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Essay 017 | 구닥다리 판타지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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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오래되고 빛이 바랜 공간에 불이 켜진다. 단정하고 깔끔한 것들을 거부하고, 지저분한 시간의 때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이 간직한 스토리를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래도록 잠자고 있던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 헤맨다. 시간이라는 건 참 묘해서 물건이든 공간이든 그 길이만큼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향수, 복고, 추억 혹은 레트로 등등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들을 모두 모다 '구닥다리 판타지'라고 정의해보고 싶다.






레트로(retro)가 영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


회상, 추억을 뜻하는 레트로는 도대체 어느 시대를 말하는가. 90년대를 소환하던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요즘은 2000년대도 심심치 않게 추억으로 이야기된다. 1960년대 우주탐사에 꿈이 부풀었던 사람들이 쏟아냈던 '상상의 미래'가 지금 우리에겐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역으로 그 시절에 가졌던 미래에 대한 환상을 다시 지금의 시대로 가져와 소비하고 즐긴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뒤섞인 모순 같다.

엄밀히 말하자면, 레트로는 각자에게 다르게 기억되는 과거에 대한 향수다. 각자가 살아가는 시점이 다른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가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그 필터는 특정 세대에게 공감의 코드로 작용하기도 한다. 라디오를 들으며 자란 세대와 유튜브를 학습하며 자란 세대에게 추억과 기억은 다르게 남는다.

대중매체에서 거론되면서 추억으로 소환되는 시대는 대체로 그 시점의 3-40대들의 유년시절인 경우가 많다. 1-20대들은 현재 시점의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만끽하며 살아가지만, 30대부터는 슬슬 어린 날의 추억을 마음 한 구석에 품기 시작한다. 경제의 주체가 되는 이들에겐 추억이 되고 트렌드를 이끄는 세대들에게 익숙한 듯 낯선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그때 그 시절'의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곧 레트로가 되어 다시금 유행을 불러온다. 레트로는 해석하는 방식이 제각각인 채로 폭넓은 세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끊임없이 차례로 소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험해보지 않은 향수


향수라는 것이 꼭 직접 경험해 본 나의 어린 시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가보지 못한 시절에 대한 환상은 알 수 없는 향수와 호기심이 뒤섞여 만들어진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카페에서 헤밍웨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에는 어떤 생각과 대화를 나누며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을까.

최근 몇 년간 나는 근대에 대한 관심이 점점 많아져 이상의 제비다방이나 김환기와 그의 아내 김향안 여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감수성이 궁금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영화 '동주'나 '캐롤', '로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각기 다른 시대와 공간을 그려낸 것들에 향수를 느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동생인 이모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간 적이 있다. 이모할머니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 옛날 마당에서 닭을 잡고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던 날의 일화를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해주신 적이 있다. 그 순간 나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30년대인지 40년대인지 모를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갈 수 없고 본 적 없는 시간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고 로망을 부풀렸다.






구닥다리 판타지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뒤섞이고, 시간의 흔적에 새로운 해석이 더해진 것들이 재탄생하면서 우리는 오래된 구닥다리를 문화로 즐기고 소비한다. 더 좋고 더 나은 것이 아니라, 더 매력적인 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구닥다리가 존재한다. 잘 포장된 아파트로 삶의 터전을 옮겨 놓고도 사라진 풍경과 추억을 놓지 못해 오래된 골목길로 발걸음 하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구닥다리의 쓸모는 그렇게 환상과 영감이자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판타지가 사라진 자리에 영혼 없이 빛나는 포장들이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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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질전 응답하라 재방보면서 제가 엉청 구닥다리임을 깨달았습니다 ㅋ

ㅎㅎ 저도 구닥다리 매니아입니다. :)

무언가 제게 강렬한 구닥다리판타지는 뭘까 고민해 봅니다.
먼 훗날 이 시절은 어떤 판타지로 기억이 될지...

그러게요. 스카이캐슬이나 유투버, 카페 투어, 편의점 간식들 이런 것들이 어떻게 회자되려나요. ㅎㅎ

저에게 이상 시인이 계셨던 "경성" 이라고 불리던 시대가 구닥다리 판타지 인거같아요

저의 판타지 중 하나이기도 해요. 그분들은 삶은 힘겨웠겠지만, 갈 수 없는 시간이라 더 환상이 커지네요. :)

경성탐정 이상 책 추천드려요 ㅋㅋㅋ 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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