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이번 생은 글렀습니다.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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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나에게는 글 잘쓰기로 방귀 꽤나 뀌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황석영 선생님의 <개밥바라기별>에 나오는 문예반 친구들 이야기하고 비슷할 수도 있겠다. 영길, 상진, 정수, 인호 같은 친구들이다. 책을 정말 좋아하고 화법도 현란했던 친구들이었다. 개밥바라기별에서 좋은 글쓰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어떤 글이든 남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는 수단이고 통로일 뿐이다. 감정을 아끼고 담담하게 냉정하게 쓰되, 문장과 문장 사이가 중요하다. 독자는 이 사이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채우고 글을 함께 완성해준다.

사족이 많은 나의 글에 딱 필요한 조언이다. 처음 스팃임에 썼던 글보다는 지금의 글이 힘은 많이 빠진 것 같다. 처음 나의 글들은 마치 경계 초소의 보초병 같은 각이 나온다. 흑역사를 그려본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어휘는 딸리니 꾸미는 말이 많아질수 밖에. 지금은 담담하게 쓰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언젠가 오늘의 글도 발등을 꼬집게 하는 날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지울수 없다. 스팀잇은 습작노트?


여튼 그 방귀 냄새 좀 풍기던 나의 친구들도 문예반이었다. 나는 문예반은 아니고 고 3때 같은 반이여서 친하게 지낼수 있었다. 학교가 파하면 그중 몇 친구하고는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걷고 대학로를 거쳐 놀고 삼선교를 지나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대학로에 가서는 으레 그렇듯이 대학생들 흉내내기를 즐겨했다. 교복바람으로 학림다방이라는 곳도 가보고 연극도 보고... 마로니에 공원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고맙게도 우리의 고등학교는 고 3인 우리에게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이 대신 낭만을 선물해 줬다. 이제 한 친구씩 소환해 볼 시간이다.

문예반에 자칭 평론 담당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카톨릭 신자였는데 자기에게 창작 능력 대신 비평 능력만을 주신 신을 원망했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는 하늘에 대고 두손을 벌려 신이시여를 외치곤 했다. 한번은 그 친구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중계동에 꽤 넓은 평수의 아파트였는데 집에 들어서자 마자 엄청난 양의 책에 압도당했다. 거실의 모든 벽면과 서재벽은 높게 짜여진 책장들로 꽉 차
있고 책장 뿐만 아니라 넘치는 책들은 구석 벽면에 따로 쌓여 있었다. 아버지가 모 일간지 편집국장이라 했다. 나는 그때 그 친구를 진정한 평론가로 인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평소 목소리가 조용하고 표정이 단아한 소설을 쓰는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그 친구는 서점일을 보았다. 집이 서점이고 서점이 친구의 방이었다. 친구집에 간 우리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아직 누구도 소유하지 않은 책들을 집어 들며 하하호호 할수 있었다. 아무책이나 잡히는 대로 책을 읽을수 있어서 자기집이 서점인게 너무 좋다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그 친구가 써 내려간 낙서조차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으니 나는 그때 그 친구를 진정한 소설가로 인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느날 친구 하나가 책이 가득 담긴 쇼핑백을 불쑥 내밀며 맡아달라고 한적이 있었다. 흔쾌히 예스라고 말하고 집에 가져왔는데 무게가 꽤 나가서 쇼핑백이 찢어질까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책을 건네주며 절대 꺼내보지 말라는 말과 함께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하지 말란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담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는 일이나 그러한 이야기에 공감하는 이 따위는 없으리라. 며칠동안 옷장 안에 숨겨놓았던 쇼핑백 안의 책을 꺼내보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난생 처음보는 책들이었다. 그때 그 책들이 당시 일명 불온서적이라 불린다는 걸 안건 대학에 들어간 이후였다. 책을 읽다가 오빠한테 들켰는데 고 3이 읽을 책은 아니라면서 오빠가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 정체를 알수 없는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 그 친구를 진정한 선동가로 인정하기로 했다.

나? 나의 이야기도 해야겠다. 당시 나는 글 잘쓰던 잘난 친구들 앞에 하나의 문장을 내놓는 것조차 꺼려했다. 아니 내어 볼 필요도 없었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너무 잘난 그네들의 능력이 부러웠고 알고보니 그러한 환경을 가진 친구들이라 역시 난 안되는구나 그랬다. 그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오빠 덕분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책들을 조금 빨리 접할수 있었다는 것과 컴컴한 다락방에 숨어서 비밀리에 읽어 제낄수 있는 요상(?)한 책들이 박스째로 있었다는 것 빼고는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한가지 더 있다면 오빠와 결혼을 약속한 분의 근무지가 은평구립도서관이라서 책을 무제한으로 빌려볼수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덕분에 나는 고교시절 대입 시험 공부보다는 책을 읽는데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친구들이 무엇이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한 친구는 비평가 대신 기자가 되었을 것 같고, 다른 한 친구는 소설가 대신 드라마 작가가 되었을 것 같고, 나머지 한 친구는 글쎄... 5월 거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졸업식날 해놓고는 그 뒤로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모두들 밥은 잘 먹고 살고 있겠지. 그 친구들이 무엇이 되었든 어찌 살고 있든 내 생애 만난 친구들 중에서 손꼽아 기억할 만한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 덕분에 스팀잇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그 당시에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조금 더 현실적으로 나를 바라볼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다. 이번 생애에는 글렀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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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ㅎ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어휘는 딸리니 꾸미는 말이 많아질수 밖에.

글을 정독했는데 계속 머릿속에서 되뇌어 지는 것은 저 문장이네요. 제가 그렇거든요. ㅠㅠ

무슨 말씀을요! 지금 얼마나 깔끔하신대요 ㅎ 제가 그래요. 지금 많이 내려놓으려고요. 생활에서도 글에서도요 ㅋ

칭찬은 고래도플랑크톤도 춤추게 합니다. 칭찬은 감사히 잘 듣고 더욱 정진하여 가독성을 높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 친구들과 연이 끊긴것이 아쉽네요.
저도 다음 생에는 여러취미보다는 한가지만 잘하게 태어날래요.
누가 물어본사람?

대학 졸업이후 연락이 끊겼어요. ㅜㅜ 지금에라도 찾아볼까 생각해봤는데 왜 자꾸 자존감이 떨어지는 걸까요? 제가 물어볼께요. 다시 태어나실래요? ㅎㅎㅎㅎㅎ 저도 다시 태어나면 잘하는거 딱 하나만 가질래욧@

이렇게 몰입력 좋은 글을 쓰시는데요???
담담한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 )
단편소설을 읽는 듯한 분위기였어요

최고의 칭찬이십니다!! 아이궁 좋아라 ㅋㅋㅋ 감사합니다. 팔로하고 놀러갈게요!
어멋! 의미있는 활동을 하시는 군요! 격렬히 응원합니다.ㅎㅎ

소소하고 담담하게 잘쓰신다에 의견을 더합니다.

감사합니다. 담담하게 글쓰는게 목표입니다.ㅎ

ㅋㅋㅋㅋ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도 읽다보면 궁금해지는게 인지상정~!!

친구님들의 행방이 궁금해지는군용. ㅋㅋ

ㅎㅎㅎ 저도 궁금해욧! 찾아봐야 할까요?

불온서적 그리고 요상한 책들... 그것들 없이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후후후

ㅋㅋㅋ 티벳에 한박스 챙겨가신 건 아니죠?

라운드님 티벳에 가셨나봐요. 놀러가야지 ㅋ

저 인도에 있어요. (소곤)

아! 저 라운드님께 댓글 먼저 달고 왔네요. 뭐랄까 너무 이쁜 느낌이라서 호홍! 응원할께요!

이쁜 느낌 어떤 그런 느낌적인 느낌인가요? 히히히

그때 친구들의 영향으로 고교시절 책을 많이 읽고 지냈던것
요부분이 가장 부럽네요. 당시엔 상대적 박탈감이 들어 조금
힘들었을수도 있지만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이글을 읽으니 저의 교고시절 친구들도 생각이 나네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책은 초등학교때 제일 많이 읽은 것 같아요. 성인소설 위주로 ㅋㅋㅋ 친구중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친구들은 평생을 두고두고 생각나는 고마운 인연이죠. 오늘 친구분들한테 연락한번 해볼까요? ㅎㅎㅎ 저도 감사합니다.

친구들이 지금 뭐하고 계실지 제가 더 궁금하네요! 다들 책이랑 인연이 있어서 문예부에 들어왔나봐요. 에빵님도 읽고싶어지는 글을 쓰시니까 그르지 않았습니다 ᕙ(•̀‸•́‶)ᕗ

ㅎㅎㅎ 저는 당시 몹시 비루했답니다. 스팀잇 와서 글이란 걸 쓰기 시작했어요. 아직도 부끄러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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