 너무 몰입을 해서 그런 듯 -,-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들렀는데...
누나. 고민은 나중에 하고 일단 자요.

누나라고 부르실 일(이유)은 없을텐데요? 가즈아에서도 형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후훗...게다가 소설입니다.

음.... 어떤글을 블로그나 개인 SNS에 올린거 때문에 이상한 분들이 많이 꼬이고 계시나요? 귀찮으시겠어용...

소설이에요 ㅎㅎ

아 소설이였나여? ㅋㅋㅋㅋㅋㅋㅋ 아 ㅋㅋㅋ 보다보니 글제목을 까먹었내요 ㅋㅋㅋㅋ 다행?이예요 ㅋㅋㅋㅋㅋ

어,, 이거 살을 붙여서 좀 길게 쓰면 더 재미날듯하네요.
도입부가 잘 이해가 안되긴 했지만... 내가 카톡을 안해서 그런가...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 단편 이상으론 못 쓰겠어요. ㅎㅎ

우와 직접 쓰신거예요?
소설이라길래 퍼오신건줄알았는데

ㅎㅎ퍼오면 안되는거죵...그 아이 옷 얘기 쓰신 분이죠?감사합니다 ㅎㅎ

우와~ 글 정말 흡입력있게 잘 쓰시는 듯~!!!
마지막
책갈피.PNG
이 파트는 표현이 넘 좋아서 몇 번을 곱씹었네요~ㅎ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단편 처음 써봐요. 도입부 쓰다 버린 장편은 한 두 개 있었는데...이제 앞으로도 단편은 근자감으로 올려볼게요. ㅋㅋ

변태성향? 흥미로운 글이에요ㅎㅎ

슬픈 이야기 같은데요. ㅎㅎㅎ

와..진짜...진짜.
뭔가 혹하면서 흡입력도 있고 너무 잘 읽히고...
진짜 대박 단편소설이네요 ㅎㅎㅎ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주위의 시선때문에 내비치지 않는 내면들.
여러가지로 생각이 되네요
그리고 마치 경험해본 듯한 구체적인 스토리라인...으응...?? 'ㅡ'??

첫 단편인데...감사합니다. 이제 근자감으로 단편들 써볼거에요 ㅋㅋ
(마지막 불손한 줄은 무시)

ㅋㅋㅋㅋㅋㅋㅋ제 댓글은 항상 마지막 줄이 중요포인트인데!! 왜!! ㅋㅋㅋㅋ
왜 항상 마지막 줄만 무시하나요 ㅋㅋㅋㅋ
앞으로도 진짜 근자감의 힘으로 좋은 단편 부탁해요 ^-^ ㅎㅎㅎ

사실 소설이란 말 일단 빼고 만우절인거 이용할라 했는데 이러는 분들 있을까봐 소설이라고 밝힘ㅋㅋ

Coin Marketplace

STEEM 0.31
TRX 0.11
JST 0.034
BTC 66765.98
ETH 3234.00
USDT 1.00
SBD 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