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부잣집 넷째딸 [제1회 PEN 클럽 공모]

in #kr6 years ago (edited)

대문사진2.png

나는 딸부잣집 넷째딸이다

아들이 귀했던 시대에 태어났다. 요즘에도 딸부잣집이 있을까?
요즘같이 딸이 귀한때에 아들부잣집은 있어도 딸부잣집은 없을 것 같다. 옛날에는 딸보다 아들이 귀했기에 딸이 많으면 위로의 말처럼 딸부잣집이라고 불렸던것 같다. 우리집은 딸 넷에 아들 하나, 엄마가 아들을 낳은건 너무 다행이었다. 나도 남동생이 있어서 싫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넷째딸인건 불만으로 남았다.

일찍 돈이 벌고 싶었다. 그래서 언니들처럼 대학에 가는걸 나는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용돈을 안받아도 되고 형제끼리 용돈 경쟁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우리집은 그랬다. 언니들 용돈 다음으로 내가 아니라 남동생이 우선이었다. 난 그게 너무 불만이었다. 딸 중에 막내인데 어른들이 나를 그냥 막내라고 불렀다. 아들은 장남이니까.

난 대학을 왜 가야하는지 몰랐다. 그냥 공부하려고 가는 곳이 대학인줄만 알았다. 언니들이 대학공부를 열심히 하였어도 나에게 안중에도 없는 일이었고 대학을 포기하고 은행원이 된 큰언니가 제일로 부러웠다. 그것이 그때는 중요하다는 걸 아무도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중에 큰언니는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나에게 같이 방통대 갈래?? 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알고보니 큰 언니는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줄줄이 딸린 동생들 때문에 엄마의 권유로 진학을 포기했던것이었다. 언니의 희생에 마음이 아팠다.

사회에 나가서 이사람 저사람 만나다보니 대학 못나온것이 나름 꿀렸다. 그래서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노량진 입시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학원 골목가에 포장마차가 그립다. 맛있는 분식이 참 많았고 돈을 벌었기에 마음껏 사먹고 다녔었는데. 공부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그 시간이 최고였다. 퇴근하면 바로 학원으로 가서 종합반을 듣고 나오면 막차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집에오면 12시가 넘었고 새벽 6시에 일어나 서울로 출근을 해야했다. 그렇게 회사와 학원을 병행하며 지내다보니 저절로 10키로가 빠졌고 잠을 자다가 다리에 쥐가나는 고통도 몇 번씩 겪을 때마다 엄마가 학원 그만 다니라고 하였지만 그럴순 없었다.

그렇게 적성에도 안맞는 공부를 한다고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수능을 보았는데 그때 엄마가 나에게 비수를 꽂았다.

한 집에 두명이 시험보면 재수가 없다고

난 수능을 보고 원서는 넣지 않았다. 완전 김이 샛다고나 할까. 어차피 점수도 낮았으니까 그냥 쿨하게 서울대에 합격한 남동생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넌 나때문에 재수좋게 서울대에 합격한거야라며 나혼자 이 비밀을 간직했다.

남동생은 착했다. 못된놈이었으면 정말 미워했을텐데 너무 착한 동생이라서 고맙다. 종합반 친구들은 모두 회사를 마치면 야간 대학을 다녔고 나는 이학원 저학원 열심히 취미생활을 쫓아다녔다. 그래서 난 덕후는 아니지만 취미는 참 많은거다. 후회는 없다. 덕분에 많은 경험이 내 스승이 되었으니까. 지금도 주변 사람들이 대학 얘기하면 살짝 심기가 불편하지만, 나만큼 취미생활이 많은 사람은 없으니까.

친구들이 한 둘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결혼이 꿈이였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마음 졸였다. 결혼전에는 남자친구 얘기만 하더니 결혼하니까 자식 자랑에 시간 가는줄 모르는 친구들이 부럽기만했다. 너무 절실했는데 30살에 결혼이라니 너무 가혹했다.

남편 덕에 필리핀에서 사이버대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등록금 낼 타이밍에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이면 조용히 등록금 영수증을 남편 책상위에 올려놓았던 비통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것 또한 소중하고 웃음짓게 만드는 추억이 되었다. 이 나이에 어느과 전공 했어요? 라고 묻는 사람은 드물지만 가끔 얘기가 나오면 사이버 대학 공부했다고 하면서 내가 먼저 웃는다. 이것마저 챙피한건 내가 자존감이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지만 영구박제 되는 이 스팀잇에 이 일기를 올리는건 내 자존감이 허락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 글은 이미 두 달전에 적어놓고 올리지 못하고 노트북에 박제될 뻔했던 내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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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사셨군요.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남동생한테도 너무 잘해주셔서 제가 다 고맙습니다.
위로 누나가 세명이나 있거든요.

와우.. 성티님도 누나들 이쁨 받고 자라셨겠어요 ^^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

이벤트가 아니였다면 못 볼 글이었을수도 있겠네요 ㅎㅎㅎ
딸부잣집의 딸로 태어나 남동생과의 차별도 많이 경험하셨을텐데...담담하게 풀어내셨네요...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가 담담하게 풀어냈다 해주시니 정말 자신감이 팍팍 살아나네요 ^^
이 늦은 시간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지막 글이 꽤 인상적이였네요 ^^

감사합니다^^ 자주 뵈어요 ^^

당연하죵 ^^&

헉 ... 길어요 사연이 ㅎㅎ
지금 일하러 나가는 길이라 낭중에 읽으러 올께요^^

넘 길어서 깜짝 놀라셨죠 ^^

다 읽었어요. 나가기 전에 글 하나만 보고 나가자 했는데 다시 주저앉게 만드셨네요. ㅋㅋ 전 아무도 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이름 없는채로 꽤 살다가 큰이모가 언니랑 이름을 비슷하게 지어줬네요. 내색 안하는 아빠도 언니 장난감을 처음 사줬는데 경찰차였다죠. 아들이란 또 남자란 그렇게 대단한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또 그런것도 아닌데 농경사회였어서 그분들 생각은 어쩔 수 없나봐요.
여러 취미를 가지신 배경에 그런것이 있었군요.
두달 묵혔다가 짜란하고 내놓으신거 멋집니다.

다 읽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제가 워드로 썼을때는 2000 자가 되기에 올렸는데 김더라이터님의 맞춤법 검사를 했더니 8000자가 넘더라구요 ㅜ.ㅜ
그래서 다시 줄여서 수정했어요~~ 다 읽으신 분은 살룬님뿐인듯 ^^ 넘넘 감사합니다 ^^

저하고 비슷하네요~
저는 장손집안에 딸 넷에 아들을 낳고 그 다음
제가 나왔답니다. 네명의 딸 중 둘째는 돌쯤에 죽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때는 호환마마 이런병 때문에
많이 죽었잖아요. 그래서 저 위로 언니세명에 귀하신 장손 그리고 나 1남4녀 다섯명입니다.ㅠ
저는 막내라 귀여움을 받고 자랐지만 언니들은 말 안해도 알겠죠~ 또 우리엄마는 딸만 놓고 시댁에 얼마나 달달 볶였을까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더 쓰려면 길고 여튼 그렇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 정말 쓰려면 하루로도 모자를 이야기일것 같아 공감 또 공감합니다~
저랑 같은 막내딸이니.. 인물은 안봐도 뭐 딱 알겠어요 ^^

어디서 만날까요?ㅎ

ㅎㅎㅎㅎ 날자와 장소를 정해주신다면 ^^

김일성 사망시 회식을 하고 계시단 댓글로 언니임을 알았습니다. ㅋㅋㅋ
차차차언니.
지금 저희집이랑 성비가 똑같았네요.
차차차님께 비밀로 이야기하는거지만 전 사호가 제일 사랑스럽습니다.
지금도 옆에서 과자를 먹고 있는데 넘 이뻐서 어쩔줄 모르겠다는요~
어머님도 속으론 그러셨을거라 생각합니다.
30에 결혼.... 전 아홉수에 갔었죠.. ㅎㅎ

ㅎㅎㅎ 저도 김일성 사망시 회식 얘기를 할때.. 나이공개나 다름 없는 것이라.. 살짝 긴장을 ^^
막내딸이 이쁘긴 해요 ^^
그리고 이 글을 올릴때 @leeja19 님 생각 났어요~ 5호가 외동 아들이란걸 최근에 알게 되면서.. 우리집하고 비슷하네.. 했거든요 ^^
고마워요 ^^

형제 자매 있는집 저는 사실 부럽네요~

저는 외동이 부럽다는 ^^

소중한글 공감하면서 잘 읽었어요
공부 잘한 언니와 남동생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살으시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계집희자는 사람들에게 희생하고 항상 남자들을 위해 희생하며 돕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그래서 한자에서 쓰지 않는 자라고도 해요
제가 계집희자를 써서 그런지 어려서 부터 남동생을 돌보고 살았고
형제들을 돌보고 그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먹으면서
기분이 더 안 좋더라고요
이젠 남은세월 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차차님 기운차게 잘 살으셨어요 ㅎㅎ

다 읽으셨군요 ^^ 글자수가 8000자를 넘겨서 대폭줄였는데, 그 긴글을 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아주 기운차고 신바람 나게 잘 살고 있답니다 ^^

차님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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