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안경. 설 특선, 방콕에서 보기 좋은 영화. #1

in #kr6 years ago

movie_image.jpg
설 전날, 오라는 까치는 안오고 감기가 덜컥 찾아왔다. 집에서 명절을 보내는 것이 이렇게 다행일 수 없다. 춥지도 않은 날씨가 더욱 춥게 느껴지니 따뜻한 방콕에서 영화나 보는 것이 감기를 쫓아낼 유일한 방편이리라.


왔다, 그녀가.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자 사쿠라가 도착했음을 인지한 민박집 사장 유지와 미카코. 사쿠라는 매년 초봄의 조용한 해변가에 위치한 민박집, 하마다를 찾는다. 사쿠라는 하마다에 묵으며 해변가에서 빙수를 팔고 있다. 물론 그녀의 역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지만 말이다.

하마다, 그곳에 타에코도 찾아왔다. 간판은 너무작아 자세히 찾지 않으면 보이질 않고, 주인이 그려논 약도를 보고는 쉬이 길을 찾아 올 수도 없는 그곳에 말이다. 이곳에는 휴대전화도 통하지 않는다.

하메다의 주인장, 유지는 타에코에게 말한다. 누군가에게 전해줄 도시락을 준비하며.
movie_image (12).jpg

헤매지 않고 찾아온 손님도 3년 만입니다. 재능 있네요. 여기에 있을 재능.

햇살이 스며들고 새가 지져기는 아침이 밝아왔다. 자고있는 타에코앞에 사쿠라는 무릎을 꿀고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인기척에 놀라 일어난 타에코에게 사쿠라는 활짝 웃으며아침인사를 건낸다. 음악소리에 이끌려 해변가로 간 타에코. 그녀의 눈 앞에는 좀 전에 자신을 깨운 사쿠라를 필두로 동네 아이들이 알 수 없는 동작으로 체조를 하고 있다. 그곁에는 민박집 사장 유지도 함께이다. 그녀를 발견한 유지는 타에코에게 함께하기를 권유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는다.

민박집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듯한 이곳의 분위기가 타에코에게는 좀 처럼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관광할 곳을 묻는 타에코에게 주인장 유지는 이곳 근처에는 관광할 만한 곳이 없다고 말한다. 그럼 무엇을 하며 지내냐는 질문에, 유지는 답한다.

'사색'

권유도 강요도 아닌 이곳의 분위기에 타에코는 좀 처럼 적응하기가 어렵다.

더는 이곳에 머물기는 무리라 생각했던 타에코는 숙소를 옮기기로 결심한다. 옆 지역의 다른 숙소로 옮기기로 했다고 민박집 식구들에게 전한다. 그곳은 사색을 즐기기에는 무리라며 고개를 절레 흔드는 사람들. 타에코는 말한다, 자신은 사색을 즐기러 온 것이 아니라고.

movie_image (5).jpg


차가 있는 하루나와 함께 숙소를 떠나는 타에코. 둘은 하마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잠시 길을 헤메는 하루나는 유지가 적어준 약도를 타에코에게 건내며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약도는 출발지와 도착지를 잇는 선 하나와, 덧 붙여진 설명이 전부다.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2분 정도 더 참고 가면 거기서 오른쪽입니다.

난해한 약도에 의아해 하며 이런 설명으로 어찌 찾아가냐 묻는 타에코지만 하루나는 단번에 알아 듣고 자신있게 엑셀 페달을 밟는다. 그렇다 이곳 사람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상하다. 같은 언어지만 좀 처럼 이해하지 못할 그들만의 언어가 따로 있는 느낌이랄까.


옮긴 숙소앞에서 타에코는 또 한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서있다. 하마다에서도 나름의 규칙이 존재했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도착한 그곳에도 규칙이 존재했다. 자연의 혜택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자급자족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고민할 이유도 찾지 않고 바로 숙소를 떠난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존재하는 숙소는 단 두곳 뿐. 돌아갈 곳은 하마다밖에 없다. 그러나, 타에코는 유지가 적어준 약도를 읽어내지 못한다.

빙수가게 앞에서 장기를 두며 떠난 타에코를 걱정하는 유지와 사쿠라. 무거운 캐리어를 끌며 길을 나선 타에코는 아침을 마다하고 떠난 것이 후회된다.
movie_image (11).jpg

지친 몸을 캐리어 위에 얹어놓고 잠시 쉬는 사이, 굽이진 길 저 멀리서 자전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시야에 들어온 자전거에는 사쿠라가 타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타에코는 몸을 일으키지만, 사쿠라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친다. 얼마 못가 브레이크를 잡으며 고개를 돌리는 사쿠라, 그녀의 표정은 냉담하고 단호하다. 캐리어를 끌며 다가오는 타에코에게 하마다만의 언어로, 표정으로 말하고 있다.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캐리어를 놓고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탄 타에코. 그제서야 빙긋 웃는 사쿠라.

movie_image (8).jpg
이제 타에코도 하마다에 묶을 준비가 된 듯하다.


타에코가 하마다를 숙소로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조건, 그 하나면 충분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요모기가 하마다로 찾아왔다. 타에코를 선생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하니 스승과 제자사이인 듯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혼자 있고 싶어 떠난 여행지에 자신을 쫓아 찾아온 오묘기를 내치지 않는 걸 보니 둘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듯하다.

movie_image (10).jpg


자전거를 손보고 있는 유지에게 타에코가 묻는다, 사색하는 요령이 따로 있는 것인지.

요령이라. 예를들면, 옛 추억을 그리워한다던지, 누군가를 곰곰히 떠올려 본다든지.

그럼 유지씨도 누군가를 곰곰이 생각하곤 하는 건가요?

전 그냥, 그저 여기서 차분히 기다릴 뿐입니다. 흘러가 버리는 것을. 하지만 그때 그 빙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저도, 코지도 아마 이곳에 없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코지는 중요한 건 뭐든지 챙겨두는 버릇이 있어요. 근데 무엇을 갖고 있는지,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그게 코지의 장점입니다.(코지는 유지가 키우는 개) 먹어보면 좋을겁니다. 사쿠라씨의 빙수.


사쿠라의 빙수를 찾은 타에코와 오묘기. 빙수에 들어가는 재료는 단 세 가지. 그릇 밑에 팥을 깔고 그 위에 얼음을 갈아 얹어 시럽 한 큰술로 마무리. 인생빙수를 만난 듯 타에코는 말없이 연신 숟가락을 움직인다.

빙수를 다 먹고 값을 치르려는 타에코, 사쿠라와 유지 미카코는 또다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의아해 한다. 좀 전에 다녀간 얼음가게 아저씨에겐 얼음으로 대신 했고, 지난 번 꼬마에겐 손 수 접은 종이접기를, 유지와 하루나는 만도린 연주로 값을 치뤘다고 말해준다.

빙수에 들어갈 팥앙금을 만드는 것에도 사쿠라는 서두르지 않는다. 조용히 익어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 초조해하지 않으면 언젠간 반드시...


잠시 세상과 단절한 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자 했던 타에코는 하마다에서 조금씩 자신이 떠난 이유를 찾아가는 듯하다. 어느새 처음에는 이상해 보였던 메르시 체조를 함께하고 있다.
movie_image (13).jpg

바깥세상에선 별 대수롭지 않았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소중하게 느껴진다.
movie_image (9).jpg

선생님, 여행은 문득 시작되지만,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거죠.

'무엇이 자유인지 알고 있다, 길을 똑바로 걸어라, 깊은 바다에는 다가가지 말도록, 따위의 그런 당신 말은 팽개치고 왔다, 달빛은 어느 길에나 쏟아진다, 어둠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보석과 같다, 우연히도 인간이라 불리며 이곳에 있는 나,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무엇과 싸워 왔는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짐을 내려놓을 즈음, 좀 더 힘을, 부드러워질 수 있는 힘을, 무엇이 자유인지 알고 있다, 무엇이 자유인지 알고 있다.'


어느새 계절은 바뀌어 장마가 찾아왔고, 사쿠라는 하마다를 떠났다. 사쿠라 자신도, 유지도 하루나도 떨어지는 빗방울에 떠날 때가 왔음을 알아챘지만 타에코는 알지 못했다. 타에코도 이제는 떠나도 좋겠다 싶었다. 짐을 싸고 다시 하루나차에 올라탔다. 하루나는 이번에도 역시 길을 헤멘다. 타에코에게 약도를 건내며 봐주기를 청한다. 약도를 펼쳐든 타에코는 이제 읽을 수가 있게 되었다.

하루나는 자신 이후로 유지가 적어준 약도로 하마다를 찾은 것은 타에코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쾌거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유지가 말한 '여기에 있을 재능' 그 의미를 타에코는 떠나며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해가 바뀌어 또다시 초봄이 찾아오고, 그녀가 올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는 유지와 하루나, 빙수가게를 손보며 사쿠라를 기다린다. 그 곁에는 타에코도 함께였다.

멀리 해변에서 사쿠라가 걸어온다. 그녀의 목에는 타에코가 빙수값 대신 치룬 빨간 목도리가 둘려있다. 그 뒤로 오묘기도 함께이다.


카세 료를 보려 '도쿄 오아시스'를 찾아봤고 그 작품에서 고바야시 사토미란 배우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영화가 더 보고싶어 '안경'을 찾아봤고, 오기가미 나오코란 감독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가 감독한, 그녀가 연기한 작품들을 연달아 찾아보게 되었다.

아무생각 없이 보려했던 이 영화는 넘치지 않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영화를 보지 못할 이들을 대신해 옮겨 놓았지만 직접 보기를 권유가 아닌 강요하고 싶다.
영화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그 잔잔한 파도가 옮겨놓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Sort:  

오늘 저녁은 다이어트 건강식으로~!BandPhoto_2018_02_16_16_39_55.jpg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닭가슴살인가요? ㅎㅎㅎ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일본영화는 뭐랄까요..
음...
극적이지 않다고나 할까요...
그게 또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본 그리고 좋아하는 일본영화는 극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영화만 골라서 본 것일 수도 있고...

지대넓얕에서 듣고 꼭 봐야지 하던 영화였어요. 챙겨좌야겠어요. 미약하지만 보팅하고 팔로우하고 갈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대넓얕이란 것이 있었군요. 저도 종종 찾아가봐야겠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도 들어본 영화에요~ 설에 시간도 많은데 챙겨봐야 겠어요 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팔로우 하고 가겠습니다!

꽤나 알려진 영화였군요. 나만 알고 싶은 그런 영화였는데 말이죠. ㅎㅎㅎ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영화같네요. 일본 영화는 검증되지 않은 건 손이 안가던데, 하나를 검증해주셨네요^^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들을 쫓다보니 실패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본영화특유의 이런 감성이 넘 좋죠.....^^
사실 요샌 그마저도 찾아보기 힘들어져 가니...크흠;;

이런 영화를 보면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임이 실감이 나요. ㅎㅎㅎ몇 편 더 올리려고 했는데 감기가 찾아와 조기종영되어 버렸네요...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예전엔 일본 영화 많이 봤는데, 요즘은 통 안봐지더군요. 왜 그럴까 생각해봤더니 마음이 바빠서인듯해요. 쉼표를 찍으면서 봐야하는 영화인데 말이죠. 감기 얼른 나으세요!

저도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잔잔한 영화에 끌리더라구요. 물론 처음 접한 영화는 잔잔하지 않았지만 그 마저도 일본 특유의 감성이라 재밌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걱정해주신 덕에 조금 나아졌습니다.

일본영화 특유의 잔잔함이 있는 영화인가봐요.
‘녹차의 맛’ 이런 영화와 비슷할 거 같기도해요. 힐링영화! 챙겨보겠습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 순간마다 이런 영화들이 빛을 발하더라구요 :)

녹차의 맛도 왠지 비슷한 맛을 내는 영화일 것 같네요. 저도 찾을 수 있다면 챙겨놓도록 하겠습니다. 늦게나마 찾아주신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름다운 영화 정말 감사합니다. 타에코가 이제 약도을 읽을 수 있게 되다니 하마다 사람이 되었네요.

저도 이 지구 어딘가에 저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색을 위해서 가방 하나 메고 갈 수 있는 곳. 또는 이 지구 어딘가에 내가 설 곳이 없다고 느낄때, 나에게 ‘쉼’ 이 필요할때 이 작은 한 몸이 찾아 갈 수 있는 곳.

잔잔하게 편안하게 다가오는 저런 영화 참 좋아요. ^^
감사합니다.

정말 하마다가 있다면 쉽게 찾아가실 것 같아요. 사색할 재능도 이미 가지신 것 같구요. ㅎㅎㅎ
일상의 틈에서 ‘쉼’이 필요하실 때 영화로 한 번 찾아가보세요! 직접 보시는게 훨 나으실 겁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20
TRX 0.12
JST 0.028
BTC 64024.15
ETH 3515.24
USDT 1.00
SBD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