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그 시절 놓친 영화, 접속. 1997作

in #kr6 years ago

그 때, 1997년.

등소평이 사망하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다. 대법원은 전씨와 노씨에게 무기징역과 17년형을 확정지었다. 무너졌던 성수대교가 재개통되었고 DJP가 연합했다. 그리고 50년 만에 야당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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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20년 전 영화를 꺼내 든다. 말로만 들었지 그 당시 초딩이었던 나는 이제서야 보고 있다.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는 것을 보니 옛날은 옛날이다. 먼지가 쌓인 테이프에서 들려오는 음질처럼 영상도 분위기도 배우들도, 그리고 감성들도 모두 옛날이다. 예전 아버지의 첫차가 나오는 걸 보니 더 옛날을 실감한다.


두드드두드 딱. 드두드드두 딱.

여자(@여인2)와남자(@헤피엔드)가 접속했다. 보란듯이 보이는 옛날 모니터 화소의 파란 화면 위로 대화들이 채워진다.

@해피엔드 '이수현님이 맞습니까?'
@여인2 '끄덕끄덕...'
...(생략)
@해피엔드님이 퇴실하셨습니다.
@여인2 '잠깐만요. 아직 친구 얘길 못 들었잖아요.' (쪽지를 보냈습니다.)
...(생략)

남자는 진실을 묻고 있는데 여자는 거짓으로 답한다. 여자는 pc통신을 통해 노래를 신청했고, 라디오 pd인 남자는 매일 이 노래를 주파수로 흘려 보내고 있다. 같은 곡이지만 각자의 사연은 다르다. 진실이 듣고 싶은 남자와 거짓이 꼬리를 무는 여자. 꼬리는 물려 버렸고 진실은 듣지 못했다.
pc의 전원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여인2는 일말의 가책을 느낀다.


파란화면이 없는 현실에서 두 남녀는 헤메인다.

@여인2는 같은 방을 쓰는 친구의 남자를 두고 헤메인다. 친구의 남자는 아슬한 선을 넘나들며 그녀를 헤메이게 만든다. 친구의 남자를 연기한 배우는 이때부터 찌질의 대명사가 되었구나.
@헤피엔드는 옛 여인을 잊지 못해 헤메인다. 같이 일하는 작가는 그것도 모르고 pd와 작가의 역할을 넘어서는 관계를 원한다. 작가를 연기한 배우는 이때부터 비련의 대명사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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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듯 인연

랜선을 사이에 두고는 옷깃을 스칠 수 없다. 받은 메세지를 읽고 싶지 않다면 삭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매개체가 생겨났다. 각자의 사연이 있던 그 음악. 여인2는 방송국으로 팩스를 보내고, 소포를 보낸다. 그녀는 그날 거짓의 까닭을 전하고 싶었다. 미안했다고. 그녀가 전하려던 사과의 메세지가 포스티잇에 씌여지고 카메라 속 프레임에 담겨 사진으로 전해졌다.

@여인2 '언젠가 당신 같은 남자를 본 적이 있어요.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려는 길이었는데 한 남자가 저를 불렀어요. 막 제대를 했는지 짧은 머리 였어요. 자기가 아는 여자와 너무 닮아서 착각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한 참 걸었는데 그 남자가 저를 따라왔어요. 한 번만 더 얼굴을 보고 싶다며, 잠시 동안 제 얼굴을 들여다 봤어요. 허탈하게 돌아서는 그 사람이 자꾸 떠올라서 그날 밤은 늦게 까지 잠을 못잤어요. 당신이 그 남자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변명같지만 그날 전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 뿐이에요. 미안해요.'
@헤피엔드 '사과하려고 애쓰지 말아요.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사과하는게 중요한가요.'
@여인2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모르잖아요.'
@헤피엔드 '왜 그 음악을 듣고 싶어하죠.'
@여인2 '글쎄요, 설명하긴 힘든데. 혹시 그 분 만나셨어요?'
@해피엔드 '아니요. 그 얘긴 그만 합시다.'

진실과 거짓의 대화는 물러 가고 이제 서로의 이야기가 오고 간다.


랜선 연애상담

둘은 일상으로 돌아왔고, 또 헤메인다.
해피엔드는 지속적인 만남을 원하는 비련의 여인을 따돌리고, 여인2는 룸메이트와 헤어지고 지방으로 발령난 찌질남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따돌린다.
그렇게 다시 파란화면 앞에 앉은 둘.
따돌려야만 했던 고충, 냉철히 던지는 충고. 놓을 수 없는 고충을 숨기려는 남자, 냉철한 충고로 다시 받아치는 여자.


pc통신은 사랑을 싣지 못했다.

찌질남과 비련녀를 정리한 그들은 서로의 사소한 일상을 랜선을 사이에 두고 공유한다. 혼자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컵을 들고 졸다 물을 쏟은 적이 있는지. 그러나 레코드가게에서 우연히 스쳐간 것 처럼 각자 혼자 본 영화를 보고 나온 같은 극장에서도 당연히 그들은 이미 스쳐 지나쳤다, 서로를 확인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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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림과 만남의 속도

해피엔드에게 차마 놓을 수 없던 고충은 계속해서 쌓여만 갔다. 마지막 선물을 보낸 옛 여인은 엘피만 남긴 채 저 세상 멀리 떠나갔다. 해피엔드에게는 이제 이 땅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호주 이민을 계획한다. 그렇게 수현(여인2)과 동현(해피앤드)은 엇갈린다. 이제 막 파란화면을 벗어나 현실에서 마주하기 전이었다. 남겨 놓은 음성사서함은 쌓여만 가고 받는 이가 없는 자동응답기는 주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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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엘피판을 들고 있는 수현을 동현은 알아 보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빵빵했던 담배 한 갑이 구겨질 만큼의 시간 동안 동현은 극장 건너 까페에서 수현을 내려다 본다. 수현은 긴 기다림을 뒤로 한 채 까페로 들어가 마지막 사서함을 남긴다. 까페에는 같이 듣기로 했던 Velvet Underground - Pale Blue Eyes가 흘러 나온다.


진실이 알고 싶던 해피앤드와 거짓을 답한 여인2. 그렇게 서로를 인지 할 수 없는 파란화면속 가상의 세상에서부터 수현과 동현은 엇갈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현은 점점 해피앤드가 되어갔고, 여인2는 점점 수현이 되어갔다. 동현이 수현을 마주하고도 망설일 수 밖에 없던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나는 그곳에서 해피앤드였을까, 동현이였을까를 그는 긴 시간 동안 고민했을 것이다.

보는 나도 고민을 했다. 만나야 좋은 것일지, 그냥 지나쳐야 아름다울지.

그 시절 엇갈림과 만남의 속도가 주는 감성이 부럽다. 지금은 공백조차 허용하지 않기에.

단성사 맞은 편, 이름도 처음 들어 본 피카디리 극장에서 '접속'을 보신 분들에게는 그때의 그 감성이 조금은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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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늘 고맙습니다.

대학 새내기 시절, 처음 데이트했던 사람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 영화가 제 감성을 어찌나 찔러댔는지. 제 기억이 맞다면, 한국영화의 황금기가 이 영화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에 볼만한 영화들이 쏟아져나왔죠. ^^

네 맞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돌려 그 시절 영화들을 찾아 보려합니다. 배우 한석규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래된 한국영화중에 명작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이 영화도 그렇고요ㅎㅎ
저는 한석규님 나온 영화중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제일 좋아합니다.
팔로우 하고 가요!ㅎㅎ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중저음의 직접 부르신 ost도 정말 좋아했었습니다.
저도 방금 전 팔로우했습니다!ㅎㅎ

피카디리에서 봤습니다. PC통신에서 알게 된 아이와의 첫 만남... 영화에 나오는 피카디리 옆 건물 그 카페에서 커피 한 잔하고 저 영화를 봤죠. 이렇게 말하면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면 아직 어릴 때입니다. 조숙했을 뿐이죠😏

저는 pc통신을 모르는 세대라...아니 컴퓨터 이용의 시간이 늦어서 잘 몰랐어요.ㅎㅎㅎ그 까페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가 매일 흘러나왔겠죠?^^

저 당시에도 pc통신을 모르거나 알아도 못하는 애들이 많았어요. 컴퓨터 없는 집도 진짜 많았죠. 카페에선 아마 A Lover's Concerto가 나왔을 겁니다. 기억 안 나지만 저때는 어딜가나 저 노래를 틀어대서 - -;

스팀과 스달이 키스를 했네요!
스팀과 스달의 가격상승은 고래도! 뉴비도 모두 춤추게 할텐데!
즐거운 스티밋 라이프!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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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0년 전인데 정말 아날로그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드네요 정말.
덕분에 추억놀이하고 가요 :) 감사합니다.

지난 글을 이렇게 찾아주시고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 )

좋은 글 올려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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