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포스터

월25일이 다가오면 반공포스터를 그렸다.
미술시간에도 그리고, 숙제를 내줘서도 그리고, 반공포스터 그리기 대회에 나가서도 그렸다.
그러나 아이들 백명이면 백명이 다 똑같게 그리는 것은 북괴
(북한이라는 말이 없었다. 북한괴뢰를 줄여 북괴라고 했다)의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지도도 북한은 빨갛게 칠했다. 북한이 빨갱이라면 남한은 그 반대로 파랭이라고 해서 아이들은 남한을 파랗게 칠했다.

빨강, 파랑이 칠해진 우리나라 지도는 남한국기의 태극과 모습이 닮아있었다. 아이들은 포스터 아래나 위에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북괴군' '반공 방첩'과 같은 구호를 써넣었다.

반공 표어 짓기도 거의 의무적으로 해가야 했다. 숙제를 내주니까. 표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아이들은 언니나 형의 것을 베껴다 냈다. 그래봐야 그 게 그 거였지만. 잘된 포스터와 표어를 뽑아 6.25날 운동장 조회시간에 상을 줬다. 그 아이들은 반공포스터

그리기 대회 학교 대표로 뽑혔다. 대표로 뽑히면 다시 포스터를 그릴 때도 있고, 전에 그린 것을 대회에 그냥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반공 웅변대회도 해마다 열렸다. 그런데 반공 웅변은 어찌된 일인지 가난한 애들은 잘 못했다. 못먹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가난한 탓에 아이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학교에서는 웅변반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웅변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반공웅변대회도 학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도대회, 전국대회가 있어서 학교끼리 경쟁을 했기 때문이다.

웅변원고의 단골메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는 이승복의 절규(최근 기자들 사이에 그 보도가 가짜였다, 아니다 하는 논란이 있었다)와 '일천구백오십년 유월 이십오일, 새벽 네시'로 시작하는 전쟁 이야기였다. 또한 오른 손과 왼 손을 치켜든 뒤 허공에서 양손을 부르르 떨며 '이 연사 소리높여 외칩니다'도 단골메뉴였다. 듣는 사람은 딴청을 하다가도 그 소리만 나오면 박수를 쳤다.

그러나 웅변원고는 아이들이 썼다기보다 선생님의 작품일 경우가 더 많았다. 길에도 그런 구호는 많이 붙어있었다. 반공 구호의 베스트셀러인 '의심나면 살펴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같은 것이었다. 양철판에 써서 전봇대 같은 데다 묶어놓기도 했고 동네

반장집이나 통장집 대문 한쪽에 꼭 붙여놨었다.

빨간삐라(북한에서 퍼뜨린 불온삐라를 빨간삐라라고 했다)를 주워오면 학교에서 상품을 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상품으로 주는 연필을 타려고 동네 뒤 돌산을 뒤지기도 했다. 재수가 좋으면 남산이나 한강과 기찻길 주변에서 뭉텅이째 불온삐라를 줍기도

했는데, 한 사람이 여러장을 내도 상품은 하나 뿐이라 아이들은 서로 나눠서 학교에 냈다. 물론 아이들이 주워온 삐라의 장수를 합산해 1년에 한번 6.25날 많이 주워온 아이들에게 '삐라상'을 주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