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자의 사진엽서│ 06 안전지대 밖에서

in kr •  13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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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의 사진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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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 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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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여섯 번째 편지는 일요일에 부칩니다. 우체국을 통해 편지를 보낸다면 주말에는 쉴 핑계라도 대고 싶지만, 이 공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열려 있기에 게을러질 수가 없습니다. 요일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루씩 앞당겨 보내기로 약속했으니까요. 마음이 무거운 날이든 가벼운 날이든 최종적인 언어를 꺼내야 하니 초침처럼 침착하게 일정 속도를 유지하는 리듬 감각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였습니다. 엊그제 잠깐 우박이 떨어졌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남극 대륙과 열대 지방 중간에 위치한 남위 40도대는 지구의 감정 변화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구간입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봄볕을 맞으니 북섬에서 지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합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어떤 일이 해결되는 시기에 맞춰 남섬으로 내려갈 생각이에요.



 '가족과 친구'라는 안전지대 밖으로 나온 지도 반년이 되었습니다. 한 달 뒤에는 제가 돌아올 줄 알았던 어머니는 늘 '그만하고 돌아오라'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제야 무언가를 시작한 것 같은 저로서는 이 모험을 중단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가족의 보호가 존재한다는 건 말도 못 할 행운입니다. 집을 떠나와 방랑객으로 푸대접을 받을 때면 우리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지요.



 그렇지만 가족의 일이라면 두 발 벗고 직접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어머니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면 자존감을 길러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물컹물컹한 물침대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든달까요. 이 거친 세계에서 손톱 하나 다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하지만 맨 땅을 밟고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몸을 일으켜보지 않으면 자신의 무게를 절대로 가늠해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여전히 '태아'일뿐이지요. 다정하고 희생정신이 강하신 어머니의 성격을 바꾸는 건 불가능할 테니 제가 움직여야 합니다. '이기적이다, 저만 생각한다'는 말들을 감내하는 것도 상관없어요. 스스로 흡족할 삶의 방식과 수단을 찾는 것이 지금 제 삶의 시점에서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Victoria Park, Auckland,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제 속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알맹이─고통이 아니기에 '응어리'라고는 표현하지 않았습니다─가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이 6개월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단단한 씨앗에도 싹이 돋듯이 변화는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도 가슴뼈 가운데로 그 알맹이를 느낄 수 있지요. 제가 여기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끝까지 추적하고 여러 방법들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알맹이가 풀리지 않는 것은, 짐작컨대 이중 삼중 사중의 보이지 않는 장막이 그것을 꼭 쥐고 감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의 끝에 다다를 즈음에는 알맹이의 실체도 드러나게 될까요. 제가 그것을 당신에게도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가장 가진 것이 없는 시기이지만 하고 싶은 일과 일상 노동으로 채워지는 하루하루가 기대되고 큰 만족을 줍니다. 이렇게 안전지대 밖을 선택했지만, 원하는 일을 지키고 최소한의 영역만큼의 삶을 가꾸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시간들도 생각보다 '실질적인 안전지대'입니다. 삶의 본질로, 풀리지 않은 알맹이로 곧장 걸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어요.


(2018년 9월 9일 일요일)







기록자의 사진엽서 │ 우편함

2018년 8월 10일 금요일, 첫 번째 편지를 띄웁니다
2018년 8월 16일 목요일, 조절 가능한 불행에 대하여
2018년 8월 22일 수요일, 사진과 글로 호흡하기
2018년 8월 28일 화요일, 숲의 바람을 전합니다
2018년 9월 3일 월요일, 숲에서 배우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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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lin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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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 밖을 선택했지만, 역설적으로 '실질적인 안전지대'라는 인식이 좋습니다. 현실과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안전'이라는 개념은 다른 경우가 많지요. 결국 어떤 '안전'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행동과 결단이 달라지겠지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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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이라는 개념은 객관적인 영역과 주관적인 영역에 함께 존재하고 있더라고요. 특히나 '주관적인 영역의 안전'은 쉽게 보편적인 개념 안에 숨어버리는 것 같아요. :) 제게 필요한 안전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답니다ㅎㅎㅎㅎ 좋은 댓글 감사드려요 소울메이트님!!!!!!!!

가끔은 그 안전지대가 그리워질 때도 있는 것 같아요.
따뜻하고, 포근하고 그러나 그 안전함도 바깥에 나가지 않으면 알 수없죠. ㅎㅎ
by효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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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맞아요. 푸대접을 받아보니 그동안 얼마나 '우리만의 바운더리'에 안락하게 살고 있었는지 실감이 났답니다ㅎㅎㅎㅎㅎ 그렇지만 아무리 그리워도 지금은 참고 성장하는 시기이니 용감하게 걸어나가 볼래요!! (o˘◡˘o)

가장 좋은 안전지대는 내가 만든 내 울타리 아닐까요. 나의 삶은 결국 나만의 몫이니까. 그런데, 사진인가요 그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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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 p님의 생각에 동의해요. :)
우린 모두 제한된 시간 속에 살아서, 이것저것 전부 다 해볼 시간은 없는 거니까. 가장 원하는 삶으로 최대한 다가가다가 사라지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아요. :-)

오클랜드 빅토리아 공원에서 담은 사진이랍니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날이었어요 ㅎㅎ