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이 떠오를 때

in #kr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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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표지판이 유난히 다르게 보이던 순간에 이 글에 대한 글감이 떠올라, 글감이 떠오르는 순간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한다.

참고로 나에게 글감이라는 건 비문학적인 테두리 안에서 내가 써 내려가는 주제들이다.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영감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나 관점, 문화와 예술에 대한 발견 같은 것들이다.






샤워, 산책, 버스


이 세 가지는 마음속의 잡음이 씻겨 내려가면서도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들이다. 샤워하면서 눈을 감았을 때, 산책하면서 땅을 응시할 때, 사람이 적은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볼 때 글감이 불쑥 튀어나온다. 딱히 멍을 때린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비워내는 명상의 상태도 아니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순간도 아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들 안에서 스마트폰을 잠시 눈에서 멀리하는 적당한 쉼이 주어지는 순간에 정신이 맑아진다. 엊그제 있었던 일, 오늘 아침에 가졌던 감정들이 떠오르고, 잡생각과 고민들이 난무하던 머릿속에서 무언가 찌꺼기 같은 것들이 필터링되면서 다음 행동이나 생각으로 나아갈 선명함이 생겨난다.

버스나 혹은 길가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계란 한 판을 손에 든 아주머니와 오래된 간판들, 서서 어묵을 먹는 사람들을 맥락 없이 응시하다 보면, 어느새 일상에서 딱 한 발짝 만큼만 떨어져 있는 내가 발견된다. 그 순간 새로운 생각과 관점이 떠오르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라기보다는 나의 생활 속 파편들 사이에서 뒤엉켜있던 것들 중 빛나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완전히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샤워의 순간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을 때 보다 더 나의 정신을 쉬게 한다. 뜨거운 물은 잡념마저도 씻겨내린다.






책, 영화, 전시


이것들이 문화와 예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영감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글감이 떠오르는 순간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닌 타인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인 것은 분명하다. 누군가가 설정해 놓은 이야기 속에 들어가 그것의 흐름을 받아들이다 보면, 나의 일상적인 세계관들과 충돌하게 되고, 그렇게 나의 생각이 전환되기도 혹은 흐릿했던 생각에 확신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언젠가 빠져버릴 매너리즘을 경계하기 위해 자꾸만 남의 세계관에 입장한다.

책 속의 글을 만나고, 영화의 장면들을 바라보고, 작품의 주제와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러한 것들을 불규칙적으로 연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나의 세계관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남의 세계관과 나의 세계관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간들 속에서 하염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차츰 나의 세계관에 안착하게 된다. 아주 어설프거나 유약할지라도 그것이 온전한 나의 세계관이라는 점에서 유일한 무언가이다.






글, 말


샤워, 산책, 버스에서의 시간을 통해 나를 정돈하고 비워 내고, 책, 영화, 전시를 통해 나를 풍성하게 채웠다면, 글과 말은 나를 뱉어내는 시간이다. 어지럽게 떠돌던 생각을 안으로 담아두기만 하는 것과 어떤 규정된 언어를 사용해 밖으로 내보내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나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해 줄 나만의 언어를 찾기 위해서라도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내가 나의 표현방식이나 생각들을 스스로 확인할 기회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들이 막상 글을 쓰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다가올 때도 있고, 무심코 뱉은 말들을 다시 곱씹을 때도 있다.

때로는 표현을 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어떤 놀이보다 쾌락적인 해소감을 가져다주는 것 역시 글과 말이다. 특히, 글은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의 나열들을 고백하게 한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감정의 쓰레기를 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의 빈도를 줄일 수 있다.

노트에 펜으로 기록하는 것과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것, 타인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그것을 내어 놓는 것은 각기 다른 감정의 결을 지닌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공간에 나의 치사스럽고 모순된 감정을 모아두기도 한다.

글을 쓰는 순간에 글감이 떠오른 다는 게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나 자신에게 또 다른 영감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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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스팀잇에서는 더 잘 알게 되는 부분도 있는거 같아요. P님의 #감정의 고백~ 단어의 선택 👍👍👍👍

ㅎㅎ감사합니다. 소통의 도구가 무엇이냐에 따라 표현 방식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

산책 버스 저도 좋아하는 것인데 버스는 가끔 일부러라도 지하철 대신 타기도 해요 ㅎ

네ㅎㅎ 지하철도 한적할 때 한강 위를 지나가면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항상 붐비니까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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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과 느낌, 그런 글감들을 진짜 글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늘 쓰면서도 아쉬운 기분이랄까... 멋진 글 감사합니다!

정말 쉽지 않죠. ㅎㅎ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다음글을 쓰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

저도 걷는 중에, 샤워하다가, 책 읽다가, 대화하면서 글감이 많이 떠올라요! 스마트폰 안 보고 주위를 돌아볼 때도요.

스마트폰을 손에 놓는 모든 순간들의 집합같기도 하네요. ㅎㅎㅎ

저는 음악 듣다가 '포스팅 하나 해야지' 하고 뜬금포 터지는 때가 잦은 것 같아요.ㅎㅎㅎㅎ 버스나 택시 타고 이동하거나 운전할 때 받는 시너지도 많고요.

대부분 완전한 쉼은 아니지만 한 템포 쉬어갈 때인 것 같아요. ㅎㅎ정말 무슨 글 쓸까 이러다가 생각나기도 하고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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