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생각하기]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한국의 N포세대
일본의 모습이 10년 뒤의 한국의 모습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였다.
한국에 사는 20대로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들
‘N포세대’라는 말이 있다. 연애, 결혼, 출산, 취업, 주택, 인간관계, 꿈과 희망 등 삶의 모든 가치를 포기한 세대란 뜻으로 현재 한국의 20, 30대 청년층을 일컫는 말이다. 너무 비관적인 평가가 아니냐는 시선도 있지만 경제 불황과 비정규직 등의 문제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꿈도 희망도 없다’는 말에 동의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헬조선이니 혐한민국이니 하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 시대. 꿈도 희망도 포기한 사람들은 이제 나라마저 포기하려고 한다.
최근 내게 새로 생긴 말버릇이 있다. 안 좋은 일이 생겼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힘들거나 심지어 별다른 생각이 없을 때조차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한다. “언젠간 이 나라 뜨고 말 거야.” 재밌는 건 이 말이 ‘짜증나’나 ‘힘들어’와 같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 그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특별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건만 갖춰진다면 금방이라도 이 나라를 떠나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주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한국에 남아있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별종 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한국에 남아있겠다는 친구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여기서 대체 뭘 할 건데?”
막 돋은 잎사귀처럼 푸릇한 이십대 초반. ‘우리’에게 한국은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의 미래를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오고, 도대체 앞으로 뭘 해야 할 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토익이며 자격증이며 이것저것 손대보고는 있지만, 사실 딱히 어떤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들이 다 한다고 하니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불안한 걸까. 무엇이 ‘우리’를 만들었을까.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으면 그 답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1985년생의 젊은 사회학자가 쓴 이 책은 일본 청년들이 처한 현 상황을 꽤나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책으로 완전히 한국에 대해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성장의 배경이나 세대 격차 등을 보았을 때, 두 나라가 사회구조적으로 어느 정도 동일선상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를 통해 일본이라는 비교 대상을 통해 한국 사회를 조금 더 정확하게 진단해볼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은 분명히 다른 나라다. 그러나 두 나라에는 모두 ‘우리’가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저자가 밝힌 대로 이 책의 목적은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적인 측면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짙은 ‘젊은이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서 구조적으로 파악하려 하는 것이다.
젊은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젊은이’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젊은이’는 누구인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젊은이’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젊다’는 동사 자체가 추상적인데다가 정확한 기준도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젊은이’의 나이는 법률마다 다르며, 이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공통된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째서 국가는 ‘젊은이’의 기준을 정확히 규정해놓지 않은 것일까?
저자에 의하면 본래 젊은이는 그 실체가 있는 듯 하면서도 또 없는 듯 한 존재다. ‘젊은이’란 수많은 객체들을 하나로 일반화시킨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즉, ‘젊은이’는 규정된 하나의 이미지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그 이미지를 규정한 사람이 누구인가이다. ‘젊은이’를 만든 것은 젊은이들 자신이 아니라 외부세력인 기성세대이다. 왜 그들에게 ‘젊은이’가 필요해졌는가. 당연하게도 그 이미지를 만듦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젊은이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약 100년 동안 일본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젊은이에 대한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저자는 젊은이론을 크게 네 가지, ‘이질적인 타자론’ ‘편리한 협력자론’ ‘문화론’, ‘실증연구’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렇게 다양한 담론들의 공통점은 젊은이를 대상화하는 기성세대들의 시선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사회의 모습과 밀접하게 변화해왔다. 국가적 정체기에는 새로운 시대를 짊어질 주체로서, 전쟁이 본격화되던 시기에는 전쟁을 위한 용맹한 병사로서, 경제성장 시기에는 새로운 고객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갖고 존재했다. 결국 ‘젊은이’란 기성세대의 입맛에 맞춰 모습을 변형해왔던 것이다.
사회는 언제나 ‘젊은이’의 편인 것처럼 보인다. ‘젊은이’는 곧 희망이며 미래라는 말은 어느 나라를 가도 비슷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실상 ‘젊은이’가 희망일 때는 그들이 사회의 입맛에 맞게 행동할 때뿐이다. 조금만 그들의 기대에서 엇나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곧장 혀를 차며 “요즘 애들은……” 과 같은 비난의 시선을 보내기 일쑤다. 저자의 말을 빌려오자면, 기성세대는 ‘젊은이’를 타자로 규정하고 형편에 따라 끌어다 활용할 수 있는 변명의 도구로 사용해왔다.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문제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20대 투표문제’에 대한 논란을 들 수 있다. 20대는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젊은이에 대한 편견, 즉 젊은이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이기적이라는 일반화를 전제로 한다. 오죽하면 선거 때에는 20대가 개새끼가 된다는 ‘20대 개XX’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다. 당연하게도 투표를 하지 않는 20대에 대한 비난은 맹렬하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요즘 20대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있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젊은이’들을 비난하기 위해 사람들이 서슴지 않고 루머를 조작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투표율까지 말이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야권이 패배하자마자 SNS에 20대 투표율에 대한 괴담이 돌았다. '19대 총선 20대 투표율 27%, 20대 여성은 8%.' 이 괴담은 삽시간에 퍼지면서 투표하지 않은 20대와 여성들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식 발표한 연령대별 투표율에 의하면 20대 투표율은 40%를 상회했다. 2008년의 18대 총선에 비해서 각각 12.5%p, 13.7%p 상승한 수치였다. 연령대별로 따져 봤을 때 가장 투표율이 급격하게 상승한 것은 20대였다.
그러나 2015년 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젊은 유권자들의 낮은 투표율은 전국가적인 현상이다. 또한 막무가내로 쏟아내는 비난들은 20대가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주목할 뿐, 어째서 20대가 투표를 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하긴 그들은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20대를 상대화함으로써 자기 세대의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으며, '우리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식으로 발화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는 문화평론가 이택광 씨의 말처럼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은 이해가 아니라 비난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점할 수 있는 도덕적 우위이다.
2016년 3월, 이재명 성남 시장이 SNS에 <한심한 대학생에 한심한 지도교수, 그리고 한심한 대학>이라는 글을 올렸다.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선거에 관심도 기여도 하지 않으면서, 정치가 자신을 배려해주길 바라는가? 청년의 정치무관심이 오늘날 청년문제가 심각해진 원인의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20대는 분노하고 반박했다. 어떤 대학생은 <이재명 시장님, 한심한 대학생입니다>라는 제목의 반박글을 올리기도 했다. 반면 대다수의 기성세대의 반응은 ‘투표를 장려하는 글인데 왜 그렇게 과민 반응하느냐.’는 것이었다. 대학생이 올린 글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 기성세대의 충고 한 마디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20대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재명 시장의 ‘투표율이 낮은 집단은 배려하지 않겠다.’는 전제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요즘 애새끼’와 ‘꼰대’의 대결구도 속에 존재하는 일반화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재명 시장이 비판하는 ‘선거일에 MT가는 청년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현실에 실재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낸 (혹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상 속 이미지에 불과한가.
‘젊은이’들이 사회에 관심이 없다는 편견은 일본에서 역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의 사회의식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매우 높은 수치의 사회지향을 보였고 사회공헌의식 역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실제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많은 젊은이들이 앞장서서 보여준 사회봉사 활동을 보면 사회에 관심이 없는 젊은이란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로 느껴진다. 저자는 사회에 관심 없는 젊은이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된 배경에는 작은 공동체 속에서 만족하기 시작한 젊은이들과 내셔널리즘의 붕괴가 있다고 말한다. 이제 젊은이들은 국가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인 하지 않고, 자신이 형성한 소규모의 공동체 안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직접 행동으로 나서기 보다는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SNS 활동을 즐기고, 사회운동보다는 친구관계를 형성하는 데 더 노력을 쏟는다. 젊은이의 모습이 이렇게 변화된 원인에는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알 수 없게 만든 사회구조적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원인에는 관심 없이 ‘젊은이는 사회에 관심이 없다’는 단편적인 이미지만으로 ‘젊은이’를 일반화시키는 것이 바로 세대 격차의 논쟁이 불거지는 가장 큰 원인이다.
나 역시 ‘젊은이’에 속한 사람으로서 내게 행해지는 일반화가 불편하다. 젊은 사회학자인 저자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젊은이를 일반화하는 기성세대의 발언들에 대해 저자가 보이는 신랄한 위트들은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러나 기성세대를 ‘나치 독일’에 비교하는 것과 같은 도를 넘는 비난은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기성세대의 잘못을 답습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떤 대상을 비판할 때 그 대상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편리하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같은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잘못된 부분을 알고 있다면 마땅히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계속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우리’가 또 다른 ‘젊은이’를 만들어내는 그때의 이곳은 조금 더 나은 곳이지 않을까.
짧게 정리하자면, ‘젊은이’란 결국 기성세대의 편리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다. 그렇다면 결국 세대 간의 논쟁은 ‘요즘 애새끼’와 ‘꼰대’라는 이미지 사이의 대결구도처럼 느껴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세대론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세대론이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는 때는 계급론이 현실성을 잃었을 때다. 세대론이라는 것은 본래 매우 억지스러운 이론이다. 계급, 인종, 젠더, 지역 등 모든 변수를 무시하고, 그저 ‘어떤 연령’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라고 일괄해 명명해버리기 때문이다. (P.76)
일본에서 ‘젊은이’의 현대적 의미가 성립된 것은 1970년대 중류의식으로 계급론이 소멸되었을 때, 즉 1억 명 모두가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계급론이 부활했고, ‘세대 내부에는 격차가 없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성립 가능했던 ‘젊은이론’의 의미는 퇴색하고 말았다. 저자가 세대론을 허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현상에 있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이와는 다르게 보인다. 현재의 한국은 부모의 재력에 따라 금수저와 흙수저 등으로 자녀의 계급을 나누는 ‘수저계급론’이 유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격차에 대한 논쟁이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두 담론은 공존할 수 없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상한 현상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론 두 나라 모두 ‘젊은이’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가설 필요가 생겼다. 이전처럼 기성세대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낸, 다양성이 무시되고 일반화된 ‘젊은이’는 지금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 이제 ‘젊은이’에 대해 논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사회구조의 모습과 연관시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달관자와 포기자
한국에 N포세대가 있다면 일본에는 사토리세대가 있다. 사토리(さとり)는 ‘달관’이라는 뜻의 일본어로, 사토리세대는 달관한 것처럼 돈과 출세에 욕심 부리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는 일본 청년들을 뜻하는 신조어다. 지속되는 경제 불황과 정규직 고용의 감소,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부담 증가 등 결코 긍정적일 수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젊은이들은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한다. 불행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 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p.134)
일본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래에 목적을 두고 행동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에 매진한다. 이런 젊은이의 특성을 ‘컨서머토리’, 자기충족화라고 한다. 이는 비단 일본 젊은이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앞서 잠깐 등장한, 한국에 남겠다고 대답했던 친구 역시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많은 돈도 높은 지위도 필요 없고 그냥 적당히 벌어서 적당히 살겠다는 친구의 대답 속에 담긴 것은 한국을 떠나겠다는 나의 생각 속에 담긴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친구는 현실을 ‘달관’했고 나는 ‘포기’했을 뿐이다. 일본 젊은이와 한국 젊은이의 모습도 이와 같다. 달관세대니 포기세대니 각기 말은 다르지만, 사실 그 안에 담긴 것은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는 미래에 대한 공허뿐인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책에 관한 다른 서평들을 읽어보았다. 대다수의 글은 한국과 일본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한국의 상황이 더 절망적이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사회구조나 경제상황, 시민의식 등 다양한 범주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쓰인 설득력을 갖춘 글이었다. 물론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건 젊은이들이 가진 ‘애국심’만 봐도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내셔널리즘과는 무관한 형태로 ‘일본 붐’이 불고 있다고 한다. 사회의식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애국심을 표하는 20대의 수치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의 비율 역시 증가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요즘 유행하는 ‘헬조선’과 같은 단어만 봐도 알 수 있듯 ‘한국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 이러한 반응의 차이가 ‘달관’과 ‘포기’세대라는 차이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더 절망적인 상황인지 따져보는 것은 무용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비교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할 뿐이며, 더한 절망으로 끌고 갈 수 있다. 누가 더 절망적이냐가 아니라 ‘어째서’ 더 절망적인가에 시선을 맞춰야 한다. 또한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포기세대든 달관세대든 모두 다 같은 구조의 피해자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부정적인 현실이라도 이곳의 규칙에 순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순응하느냐 아니면 버리느냐 두 가지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할 것이다. 남는 자는 달관한 것이고, 포기한자는 떠나는 것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결국 우리는 ‘우리’다.
앞으로의 우리는......
‘지금의 일본은 10년 후의 한국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게 내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게 된 이유였다. 우리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읽어서인지 이 책에 현상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다는 것은 아쉽게 느껴졌다. 저자는 사회학자답게 현상을 분석해서 결론을 냈을 뿐이며 그에 대한 어떤 전망이나 해결책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책에서 나타나는 일본의 모습이 10년 후라고 말할 만큼 지금의 한국과 다르지 않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어서 한국의 미래를 예상해보겠다는 나의 야무진 생각은 무너지고 말았다. (!) 그렇지만 사회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도 이해하기 쉽게끔 쉬운 문장으로 풀어내고 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완벽한 이해도가 필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얼마나 현 일본의 사회구조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내가 얻은 가장 값진 것은 평소에 느끼면서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현상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품은 젊은이들이 모일 수 있는 간단명료한 ‘출구’가 있다면, 젊은이들은 기꺼이 그 문을 박차고 들어갈 것이다. (p.144)
제가 여러 나라에 살아보지 않았겠습니까?
터키 이스탄불 1달
덴마크 코펜하겐 9달
영국 런던 7달
스페인 세비야 3달
폴란드 포즈난 4달
어디나 젊은이들이 포기하고 사는 건 비슷한 것 같아요. 그나마 제가 살았던 곳 중에서 가장 그래도 살기 좋았던 나라는 당연히 복지 국가인 덴마크였고요. 세금을 최저로 37% 내는 대신에 의료/교육이 다 무료입니다. 다만 한국만큼 좋지 않은 것도 많아요. 의사를 만나려면 시간이 엄청 걸린다던지...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까요? 참 어려운 질문이에요. 보통 막연한 계획들을 많이 세우는데, 하나하나씩 구체적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와 진짜 많은 나라에서 살아보셨네요 저도 각 나라에서 몇달씩 살아보는게 꿈이에요!
하나씩 구체적으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정해봐야겠네요:)
저도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시기에 읽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책 자체도 흥미롭고, 출간 당시 미디어에서 많이 다뤘기 때문에 아마도 책을 읽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의 결론이 아무래도 좀 아쉬웠던 생각이 납니다. 혹시 결론 부분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저 같은 경우에는 결론 부분이 아쉬워서 오히려 그 이후를 계속 고민하게 되는 긍정(?)적인 부분으로 연결이 되긴 하더군요.
간만에 책에 대해서 상세하게 리뷰를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감사해요 :)
저도 어떤 해결방법을 제시해줄 거라 기대하고 읽었는데 결국 낙관적인 분석글에 지나지 않았던... ㅠㅠ 맞아요 저도 그래서 한국은 어떻게 될까...? 하고 고민하게 되더라구요 ㅋㅋㅋ 혹시 저자의 노림수?!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한떄 취준을 했던 입장에서 공감이 많이되는 내용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