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맥락이 사진을 잡아먹는다.

in #kr6 years ago

때론 맥락이 사진을 잡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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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지 못해 후회한 적은 많았지만 사진을 찍었기에 후회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여태껏 부끄럼 없는 사진만 찍어왔다고 생각하니까.

사진을 정보의 시각적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보통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는 상승할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기록에만 의지해야 하는 순간들은 분명 찾아오니까.

여기서 맥락이 개입한다.

평범한 청년의 옛 졸업사진이 20년 후엔 대통령의 청년 시절 모습을 담은 사진이 될 수도 있고 며칠 전 생각없이 찍은 친구의 사진이 그가 죽기 전 찍힌 마지막 순간의 기록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을 찍었든 맥락이 시시각각 개입해 사진의 가치와 의미는 바뀌곤 한다.

내가 찍은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몇 개월에 한 번씩 외장하드를 연결하거나 필름 보관함을 열어 그간 찍었던 사진들을 돌이켜보곤 한다.

사진은 그대로다. 사진 파일엔 변함이 없다. 데이터는 정직하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현실은 변화한다.

이 세상에 더는 없는 사람과 지금은 헤어진 커플부터 시작해, 죄를 저질러 커뮤니티에서 쫓겨난 사람들, 얽히고 섥힌 문제가 터져 해체된 조직과 서로 싸우게 된 과거의 동료들, 누군가의 잘못과 무책임으로 해체된 밴드까지.

사람이 살다보면 인간관계는 변하기 마련이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고 그대로 보내야만 할 때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현재진행형의 맥락들이 과거에 찍어둔 사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게 때론 두렵다.

2년 전에 봤더라면 그리움, 기쁨, 멋짐의 감정을 자아냈을 사진들이 지금은 분노, 슬픔, 우울함의 감정을 자아내게끔 한다.

여기서 미워해야 할 것은 사진이 아닌 사람인 것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나는 사진을 삭제하고픈 충동을 떨쳐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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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봤더라면 그리움, 기쁨, 멋짐의 감정을 자아냈을 사진들이 지금은 분노, 슬픔, 우울함의 감정을 자아내게끔 한다.

그래서 더 찍고 기록해야 하는게 아닐까합니다. 기억할 수 있게요.

사진 속 모든 장면들 속에 누군가의 삶이 들어있으니 어쩔 수 없이 필연적인 부분일 수도 있겠네요.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

맞습니다. 찍힐 땐 아니었지만, 지금 보면 삶이 망가진 이들이 사진에 있어... 착잡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는 delete 기능이 있고 현실에서는 '사진 찢기'라는 기능이 있다는....

싫어진 사람의 사진이라면 사진을 없애 잊는 것도 좋은 방법일것 같아요. 물론 나의 열정과 흔적이 들어있는 사진이 사라지는 건 문제이지만;

개인적으로 싫어한다기보다는, 음 예를 들면 스팀잇에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 사람인데 알고보니 트롤링도 많이 하고 심각하게 어뷰징해서 배척당한 사람-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겁니다. 단순 개인적 호불호라면 굳이 이런 생각이 안 들 텐데...말이죠. 뭐 지우면 제 인생의 큰 부분이 없어지는 거라 안 지울 겁니다. 사진 존버....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기억에 따라 맥락이 달라진다는.. 많은 부분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늘 안좋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내일은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죠. 문득 호밀밭 파수꾼의 한 대목이 생각나네요.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

맞습니다ㅜ.. 그러니 데이터를, 소중한 데이터를 함부러 삭제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지금 막 다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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