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낭만을 돌려드립니다 - 1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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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을 그는 끝내 얻지 못했다. 아니,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내가, 내가 알아서 해요."

건조한 음성의 그는 어두워진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굳게 다문다. 창밖으로 보이는 그로스뮌스터를 비추는 웅장한 불빛만이 그의 관심을 훔치고 있다.

나는 조용히 비행기 티켓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그가 조금 전까지 홀짝거리던 아이리쉬 위스키 크림티가 담긴 찻잔을 힐끗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는 이 차를 마실 때마다 나를 닮은 차라며 내 얼굴을 빤히 보는걸 좋아했었다. 그런 그가 나를, 내 얼굴을 잊었다.

10월의 취리히 밤거리는 한산했다. 코트 깃을 바짝 세우고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은 한 쌍의 연인만이 종종 걸음으로 그들의 보금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둑해진 구시가지를 걸으며 그들처럼 코드 깃을 세워 보았다. 이제 난 혼자다. 곧 탑승 예정인 한국행 비행기 시간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체크했다. 이제 여섯 시간 후면 다 끝난다. 길고도 험난했던 스위스 생활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는 소위 말하는 천재 신경학과 외과의였다. 그가 메이요 클리닉에서 펠로우쉽을 시작하자마자 발표한 논문은 란셋지에 실렸고, 온 세계의 열광속에 2차 논문을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발표했다. 그가 연구한 분야는 "사랑"의 감정을 관장하고 조절할수 있는 초소형 전기 자극 체내 이식 장치에 관한 것이었다. 메이요 클리닉의 신경 외과 과장이 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발표한 모든 논문은 저명한 세계적 의학 학술지에 실렸고, 윈프라이즈와 AANS의 학술상을 독식했다. 그는 걸어다니는 학술지였고 움직이는 트로피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스위스의 한 스위트 룸에서 세상과 등을 진 채 표류하고 있다.



그를 처음 만난건 한국의 대학 캠퍼스였다. 나른한 봄날, 봉긋했던 목련잎도 사라지고 캠퍼스를 가득 채웠던 진분홍의 철쭉과 노오란 개나리가 막 자취를 감추려 할때였다. 앙상한 가지로 두 팔 벌려 기지개를 켜고 있던 목련 나무 옆 벤치에서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전날 조별 과제물 준비에 친구와 밤을 거의 새다시피 한 참이었다. 눈을 떠 보니 청명한 하늘에 긴 비행운이 그려져 있었다.

"외계인이 다녀갔나봐!"
나는 기지개를 켜며 큰소리로 말했다.
"나, 외계인 아닌데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내 머리를 받치고 있는 낯선 어깨와 완강해 보이지만 부드러운 곡선의 턱이 보였다.

"누구세요?"
"지구인입니다!"

그는 방금전까지 내가 기대고 있었던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만큼이나 잠이 부족해보이는 충혈된 눈동자는 장난기를 가득 채워 웃고 있었고, 며칠 면도를 못했는지 구렛나무가 까칠했다.

그렇게 지구에서 만난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캠퍼스의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유명세를 탄 건 오직 그 때문이긴 했다. 의대 본과 3학년인 그는 이미 학교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공부도 공부였지만 그는 학교 방송국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가 디제이를 하고 있는 아침 7시의 '낭만의 주제곡'이라는 프로그램은 뇌와 음악, 사랑과 낭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당시 여학생들이 이걸 듣기 위해 아침 일찍 등교를 할만큼 아주 인기가 좋았다.



한국 대학 졸업 후 우린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메디컬 스쿨에, 나는 MBA 과정에 각자 학업이 바빴지만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는 늘 나를 웃게 해주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자전거에 태워 캠퍼스를 돌고 또 돌았다. 우리는 그저 흔한 동양인 커플 중의 하나였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너무 좋아서 우리의 사랑 행각은 점점 더 과감해지고 농밀해졌다.

우리는 캠퍼스 곳곳에 사랑의 징표를 숨겨두기도 했다. 작은 플라스틱에 서로의 이름을 써서 도서관의 책들 사이에, 붉은 벽돌 틈에, 잔디밭 한가운데에, 나무 등걸 아래에, 강의실 창틀 등에 두었다가 그 장소를 지날때마다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내 강의실의 화이트보드에 "00야, 사랑해!"라고 한글로 크게 써 놓은 적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왜 나를 사랑하는지에 관해 깨알 같은 한글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가 만든 '사랑 함수'의 풀이과정도 함께 써 있었다. 강의에 들어온 컴퓨터 공학 교수는 그 함수를 한참을 들여다 보더니, 이 함수식을 쓴 사람은 수업이 끝난후 교수실로 따로 찾아오라 했다.

2년은 금방 지나고 나는 졸업과 동시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미국에 혼자 남게 된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신디'였다. 그녀는 그와 함께 먹고 자고, 그와 함께 공부하고 연구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녀는 그가 찾아간 컴퓨터 공학 교수와 함께 개발중인 AI 로봇이다. 그는 그녀를 이식 수술 로봇으로 프로그래밍했다. 그녀의 두뇌와 그녀의 두 팔은 천재인 그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낭만을 돌려주는 수술을 해보자!"



(계속)


이 글은 @garden.park님이 주최하시는 낭만에 대하여 공모에 참여하려고 써둔 소설입니다. 분량을 줄여보긴 했는데, 분량 맞추기가 어려워 두개에 나누어 올려보려고 합니다. 분량을 줄이다 보니 스토리만 남네요.(ㅠㅠ) 내일이 마감인데, 아무래도 마감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참여하지 않으신 분은 낭만에 대하여 2천자 분량의 글을 쓰신후 https://steemit.com/kr/@garden.park/tnmc9 에 링크를 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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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을 돌려줘~

낭만 그것은 화려한 캠퍼스에서만 있는건 아닌것 같아요 !!?
작은 하꼬방 에서도 낭만은 황홀 그자체죠 ~~^^

그럼요~ 하꼬방 ㅎㅎㅎ 왜 전 하꼬방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거죠? ㅋㅋㅋ

왠지 소설이 아닐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아마 분량을 줄이다보니 소설적 요소를 잘라내서 그럴거여요 ㅠㅠ 아까운 내 분량... 망했어요ㅠㅠ


수술 받을 사람 무지 많겠어요.

줄 서세요~ ㅎㅎ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낭만을 돌려주는 수술이라. :)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_+

정말 소설인가요? 반은 사실일 듯 한 생각이....

와아~ 에빵님의 첫소설이네요.
낭만을 찾아주는 수술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아프진 않겠죠?^^

스팀잇에서 두번째 소설이고요, 생애 세번째 소설이네요 ㅋㅋㅋ 분량 줄이기를 하니 껍데기만 남아서 속상해요 ㅠㅠ 일순위로 수술시켜 드리라고 신디에게 말해놓을께요! 부작용은 책임 못 집니다 ㅋㅋㅋ

오~~~~ 소설인듯 회상인듯....모죠?
가슴 뜨거웠던 뭉클한 ㅋ ㅑ
낭만 세포가 꿈틀 ~~

재밌게 잘 봤어요 ^^ 현실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 공감 때문일까요~~
다음 편도 기대할게요 ~~!

소설이라 쓰고 본인의 경험담 아닙니까??? 의심의 눈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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