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계획표

in #kr6 years ago

생활계획표.jpg

초딩시절 방학마다 짰던 생활계획표, 흰 도화지에 컴퍼스로 동그라미를 그린 후 자를 대고 몇 개의 선을 긋는다. 하루를 시간단위, 타이트하게는 30분 단위로 쪼갠다. 독서와 공부시간 틈틈이 자유시간이 있다. 하루 세끼 식사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취침시간(꿈나라)도 하루 8시간으로 딱 맞혀 있었다.

물론 난 한순간도 생활계획표 대로 지낸 적이 없다. 참 쓸데없는 짓이었다. 왜 그런 계획표를 짰을까. 아이들이 기계가 아닌 이상 하루가 동일한 일과표대로 움직일 수 없다. 군인이나 죄수도 아닌데 딱딱한 쳇바퀴 속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다. 그대로라면 친구가 놀러와도 ‘지금은 독서 시간이야’ 라며 물리칠 판이었다.

대다수에겐 무용했지만, 극소수는 실제 지켰을지도 모른다. 어떤 열혈초딩(혹은 냉혈초딩)은 방학 내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게 과연 사람일까 하게 만드는 이가 간혹 있다. 이런 이들의 일생은 놀랍다. 하면 된다고 하는데, 이들은 실제로 뭐든지 이뤄낸 인생이다. 노력과 열정으로 꿈을 이룬 사람들, 이들은 위인전에 이름을 올렸거나 CEO가 됐을 것이다. 최소 ‘성공습관, 당신도 할 수 있다’ 같은 제목으로 강연을 다니는 중일 테다.

저는 5년간 한시도 꿈을 잊은 적 없어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출근 전 2시간 정도를 짬짬이 공부했고, 퇴근 후에도 잠들기까지 책을 놓지 않았어요. 약속이나 모임 같은 것은 일절 잡지 않았고요. 런닝맨이 뭐죠? 예능프로나 뉴스도 보지 않아 원시인이 됐지 뭐에요. 하하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릴 한다. 사소하고 작은 것부터 실천했더니 어느 새 꿈을 이뤘다. 박수!! 대단하다. 하지만 꿈같은 소리다. 이런건 정말 희귀하다. 내 주위엔 저런 사람이 일체 없다. 거짓말은 아니겠으나, 누구나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되는 놈만 되는 것에 가깝다.

솔직히 내 주위엔 별 볼일 없는 인생 뿐이다. 밥 먹듯 지각하고, 거짓말 한다. 뱉은 말을 지키지 않고, 허세만 장황하다. 자기도 한 때 잘나갔다며 확인 불가능한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탄로나면 금새 바닥을 보이며 어버버한다.

사실은 나도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볼품없다. 빼어난 사람은 극소수다.

못난 사람이 좋다. 인간적이니까. 10년간 생활계획표의 일과를 지킨 냉혈한들은 성공한 괴물이다. 이들은 인간미가 없다. 실패한 보통사람이 낫다.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들은 따듯하면서 나를 이해해줄 사람들이다.

각 잡힌 수트보다 구겨진 자켓이 좋다. 잘 다려진 와이셔츠보다 편한 티셔츠를 고르게 된다. 광나는 구두보다 닳은 슬리퍼가 좋다. 다소 헝클어진 모습이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준다. 몸에 꽉 끼는 긴장감보다 헐랑한 편안함이 몇 배는 좋다.

내가 가진 뱃살은 인간적인 풍모다. 가끔 감지 않는 머리도 자연인의 모습이다. 새벽 4시에 잠들어 오후를 넘겨 일어나는 생활 습관도 느긋한 일상일 뿐이다. 꽉 조인 넥타이는 사람을 질식시킨다. 둥그라미 속 생활계획표는 감옥이다. 긴장과 초읽기 속의 삶보다 여유로운 생활이 낫다.

...라고 자위한다. 사실 잘 모르겠다. 요샌 너무 체계 없이 되는대로 사는 것 같다. 꽉잡힌 일과와 무계획, 성공습관과 실패습관 사이에서 한쪽에 치우쳐 있다. 20년 만에 생활계획표를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손에 쥘 나침반이나 갈림길에 꽂을 이정표를 마련해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야겠다.

남북정상회담은 계획대로 되었음 한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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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이라 못난사람이 좋다는 문장 너무나 와닿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방문과 댓글도 감사드려요~
맞팔 했습니다. ^^

저 시간표가 초딩때 작품이라면 그땐 무척 범생이셨네요.
지금은 자유인이 되고싶으신것 같고. ㅎㅎ
모두 아름다운 시절입니다. ㅎㅎ

인터넷 불펌 사진입니다ㅋㅋㅋ
이미 자유인이지만 너무 자유가 많아 힘들 지경이네요ㅠ ㅎㅎ
방문 감사드립니다. ^^

저 생활계획표를 아직까지 가지고 계시다는게 더 놀라운데요.ㅎㅎ

설마요..ㅋㅋ 제것일리가 없죠ㅎㅎ
넷상에서 최대한 빡빡한 사진으로 퍼왔습니다ㅋ

자신에게 맞는 삶을 살아가는것에 좋고 나쁨이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이들도
태반이기에 오늘도 청사진이라고 일컫는 이들은
지속적으로 드러냄을 통해서 지표를 만들어가나 봅니다.

넵 맞아요. 어떤 구체적인 목표나 지점이 있어야 하는 것 같긴 해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각자의 방식에 맞추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나무늘보나 거북이도 자신의 영역에서는 누구못지않게 최고죠~~ 자신의 본질을 찾거나 아는여정도 좋구요!!

오오 맞습니다. ㅋㅋ 남들 기준에 맞춰갈 필요는 없겠죠~
정말 좋은 말씀이네요. ^^

빡빡하면 어때요..안지키면 되지롱~~
인간적으로다가^^

전 항상 달성률 0프로였습니다. ㅋㅋ
대부분 비슷할거라 확신하구요ㅎㅎㅎ

백프로 장담합니다... 저거 지키는 사람 없었어요..... 누구 머리에서 저걸 방학때마다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방학은 그저 학교 안가니.... 열심히 자고 놀고... 했던걸로 기억을 하네요

요즘도 있긴 있는 것 같던데.. 저도 정말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애들을 다람쥐 쳇바퀴에 가두려고 하다니요. 노는 게 남는건데 말이에요. ㅎㅎㅎ

생활계획표에 짜여진 시간 중에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남이 봤을 때 못나도 좋으니 그냥 나답게 살았으면 좋겠어요ㅎㅎ
남북정상도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자고 하잖아요!^^

맞아요. 다 좋자고 하는거고 행복하려고 사는건데.. 뒤쳐지면 안된다는 두려움은 너무 큰 것 같아요. ㅎㅎ 정상회담 잘 되었으니 이어질 후속 회담들도 좋은 결과로 나타났음 좋겠습니다~

전 생활 계획표를 잘 지켰죠.
24시간 전부 자유시간 이었거든요. ㅎㅎ

오오 그러셨군요ㅋㅋ 사실 저도 그랬는데...
요샌 자유시간이 너무 많아 벅차네요ㅠ ㅋㅋㅋ

그럼 나는 안좋아하셨으면 좋겠다..
인간적이지 않고싶다!!!! 쳇
업봇 팔로 하고가요

인간은 알파고가 아닌데요ㅋㅋ
업봇과 팔로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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