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in #kr6 years ago (edited)


나는 내가 대체로,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을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낯선 문화도 쉽게 수용하며, 비난 대신 비판할 줄 아는 자세를 가졌고, 배려와 존중을 알고 있다고. 이런 '생각'들은 어느날 번개마냥 내리꽂힌 것이 아니라, 뼈와 근육처럼 내 생 전반에 걸쳐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 자라난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찾아왔다. 대학 기숙사는 학기마다 새로 신청해야만 했다. 나는 그 학기에 기숙사 추가합격을 받았기 때문에 룸메이트를 고를 수 없었고, 행정실에서는 내 새 룸메이트가 '중국인'인데 괜찮냐고 물어왔다.

'중국인?'

그 말을 듣자마자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토론토에 있는 어학원에 다닐때, 잠시 친했던 한국사람이 중국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줬었다.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결론은 중국인들은 대부분 더럽고, 불친절하고, 이기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순간에는 "에이. 그건 케바케지."라고 손사레쳤지만 사실 그의 말을 믿었다. 아마 한국에 은연중에 퍼져있는 '중국인에 대한 선입견'도 그 믿음에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니 기숙사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걱정과 짜증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만약 걔가 내 물건을 훔쳐가면 어떡하지? (그러나 생각해보면 도난문제는 한국인과 살때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더러운 냄새를 풍기면? 큰 소리로 떠들거나 예의없이 굴면 어떡하지? 방을 마구잡이로 더럽히면?

온갖 생각을 다하며 방에 도착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본 룸메는 생김새부터가 '중국인 같지 않았다.' 그애는 무척 한국인스러운 머리스타일과 화장법,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서부터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애는 그냥 평범한 사람 같았다. 내 상상속의 '중국인'이 아니라.

그리고 그애가 먼저 나한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ㅁㅁ이에요!"

그렇다. 그애는 정말 한국말을 잘했다! 영어는 더 잘했고, 중국어는 당연히 완벽하게 잘했지만. 어쨌든 걱정했던 언어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밖의 내 모든 걱정이 헛된 망상이었다는 걸 깨닫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그앤 옷도 잘입었고,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면 샤워를 했고, 시끄럽지도 않았고 등등등...

무엇보다 그 애는 놀라울정도로 나에게 친밀하게 굴었다. 어느 날은 나를 부르더니, 선물이라며 한가득 중국에서 사온 기념품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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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맙다는 내 말에 쿨하게 인사하고 친구들이랑 놀러나갔다.

책상 위에 놓인 선물들을 나는 한참이나 보았다. 그때 내 심정이란... 그냥 별 생각없이 받은 진찰인데, 의사가 내 엑스레이 사진을 가리키며 "그보다 여기 뼈가 완전히 비틀려자랐네요. 설마 모르셨어요?" 하고 놀란 얼굴을 하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곧게 서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믿음이 완전히 박살나는 기분. 세상이 기울어졌다. 그렇게 부끄러워졌다.

깨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것.

내가 쉽게 경멸했던 사람들 중에 내가 있었다는 것.

그게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이날의 부끄러움이 나를 조금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나는 내가 다 (대체로 훌륭하게)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아직 많이 모자르고, 깨어나는 중이었다. 지금도 나는 몹쓸 편견들을 갖고 있을테고, 그걸 인식조차 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나 다행인 점은 내가 그걸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일까.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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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귀여운 중국인 룸메였다. 빅뱅과 이종석을 좋아했고, 나는 잘 모르는 한국연예인들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아마 내가 좀더 연예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애랑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이점이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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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글이네...No one knows you but only you know yourself with others in heart.

감사해요^^

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그후에 생각은 '난 아직 매우 어리다'라는 생각으로 살고있어요 너무 공감되네요 ㅎㅎ

사람사는게 다 비슷한가 봐요 :D 언젠간 성숙해질 수 있겠죠?!

맞아여 비슷해여 ㅎㅎ 성숙한 사람이 되고싶네요!

진정한 "성인"이시군요!

앗 그런가요! ㅇㅁㅇ!

너무 멋진 에피소드네요. 리스팀해뒀다가 보팅할게요~ 가즈앗!!

앗 감사해요! :D

인간은 사고 쳬계의 한계 때문에 쉽게 편향적 사고를 하게끔 설계돼 있죠.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미덕이 필요한데 그조차 쉽지 않죠. 그런 미덕을 가진 분의 글을 보게 돼 반갑습니다 :) 저도 한국에 있을 때 중국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제일 친한 친구들 중 반 이상이 중국인이네요 ^^;

앗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미덕이라고 하시니 부끄럽네요 :D 그냥 좀 괜찮은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글을 쓰실 수 있다면 이미 남보다는 나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주위에 나 잘났다고 뿜뿜거리는 닝겐들이 넘 많아서 ㅜㅜ)

히히 그렇게 말씀하시니 뭔가 부끄럽네요 :D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반성할줄아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ㅎㅎ 아닐지언정 그렇게 깨어가고 있는 걸 겁니다.
저도 뒤돌아 보고 그런적이 없는지 한번쯤 생각해봐야겠네요 .. ㅎㅎ
좋은포스팅 잘보고 갑니다!

그때보다는 지금의 제가 더 나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네요! ㅎㅎ
친절한 댓글 감사드려요 :D

이런 생각을하고잇다는게 이미 깨어있으신게
아닐까요 ^_^ 깊은 글보고 다시한번 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 괜찮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할줄 안다면, 그게 무엇이건 고쳐나갈 수 있지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보다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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